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정희>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 이었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김영삼과 박정희>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 이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1.12.20 15:1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⑪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진실 Ⅲ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한다고 군사 반란을 일으킨 박정희는 확실한 남로당 당원이었다. 중앙일보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연중 기획으로 연재중인 백선엽의 ‘군과 함께한 60년’중 2010년 8월 2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127화 ‘지리산의 숨은 적들 중 박정희’중에서 2010년 8월6일자까지의 5회분을 발취하여 여기 옮긴다.

『박정희는 명동 지하(옛 증권거래소 건물)에 갇혀 있었다. 열흘 뒤면 사형이었다. 서울 명동의 거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늘 분주했다. 숙군작업으로 많은 군인이 법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던 때였다. 나도 내 사무실이있던 그 명동의 거리처럼 당시에는 여유를 전혀 누릴 수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하기야 당시의 숙군 작업이라는 것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작업이었고, 게다가 나는 그것을 진두지휘하는 처지에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일 올라오는 보고서를 검토하고, 조사 내용을 들춰 보면서 관계자들과 회의를 거듭했다. 정보보고서에서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을 불러 조사하는 작업은 정보국 방첩과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지만 조사할 대상자를 선별하고 조사 결과를 검토해 법의 심판대에 올려 보내는 마지막 과정은 내가 맡아서 처리해야했다. 영등포의 창고중대는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로 넘쳐났다. 내가 머물고 있던 서울 영동포의 옛 증권 거래소 지하 보호실에도 중요 혐의자들이 꽉 들어차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안일 당시 방첩과장은 그런 일의 흐름 중 가장 가운데 서 있었던 사람이었다. 1949년초 매우 추웠던 어느 날 김안일 과장이 찾아와 “국장님 박 소령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비록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형이 확정 됐지만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선처해 줄 수 없겠습니까.” 나는 잠자코 김 과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 과장은 “혐의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박 소령은 군 내부의 좌익의 색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자신도 남로당에 가입한 점을 무척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한번 살려 줄 수 없겠습니까.”  그는 남로당 군사 분야의 중요한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아 내가 있던 명동의 옛 증권 거래소 건물의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었다.

그는 이미 그 혐의가 밝혀져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뒤였다. 박 소령은 곧 수색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집행은 약 10일 뒤로 대강 정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남로당 군사책으로 혐의가 밝혀져 사형이 확정된 박 소령을 살리는 작업, 대한민국이 막 출범해 사법체계가 모두 갖춰진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중대한 판결을 받았던 박 소령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저 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기생인 김안일 과장의 표정이 매우 간절했다. 나와 격렬했던 전쟁터에서 함께했던 김점곤 예비역 소장도 박 소령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키는 내가 쥐고 있었다. 숙군작업의 총책임자로서 나를 거치지 않으면 박 소령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안일 과장은 그 때문에 퇴근 무렵에 나를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김안일 과장은 “박정희 소장이 마지막으로 국장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고 간청 했습니다 꼭 만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대로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모든 증거가 나와 사형이 확정 됐지만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한민국 군대에 파고든 남로당 조직들을 검거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한번 박 소령을 만나봅시다”

김안일 소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조금 있으려니 사무실 문이 열렸다. 김안일 소령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 과묵한 표정은 그 전해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 갔을 때 만났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김안일 과장은 아무 말 없이 내게 손짓으로 박 소령을 가리켰다.

그는 군복 차림이었다.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우선 그 의자에 앉으시오”라고 권했다. 머뭇거리던 박 소령이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박 소령이 김안일 과장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던 터라, 그가 스스로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죽음의 길로 내몰린 이제 10여일이 지나면 수색의 처형장으로 끌려갈 박 소령이 먼저 입을 열어야했다. 그러나 박 소령은 말이 없었다.  10여초 흐른 것 같다.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릴지 모를 운명에 놓인 박 소령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시간으로는 꽤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듯하더니 박 소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아무런 수식이 없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도는듯했다. 그의 모습이 의연하기도 했지만 처연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줄 곳 지켜보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를 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좌익은 발호했고, 제주 폭동에 이어 여수와 순천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벌어졌던 때였다. 군대 내부의 좌익을 척결하는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려있는 중차대한 작업이었다.

숙군을 지휘하고 있는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살려 주는 일에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 설수 있는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미 군사 고문단, 나아가 일반시민 모두 이 작업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나는 그와 약속을 했고, 박 소령은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이제 그만 가도 좋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를 살리는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사실 박정희 소령이 사형을 면할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는 좌익의 발호를 부추겼던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가 분명하게 밝혀진 상태였지만, 실제 행동은 없었다. 김안일 방첩과장과 김창용 1연대 정보주임이 주도한 조사과정에서 이는 상세하게 들어났다.

