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청 이전과 김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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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이전과 김갑순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0.15 1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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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땅 투기의 원조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이 충남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대로 이전된다. 충남도청 이전부지는 지난 2006년 2월 확정돼 올 6월 15일 기공식을 열고 공사에 착수했다. 충남도청의 이전이 확정되기까지는 무려 17년의 시간이 걸렸다.

대전이 1989년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충청남도에서 지역분리 된 후 도청이 더 이상 대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도청이전부지 선정작업이 한창일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걸고 당선돼 선정작업은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일단락된 후로 미뤄지다 2006년에야 홍성군과 예산군으로 최종 확정된 것이다.

두 개의 군으로 나뉘어 선정된 것에 대해 서울시의회 의장을 지낸 한 정치권 인사는 “시군 간의 과다 경쟁과 지역 이기주의를 어떻게든 잠재우려는 충남도의 고육책”이라고 말했다. 도청이전으로 인한 부동산 가격 상승과 지역 개발 이익을 특정 시군이 독점할 경우 타 시군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라는 지역 단위를 놓고 봤을 때 도청이 한 개 시군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충남도청의 대전 시대는 오는 2012년 말 예정대로 신청사가 준공되면 막을 내리겠지만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공주에서 대전으로 충남도청이 이전된 사건과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인물 ‘김갑순(金甲淳, 1872~1960)을 떠올리게 된다.
 
김갑순은 우리나라 땅 투기꾼 1호로 불리는 인물로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 자리를 기증한 장본인이다.
 
대전 충남도청 부지 기증해 주변 땅값 폭등시켜
 
▲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 청사.     © 시사오늘


대전 이전의 충남도청소재지가 공주였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드물다. 정확히 1932년 10월 11일자로 공주에서 대전으로 도청이전이 완료됐다. 그 이전에는 1924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1921년 평북도청이 의주에서 신의주로 옮겨졌다. 도청이전은 일제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모두 철도 교통의 요지로 이전됐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곳으로 이미 1910년대부터 도청이전설이 돌던 대전은 ‘공주는 몰락하는 황성옛터’라고 주장하며 도청이전을 앞당기려 했고 이에 공주는 ‘전통 있는 조선의 도시’로 맞섰다.

충남도청 이전은 일제 치하에서 시대의 흐름이기도 해 공주가 반대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갑순에 의해 도청 이전이 시기적으로 앞당겨졌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는 공주에서 서울에 갈 때 자기 땅 반, 남의 땅 반을 밟고 간다던 땅부자였다.

김갑순은 땅투기로 번 돈으로 고위 관료과 친분을 쌓고 그들로부터 개발 정보를 입수해 대전 지역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일제 하 대지주 명부’에 따르면 김갑순이 공주와 대전 지역에 소유하고 있던 땅은 1,011만여 평 규모다. 이 중 대전에 있던 소유지는 22만 평인데 1938년 기준으로 대전 시가지의 약 40%가 김갑순 한 사람 차지였던 셈이다.

조선시대까지 대전은 공주부(公州府)의 작은 마을에 불과해 1904년 호남선이 개통될 당시 수십 가구에 100명 안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찍이 재리에 밝았던 김갑순은 대전에 도시개발이 시작됨과 동시에 집중적으로 헐값에 땅을 매입했다.

그는 대전의 유지들을 총 동원해 대전에 충남도청 이전을 성공시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도청 부지로 기부해 주변 땅값을 폭등시켜 기부한 땅의 수십 배 차익을 얻었다.
 
▲ 충남도청 신청사 기공식 장면. 홍성, 예산 일대에 부동산 투기 바람 조짐이 보인다.     © 시사오늘

 
김갑순의 재산이 순식간에 증식된 것도 대전 토지 가격이 급상승한 덕이 큰데 1~2전에 산 땅이 도청 이전 후 1백 원 이상으로 뛰었다고 한다. 평당 15전 내외에서 수백 원으로 폭등했다는 말도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관노에서 벼락 출세, 군수로 재직하며 재산 축적

김갑순은 어려서 아버지와 형을 잃어 13세에 호주가 된 것으로 전하며 어머니는 장터에서 국밥 장사를 했다. 어려서부터 공주 감영에서 관노(官奴)로 잔심부름을 하다 투전판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묘령의 여인을 알게 돼 그녀를 충청감사의 소첩으로 소개하면서 출세길이 열렸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 그의 벼락 출세가 열리게 된 계기는 충청감사의 어릴 적 친구가 과년한 딸을 시집보낼 비용이 없어 충청감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김갑순이 피륙과 엽전을 줘 보냈던 일이다. 후에 호조판서가 된 충청감사의 친구는 김갑순이 관원이 되는데 적극 후원했다고 한다.
 
