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다. 바로 조선의 대표적인 충신인 오리(梧里) 이원익 대감을 일컫는 말인가 싶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대표적인 구국의 영웅이다. 그는 임진왜란 전부터 조정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혼란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이원익의 애국애족 정신은 임진왜란에서 빛났다. 이원익은 전쟁이 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돼 선조의 몽진을 호종했고, 조명 연합군의 지휘부로서 평양성 탈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이원익은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까지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맡아 전쟁 수행과 전후 복구에 힘썼다. 조선 중기 만백성의 원성을 받던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대동법을 건의해 이를 실행시켜, 조세 정의를 실현코자 했던 명재상이 이원익이다. 역사 드라마에선 광해군=대동법으로 인식하지만 실은 대동법은 이원익의 역작이었다.
특히 이원익은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사라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정치 소신을 바꾸는 일을 거부한 진정한 충신이었다.
<인조실록> 인조 12년 1월 29일 기사를 보자.
“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관서에 두 번 부임했었는데 서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조조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臨海), 영창(永昌)의 옥사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할 때도 소장을 올려 잘못을 꾸짖는 국가 원로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결국 광해군은 이원익의 간청을 무시하고 오히려 격분해 홍천으로 귀양을 보내는 악행을 저질렀다.
세상이 바뀌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와 서인의 세상이 됐지만 반정 세력도 남인인 이원익을 찾았다,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의 나이 75세 고령이었다. 하지만 이원익은 이를 마다하지 않고 관직에 나섰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도 조선을 위해 온 몸을 바쳤다. 국가 위기 시 원로의 롤모델은 이원익의 몫이었다.
<인조실록>은 이원익의 졸기를 통해 그의 검소한 성품에 대해서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라고 전한다. 평생을 조선과 백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이원익은 1634년, 8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전 선대위원장이 나이 80의 노구를 이끌고 미래통합당의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김 전 위원장은 유신 체제부터 현재까지 현대 정치사의 굵직한 장면마다 등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선출직의 꽃인 국회의원을 비례대표로만 5선을 기록한 처세의 달인이기도 하다. 또한 김종인 전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과 정반대인 문재인 정부 탄생에도 기여한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김종인 전 위원장이 지난 4·15 총선 미래통합당의 참패 책임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팩트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는 참패 직후 미래통합당을 겨냥해 “통합당은 보수란 개념조차 모르면서 보수통합만 부르짖었다”,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대안을 제시해줘야 하는데, 그걸 안 하고 막연하게 보수, 보수한다“고 맹비난했다. 참패한 선대위원장으로서 할 말은 아닌 듯하다.
현재 분위기로선 김종인 비대위 출범이 가시화되고 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이 보수의 개혁을 원한다면 오리(梧里) 이원익 대감의 일생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길 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