당시 김창룡 대위가 김점곤 과장에게 박정희 소령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고한 내용을 보면 박정희 소령은 군에 입문한 뒤 남로당 군사부문의 책임자였던 이재복에 의해 포섭당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좌익이 일으켰던 10월의 대구 폭동을 이끌었다가 죽은 박 소령의 형 박상희 또한 이미 좌익에 깊이 몸을 들여 놓은 상태였다.

김점곤 과장이 47년 춘천 8연대에 근무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당시 8연대 독립중대 중대장, 박정희 소령은 그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김 중대장에게 박정희 소대장은 여러 차례 신세를 졌다. 술을 자주 얻어 마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하루, 박정희는 “오늘은 내가 술 한 잔 내겠다”고 제의 했다. 박정희는 이어 “산판(벌목업)을 해 돈을 많이 번 삼촌이 있는데 춘천에 온 김에 저녁을 모시겠다고 한다”고 했다는 것, 그날 저녁에 나타난 사람이 남로당 군사 부문 최고 책임자였던 이재복이 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담비 목도리에 최첨단 유행의 비싼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이재복은 김 중대장과 박정희, 뒤 늦게 연락을 받았던 연대장 원용덕 대령과 함께 술자리를 벌였다.

원 대령은 술 몇 잔이 돌아 취기가 오르자 갑자기 호통을 쳤다고 했다. “야, 정희야 너 상놈이구나.” 박정희는 그때 정색을 하고 대답을 했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결코 상놈이 아닙니다.” 이 말에 원 대령이 “그런데 (이재복이) 삼촌이라면서 왜 성이 다르냐”라고 캐묻자, 당황한 박정희가 “외삼촌이라 그렇습니다”고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김점곤 과장은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박정희가 남로당에 포섭된 상태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나중에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이미 박정희는 이재복에 의해 깊이 남로당 조직에 들어가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남로당에서 중요한 군사책을 맡은 것은 분명하지만 정보국의 조사결과 그가 다른 군인들을 포섭하고 조직에 끌어들였던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군대 내부에서 남로당 조직 및 포섭 활동을 한 흔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 소령은 명동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는 동안 자신이 아는 군대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 줬다. 이런 점에서 박 소령의 구명은 명분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형 판결 상태에서 박정희를 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복잡한 여러 경로를 거쳐 상부로부터 형 집행정지를 허락한다는 서류를 받았다.』

박정희는 철저한 오기와 이기적 기회주의와 현실주의자였다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육군장교로 철저한 친일파였고, 해방 후에는 군에 입대해 사상적 혼선으로 남로당원이었다는 의심을 받았고, 군에서는 하극상으로 군법을 짓밟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늘 초헌법적인 독재정치를 하면서 급기야는 자신이 주도해 만든 헌법도 무시하고 3선개헌을 하고, 또 2년 만에 영구집권의 길을 튼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그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유신헌법조차도 개정하려고 했다니 박정희는 민족관도 국가관도 없으면서 오직 총칼의 힘을 내세워 국민을 억압하고, 부당한 돈을 갈취해 그 썩은 돈으로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부정부패와 불법, 무법, 위헌적인 헌법파괴 행위도 불사한 철저한 오기와 기회주의적 현실주의자였다.

박정희는 반공에 투철하지도 않았고, 자유민주주의와는 더욱 거리가 멀었고, 군대에서는 오히려 김일성이가 쿠데타 후 전 남로당원이 정권을 잡았다고 화태성을 파견할 만큼 사상적으로 분명치 않았다. 그런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을 국시로 한다고 해놓고, 그중에는 물론 공산주의자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군사반란을 반대한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무리한 처단을 했다.

요즈음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하면서 재판관들이 오히려 전 피고인들에게 재판 석상에서 사과를 하는 참으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국가적으로 망신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굳이 박정희를 평한다면 그의 가치관은 그가 왜정 때 성심껏 배워온 일본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출세주의라고나 할까? 제국주의도 못되면서 말이다.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위헌이었다

박정희는 32년 전에 독재와 부도덕 그리고 부정부패와 밀실정치의 산실이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투명한 선진 민주정치를 하기 위하여 당장 헐어버리라고 명령하여 부셔져 없어진 궁정동 12체의 안가들 중 한방에서 술파티를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세발의 총탄을 맞고 비참하게 죽었다.

