"한나라당 행 후회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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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행 후회한 적 없다"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0.07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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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배일도 전 의원
배일도 전 국회의원(한나라당)은 한국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상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에서 ‘부자당’, ‘기득권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그의 변신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배신’이나 ‘변절’이라며 원색적으로 비하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 5일 여의도의 배 전 의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그가 걸어온 길과 한나라당 의원으로의 변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재보궐 선거나 차기 총선에 출마할 의향이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는 배 전 의원을 만나기 전 그의 약력을 살펴보며 학력 부분에서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란 막연한 상상을 했다. 최종 학력은 전북대 자원공학과 중퇴로 돼 있어 독학으로 많은 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였다.
 
▲ 배일도 전 의원은 자신의 한나라당 행의 정당성을 사회의 변화와 다양성으로 설명했다.   © 시사오늘


그가 국회에 들어가기 전 쌓은 주요 경력은 서울지하철(현 서울메트로) 노동조합 설립, 제1대 위원장,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민주노총의 전신) 설립, 초대 의장, 노동조합 활동 관련 구속과 해고(1988년), 10년 후 복직,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 위원장(제9대, 제10대, 제11대) 등이다. 이 정도면 한국 노동운동계의 ‘대부’라 불러도 지나치지는 않을 듯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 포기,
전북 전체 1등으로 중학교 장학생으로 다녀

인터뷰를 시작하며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돌아봤다. 노동운동의 씨앗은 이 때부터 뿌려졌을 지도 모른다. 배 전 의원은 1950년 전북 김제의 가난한 집안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늘 저녁이 지날 즈음이면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했다”고 한다. 1963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 입학금 3,820원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 일을 도우며 2년의 시간을 보낸 후 그 시절 시행되던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전북 전체 1등을 해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기고에 진학할 생각을 했다. 전화라고는 한 개 면에 한 대 정도 있던 시절, 서울에 살던 작은아버지에게 경기고 입학 원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원서가 도착한 건 접수 기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배 전 의원은 “서울에 세 분의 숙부가 살고 있었지만 모두 형편이 어려워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 짐이 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학업문제는 언제나 거처와 학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는 전북대 공대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2학년 때 자퇴하고 서울로 상경해 서울대 입시에 도전할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남동생이 전기 가설 일을 하다 감전사하는 일이 벌어져 입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군대에 갔다 온 후 복학하지 않아 전북대 공대에서는 자퇴로 처리됐다.

우선은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서울시 9급 공무원과 철도청 채용 시험에 계속적으로 응시했고 모두 합격했다. 그 중간에 꽃집을 운영한 적도 있다. 처음으로 발령난 곳은 서울시 금천구 독산2동 사무소로 1979년부터 일을 시작해 이듬해 그만두고 철도청 발령을 받았다.

배 전 의원의 운명을 좌우했던 서울지하철에는 34세 때인 1983년 입사했다.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꼬박 하루를 근무하고 하루를 쉬는 근무체제였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서울지하철 사장은 육군 소장 출신, 본부장은 준장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지하철 조직이나 문화도 군대의 병영문화를 옮겨다 놓은 것처럼 획일적이고 권위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주는 대로 받지 말자”고 동료들 설득해 서울지하철 노조 설립

배 전 의원은 “서울지하철 병영문화를 바꾸기 위해 내가 나섰다”고 말했다. 시대적 분위기가 노조 설립은 곧 구속과 해고로 이어졌지만 공공부문은 법률적으로 노조 설립이 가능해 암암리에 이뤄진 사측의 회유와 탄압을 이겨내며 노조 설립을 치밀히 준비해 나갔다.
 
▲ "한나라당에 있다고 해서 노동운동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배일도 전 의원.   © 시사오늘


노조 설립을 위해서는 근로자 30명 이상의 참여가 필요했고 배 전 의원의 동료 200명에게 “주는 대로 받지 말고 우리 권리를 찾자”며 “서울역에서 보자”고 제안했다. 동료들은 배 전 의원이 노조를 설립하려 한다는 의중을 파악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을 깨 실제 서울역에 나온 근로자는 18명이었다. 노조 설립의 최소 요건도 갖추지 못한 인원이었다.

배 전 의원은 “각자 한 명씩만 더 데려오자”고 설득했고 57명이 모여 노조를 설립할 수 있었다. 사측에서는 그의 노조 설립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유령 노조를 만들었지만 배 전 의원이 사측에 앞서 노조 설립 신고를 끝내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이 탄생된 것이다.
 
57명으로 시작한 노조는 출범 한 달이 채 안 돼 전체 근로자의 99%가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놀라운 응집력을 보여줬다.

초대 위원장이 된 후 1988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를 설립 초대 의장을 맡았다. 서노협은 민주노총의 전신이기도 하다. 서노협 의장 시절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 부의장,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가 사무처장, 천영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도위원이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선택 후회 없다”

노동운동가에게 정해진 수순처럼 배 전 의원은 서울지하철 노조 설립 1년이 지나 구속과 해고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10년 뒤에야 복직했다. 복직 후에는 제9대부터 제11대까지 3기 연속 노조 위원장을 맡았다.

제17대 총선이 있던 지난 2004년 서노협 설립 시절 동지들이었던 배일도, 단병호, 심상정, 천영세는 모두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달랐다. 배 전 의원이 보수 정당이라 불리던 한나라당을 택했고 다른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주역이었다.

배 전 의원에게 한나라당에서 먼저 비례대표 제의를 해 왔다. 공천을 맡고 있던 한 인사가 전화를 걸어와 “노동운동을 할 만큼 했고 그런 뜻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때가 됐다. 한나라당도 이제 뉴 한나라당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속에 참여해 노동자의 권리도 실현하고 사회개혁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한나라당이 가진 한계를 채워 달라”고 요청했다.

배 전 의원은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단 몇 초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한나라당에서 그를 비례대표로 영입한다고 신문에 발표해 버렸다. 속초에 있던 배 전 의원은 노조 상근집행위원(상집)들과 회의를 했고 상집들의 “한나라당에 가서 제대로 된 정책이 마련되도록 해 달라”는 말에 한나라당 행을 결정했다.

기자가 한나라당을 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지 묻자 배 전 의원은 “후회 없다”고 단정적이고 단호하게 답했다.
 
노동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정치를 하고 있는데 배 전 의원도 진보정당에 몸담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내가 민주노동당에 있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변화했고 집권에도 성공했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배 전 의원은 한나라당 행의 정당성을 시대의 변화상에서 찾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과거에는 사회구조가 단순해 계급은 지배와 피지배 구도로 단순히 양분됐지만 현재는 다양성의 시대로서 노동자계층 내부에도 최극빈층부터 귀족까지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고 자본가 중에는 노동자 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계층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회의원 다시 꼭 하겠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부자당’, ‘차떼기당’, ‘경상도당’으로 치부된 적이 있지만 한나라당 내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고 배 전 의원 자신도 다양성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 모두가 반대하거나 찬성할 것으로 여겨지던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했던 것도,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던 것도 자신이었고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자신이 유일했다고 한다.

노동운동의 방식도 운동계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운동계 밖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두 가지가 있다며 한나라당 의원이 됐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운동을 그만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배 전 의원은 한나라당 내에서 소수자로 의정활동을 펼치다 18대 총선에서 남양주 공천신청을 냈지만 낙천하고 말았다. “정치를 계속 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지금도 정치는 계속 하고 있다”고 답한 배 전 의원은 앞으로 재보궐 선거나 차기 총선에 출마할 의향이 있는지에 대해 “공천 신청을 할 것이고 꼭 출마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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