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정희> "박정희는 독립군을 때려잡는 친일행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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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정희> "박정희는 독립군을 때려잡는 친일행위자였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1.09.28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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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박정희의 본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10·26이 없이 그냥 물러날 수도 없었거니와 만약 그냥 물러났더라면?

박정희는 처음부터 내려갈 생각은 없었고 영구 집권을 꿈꾸면서 18년이나 앞만 보고 달려왔다. 너무 높이 올라왔다. 내려갈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박정희는 10·26이 없었으면 강압으로 얼마를 더 버텼을까? 탱크로 몇 만의 국민을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보릿고개를 없앴다고, 경제를 살린다고, 국가의 안보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한국적 민주주의 한다고 하면서 ‘한국놈은 맞아야 한다’고 두들겨 패면서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고 민주 정치를 깔아뭉갠 정답이 10·26이 아니겠는가?

10·26이 없었으면 박정희 정권은 4·19보다 훨씬 강력한 국민의 저항을 받고 비참하게 무너졌거나, 아니면 독재자의 말기적 현상으로 이성마저 잃고 국민을 더욱 무자비하게 탄압해 죽이고 가두고 해서 국민들이 비참하게 됐을 것이다. 10·26으로 인해 박정희의 죽음은 안됐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불행을 사전에 막은 사건이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

어떻든 다시는 쿠데타 같은 정변도, 10·26같은 비극도 있어서는 안 된다.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주체라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불법 단체가 자의로 만든 최고 회의법을 ‘악법도 법’이라고 복종을 강요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의 종교적 사상적 민권 운동의 지도자 함석헌 선생은  “애비 때려 죽여 놓고 제사는 왜 지내?” 하며 쿠데타에 항거하는 연설을 했다고 감옥에 갔다.

박정희는 한마디로 솔직히 말하면 반역자다. 그의 리더십은 애국심도 없고 도덕적 합리성은 더더욱 없다. 쿠데타,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 계엄령, 유신 등 강압수단을 적당히 섞어가며 언론말살, 불법, 무법의 강권통치로 일관해 사실상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는 당연히 배척해야할 리더십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부정이 곧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헌법 위에 박정희의 私法이 있었고, 자신이 만든 헌법도 늘 無視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부터 18년 동안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무력을 동원해 강압에 의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국민투표형식을 빌어 헌법을 개악하고 국회도 해산하고 급기야는 국회의원까지도 마음대로 임명했다. 그는 늘 헌법위에 있었고, 헌법의 어떤 규정도 박정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자기 욕망대로 자기주관으로 만든 헌법도 늘 무시했다.

△5·16으로 4·19 후 정당하게 개정한 민주헌법을 임의로 효력을 정지시켰다.
△쿠데타 2년 후에 내각제 헌법을 대통령제로 바꿨다.
△대통령을 두 번하고, 할 일이 남아서 한번만 더 하겠다고 3선 개헌을 하고
△또 2년 후에 유신을 해야 되겠다고 또 개헌 (유신헌법)을 했다.

이핑계저핑계로 헌법을 네 번이나 고치면서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헌법의 존엄성을 정중한 자세로 대하지도 않았고 지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독재는 안 된다, 공산독재는 더욱 안 된다, 전통적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우리는 철저하게 배웠다.                        

▲ 김영삼이 박정희 등 군부세력과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굴의 정신과 그를 뒷받침했던 민주산악회 때문이었다. ⓒ사진제공=이성춘

박정희와 김재규 차지철의 10·26은 재조명돼야 한다

이만섭 국회의장을 비롯해 박정희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 중에는 박정희에게 총을 쏜 김재규를 합리적인 인격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에게 총을 겨눴을까? 올바른 역사 기록을 위해서도 10·26의 진상은 국민에게 제대로 밝혀야 한다.

박정희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가 죽은지가 30년이 되었다. 요즈음 여론 조사에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정치를 잘한 대통령은 박정희라고 대답한 사람이 제일 많다고 각종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왜 그런 대답을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애국자이고, 제일 깨끗하고, 보릿고개를 없앴고, 고속도로를 만들고, 포항제철을 만들고,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끌어 국민소득을 올려놓아 북한 김일성을 앞질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를 냉철하게 보자

박정희는 친일행위자(親日行爲者)였다.
그는 왜정시절 졸업만 하면 학교 교사로 취직이 보장 되는 사범학교를 나와 우선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는데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서 대일본제국을 지키는 군인이 되어, 중국을 비롯한 대륙 침략과 ‘조선 독립운동의 선각자인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관동군 장교로 배치되어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이 된 날까지 일본군 중위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온 민족이 해방이 되었다고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외칠 때, 일본군 장성의 꿈을 안고 일본 천황에게 일본인 장교보다도 더 열심히 충성하던 박정희는 일본의 패망을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친일행위자(親日行爲者)다.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또 안다고 해도 “왜 다 지난 일을 들춰내느냐?”고 그때 국내에 살면서 성을 일본 성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말을 하고, 학교에 다녔으면 다 친일파가 아니냐고 항변한다.

주로 박정희를 전적으로 아끼는 사람들의 말이기는 하지만, 한편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수많은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을 섰고, 또 많은 앞잡이들이 일제에 아부하며 안 해도 될 짓까지 자진해서 하면서 독립 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들과 민족을 괴롭혀가면서 어떻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자기만의 영달을 위하여 악랄한 짓을 한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해방 후 주객이 전도된 ‘민족의 얼’이 빠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시간이 너무 지났고, 또 당사자들이 이미 죽어서 진실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민족정기(民族精氣)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늦었지만 그때의 진실만이라도 밝혀 적극적인 친일의 사례들을 적시하여 국민의 정신함양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 치하에 살면서 ‘모진 목숨 끊지 못해서 굴욕을 참고 산 사람들’까지도 ‘악랄한 친일파를 감싸기 위하여’, “살아 있으면 다 친일파지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억지를 쓰면 안 된다.

더구나 명백한 친일행위자 박정희를 감싸기 위하여, 선량한 국민들까지 친일파라고 억지를 쓰는 박정희 친위 세력들은 이 나라의 참된 역사 발전을 위하여 흔들렸던 이성을 되찾고 냉정하게 자숙할 때가 됐다.    

국가의 흥망도 동포의 억울함도 상관없이 ‘나만 잘살면 된다’고 적극적으로 일본에 충성하거나, 일본관헌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박해하고 독립을 방해한 사람은 가급적 가려내 사례별로 밝히고 그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민족 앞에 진정으로 사죄하도록 하는 것이 문화민족의 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선진 문화국민의 자격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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