왜, 그랬을까. 육군 소장 박정희는 그가 죽기 18년 전에 이미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정권욕에 불타, 호시탐탐 무력에 의한 군사반란의 기회를 엿보고 군대 내에서 비밀결사 등 반란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국민 모두의 소망과 기대를 등에 업고 출범한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먼저 경제를 일으켜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고 주창하며 정계와 재계가 합심한 경제제일주의 및 수출제일주의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여 확실하게 추진해 나가기 위하여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성심을 다해서 만들어 놓고 곧 시행에 들어가기로 하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19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와 영웅심에 불타는 청년장교들이 나라에서 지급한 탱크와 총칼을 거꾸로 잡고 지켜야할 진지를 이탈하여 강도가 하는 것처럼 반란을 일으켰다. 박정희의 시작은 명분 없는 반란이요 배반이었다. 반란과 배반으로 탈취한 정권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국민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박정희는 늘 불안했으며 그래서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그가 시작할 때의 방식인 총칼에 의한 강압 처방인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 계엄령, 유신이었고 돈을 뿌려 선심을 사야 한다는 유혹 때문에 부당한 돈 마련을 위해 부패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과 배반의 시작은 그의 일생을 부정부패로 살게 했고 그의 죽음 또한 무법 불법으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5·16의 무법 불법은 박정희의 통치기간 내내 위헌 불법이 판을 쳤고 통치 기간 동안 그가 누린 영광은 10·26의 세발 총탄으로 비참하게 끝났다. 박정희가 간지 32년이 지나면서 대법원 재심에서 그의 강권통치방식인 긴급조치가 위헌으로 판시되고 있다. 아마도 박정희의 18년을 헌법과 법률에 조목조목 비춰보면 5.16의 반란부터 시작해서 거의 대부분이 위헌이나 위법으로 판시되어 무효로 판결이 날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도 있으나 그 이론은 전제국가나 끼리끼리 승계하는 독재국가에서나 통용되는 이론이고 민주국가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박정희의 5?16 반란과 그의 통치기간에 저질러진 위헌 위법을 가려 올바른 역사로 되돌리고 잘못 알려진 박정희의 오도된 정치 전반을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도록 바로 잡아야 한다고 제언한다.

유신의 끝은 어디였을까?

북한의 김영남 등 지도급의 원로들이 위계질서가 일을 하고 조직을 움직이는 군대에서 단 하루의 군대경험도 없는 손자 같은 27세의 김정은을 김정일 다음인 정치서열 2위로 떠받들고 복종하는 것을 즐거워서 하겠는가.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등 독재정권이 수십 년씩 장기집권을 하고, 북한은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을 거쳐 김정은의 3대 세습에 들어갔다. 이들 독재 정권은 하나같이 집권 과정은 물론, 집권기간 내내 무력에 의한 '힘의 정치'를 하고 있고, 부당한 정권유지를 위하여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고 언론을 말살하며 부정부패가 판을 친다.

21세기에 이들 세계는 투명한 민주정치가 아니면 누구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독재국가들은 그동안 저지른 인권 탄압과 부정부패를 감당할 수 없어 어떤 꾀를 써도 그 죄를 벗고 세계가 요구하는 투명한 새로운 질서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안전하게 갈아탈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은 모두 죽거나 감옥으로 갈수 밖에 없다.

그동안 부당하게 누리고 살아온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궁여지책으로 현실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고, 권력을 비슷한 수준에서 수평적인 이전을 하면 자존심도 살리고 좋긴 하지만, 차선으로 수직적인 권력 이전을 함으로써 확실한 지금의 현실을 유지하는 것을 그들은 선택했다. '독재=부정부패=권력세습'의 등식은 거의 대부분의 독재국가가 간직한 필연적인 운명인 것 같다.

유신정치로 영구집권을 꿈꾸던 박정희 일당(하나회 등)의 운명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선진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국민적 자각과 민주화를 위하여 앞장선 김영삼과 야당정치 지도자들이 있어서 박정희의 오만 방자한 독재를 가로 막았기 때문에 10·26으로 끝이 난 것이다.

10·26 없이 박정희 정권이 계속 갔더라면 철학적 사명감이 전혀 없이 권력만능의 영웅심으로 가득 찼던 박정희와 하나회 그리고 외견상 그럴듯하게 보이면서도 누리고 사는 것을 즐기면서 자기는 고귀한척, 아닌 척, 소극적으로 할 수 없이 따라가는 척하는, 소신 없는 박정희의 주변 인물들의 마지막 선택은 자신의 오늘을 지키기 위해서 북한 등 독재국가들처럼 박정희의 수직적 권력세습까지 가자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박정희를 비롯한 그들은 '나만 잘 살면 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10·26은 이런 불행을 사전에 막은 사건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석규 2012-09-10 11:39:11
우리나라는 일본통치시대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이 많았고 해방후에는 이북 공산당의 남한내 남로당이 득세하여 6.25동란 전에도 대구폭동, 여순반란사건, 제주 4.3폭동등 끊임없는 사건이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위태롭게하는 종북은 단호히 대처하여야 하며, 단, 북한동포를 사랑하고 남한의 좌익도 인권은 존중하되 국기를 물란하게 하는 자는 단호히 엄벌에 처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