‘구한말 관원이력서’에 의하면 김갑순은 1900년 충북 관찰부 주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이듬해 중추원 의관과 내장원 봉쇄관을 거쳐 1902년 부여군수에 오른다. 내장원 봉쇄관으로 있으면서 착복한 돈으로 군수 자리를 산 것이다. 그 무렵 매관매직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화된 일이었다.

이후 약 10년 동안 충남지역 6개 군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금을 횡령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특히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김갑순은 아산군수로 있었는데 군수에게는 상납금(上納金)징수 권한이 있었고 3년 이상 된 모든 국세를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돼 있었다. 체납된 세금을 공짜로 탕감해 줄 군수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땅 자기 돈으로 최고가 매입 위장해 땅값 올려

1911년 아산군수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김갑순은 고향 공주로 돌아와 그동안 긁어모은 재산으로 공주시 반죽동에 명문거족이 살던 집을 샀다. 이때부터 이재술을 발휘해 머슴들에게 장터에 나가 김갑순의 재산과 위세를 떠벌리게 시켰고, 늘려서 돌려달라며 김갑순에게 돈을 맡기는 사람이 생겨났다.
 
김갑순은 이 돈으로 개발정보를 입수한 대전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다. 이 뿐만 아니라 자기 돈으로 자기 사람을 시켜 제 땅을 최고가로 사들이게 해 주변 땅값을 올리는 술책도 부렸다.

자식들을 정략결혼 시켜 축재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는 호적상 7남 4녀를 두었는데 모두 지역유지나 세도가와 결혼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7남 종소를 매국노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의 딸과 결혼시킨 것이다.

김갑순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자신의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에 나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흥아보국단 등의 간부를 맡았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하자 공주 출신 초대 국회의원 김명동 반민특위 조사위원 일행에게 체포돼 수모를 겪었고 한국전쟁 와중에는 인민군에게 죽임의 위험에 처했지만 그가 데리고 있던 마름의 자식이 마침 인민군 장교로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갑순은 소작인에게는 가혹하게 소작료를 거뒀지만 마름에게는 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당대에 흥해 당대에 망한 보기 드문 인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반민특위에 겪은 수모를 갚을 생각으로 두 아들과 장손을 출마시켰지만 모두 낙선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그 많던 재산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가 살던 집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고 하는데 김갑순처럼 당대에 흥해서 당대에 망한 예도 드문 듯하다.

그러나 최근 김갑순의 손녀 김모씨(59)가 ‘조상땅 찾기’로 공주, 연기, 부여 일대의 땅 6,273평을 되찾았고 손자 김모씨(70)도 공주 일대 3,700평을 되찾은 것으로 보도돼 화제를 모았다. 시가로는 각각 수십억 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공주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한 시민은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김갑순의 자손들이 기증된 대전의 충남도청 부지도 반환하라는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 시민은 “내가 올해 62세인데 내 나이 8~9살 때 김갑순이 죽은 것으로 기억한다”며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는 조건으로 금강다리를 공주에 놔준 것도 김갑순”이라고 말했다.

그 시민은 김갑순이 공주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공주시 반죽동에 김갑순이 살던 집이 그대로 있지만 주인이 바뀌었다.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벌었어도 공주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은 없다”고 답했다.
 
새 충남도청 부지 인근에도 부동산 투기 조짐

기자는 충남도청 이전과 김갑순의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홍성의 한 부동산 업자가 낸 광고를 접할 수 있었다. ‘도청 이전부지를 정확히 예측해 여러 고객님께 시세 차익을 드렸다. 앞으로도 믿고 의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예정대로 충남도청이 오는 2012년 이전된다면 꼭 80년 만에 대전에서 홍성과 예산으로 도청이 옮겨 가는 것이다.

8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부동산 투기가 도청을 따라다니는 것은 변함이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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