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어떠한 경우에 굴욕과 원한을 느끼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부 소농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동부 노동자의 대표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인 앙드레 모로아는 <미국사>에서 신생국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을 평가한 내용이다.
역사는 그를 신생국 미국을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로 이끈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주류 정치인들은 버지니아 상류 계급에 고학력과 대지주로서 금수저를 물고 성장한 준비된 명문가 출신이다. 잭슨과 같은 변방의 촌놈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엔 정말 힘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잭슨은 태생부터 이들과 달랐다. 그는 미국의 변방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왁스호(Waxhaw)에서 비주류의 상징인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자손이었다. 또한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미국판 ‘개천에서 난 용’의 대명사다.
앤드루 잭슨은 흙수저 출신으로서 판사와 정치인으로 활약했지만 정작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일은 1812년 발생한 미영 전쟁이다. 그는 민병대를 지휘해 전쟁의 승패를 가른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궤멸시켜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
잭슨은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서 정계에 복귀해 대권 도전에 나섰으나 1824년 대선에서 J.애덤스에게 패해 낙선했다. 그는 4년간 절치부심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1828년 대선에서 승리해 서부 출신 최초로 제7대 대통령이 됐다.
앙드레 모로아는 <미국사>에서 당시 취임식 상황을 “취임식 전야에 그를 숭배하고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이 수도로 몰려들었다. 남부와 서부의 각 주는 하나도 빠짐없이 축하사절단을 파견했다”며 “선거운동의 대가로 지위를 요구하려고 온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잭슨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경의의 갈채를 보내기 위해 모여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잭슨 대통령의 상징이 된 ‘잭슨 민주주의’는 미국 대중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미국 사회를 주도하는 기업의 독과점과 금융업자의 부당한 이익 등 기득권층을 증오하며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 잭슨은 참정권의 확대, 일반 당원들이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제의 개선 등으로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대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했다는 대중 민주주의의 개척자였다.
하지만 그는 ‘Old Hickory’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긍정적으로는 불의를 참지 못하며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타협을 모르고 투쟁만 일삼은 정치인이라는 부정적인 뜻도 담겼다. 그는 임기 내내 의회와 대립하며 거부권을 남발했던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겨졌다.
특히 그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엽관제’의 폐단을 만든 대통령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앙드레 모로아는 잭슨 대통령의 엽관제와 관련해 “그는 사람이란 아무 직위에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고 애덤스나 클레이의 패거리보다는 자기를 신뢰하는 동지들이 더 훌륭한 우체국장이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잭슨의 엽관제는 어찌 보면 자기 사람만 중용한다는 패거리 정치의 폐단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잭슨의 반대파는 그의 인사정책에 대해서 ‘Kitchen Cabinet(부엌 내각)’이라고 비꼬았다.
23일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1주기다. 노 전 대통령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처럼 한국의 정치사에서 주류 엘리트가 아닌 비주류 출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지평을 열은 정치인이다.
역사의 평가는 후대의 몫이지만 소수가 아닌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를 개막하는 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선 이의가 없을 것이다. 최근의 정국을 보면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정치인들이 고인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