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나이가 들어가니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고 그들과의 추억이 그리워진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은 예고도 없이 찾아가도 나를 편안하게 맞아주고, 삶이 고달파 위로라도 받고 싶을 때는 언제든 내게 너른 품을 내어주는 것들이었다. 고향처럼, 어머니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리움은 늘 아련함이고 신산함이고, 생각만 해도 온기를 느끼는 따뜻함일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산을 타고 있는 산 친구들이 지리산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서로 일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지난 주말 당일치기라도 다녀오자며 전남 구례로 향하는 밤차를 탔다. 그리고 성삼재에 도착해 지리산 노고단으로 향하며 그리웠던 지리산의 너른 품속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노고단(1507m)에서 천왕봉(1915m)까지 이어지는 25.5km 규모 주 능선은 산을 타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주 산행 코스다. 우리는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만 가기로 했다. 다시 오후에 서울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노고단은 천왕봉과 반야봉(1734m)과 함께 지리산 3대 봉우리 중 하나일 정도로 높은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보는 일출과 운해는 지리산을 대표하는 절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성삼재(1102m)까지 차가 오를 수 있어 성삼재 휴게소에서 노고단까지 넉넉잡아 1시간이면 편안한 임도를 걸어 산책하듯 오를 수 있다.
노고단에서 시작하는 길은 편안하다. 종주에 나서려면 동이 트기 훨씬 전에 이 길로 들어서야 한다. 예전에는 잠도 못 자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들어서던 길인데, 이날만큼은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돼지령이 나오고, 이어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면 임걸령(1432m)이 나온다. 이곳에는 지리산에서 물량도 가장 많고 맛도 좋은 샘물이 있다. 지리산은 그래서 물을 많이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여기저기에 샘물과 대피소가 있어 산행하다가 식수를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원하고 맛좋은 지리산의 물맛을 보고 다시 사부작사부작 부드럽게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었다. 그리고 노루들도 숨을 고르고 간다는 노루목에 도착했다.
반야봉은 종주 길이 이어지는 노루목에서 1km를 벗어나 있다. 새벽부터 종주를 시작해 본 사람이라면 보통은 '천왕봉 21km'라고 쓰인 이정표를 보고는 갈 길이 멀다며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는 반야봉을 지나치곤 한다. 하지만 이날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은 꽤 경사가 심하지만, 위험한 곳은 계단이 설치돼 있어서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하게 반야봉 정상에 닿을 수 있다.
반야봉은 주봉인 천왕봉에 이어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그곳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까지 웅장하고 부드럽게 펼쳐진 능선의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날 비록 그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아련하게 이어지는 지리산의 너른 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반야봉 한쪽에 있는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고 푸짐하게 준비해간 음식을 꺼내어 식사를 했다.
반야봉에서 다시 노고단으로 돌아가자니 너무도 아쉬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만 더 걷자고 말했다. 그리고 반야봉을 내려와 다시 주 능선길을 만나 삼도봉으로 향했다.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3개 도가 만나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전에는 '날나리봉'으로 불렸다. 포근하고 정겨운 지리산의 봉우리 이름으로는 날나리봉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은 나뿐일까?
산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의 침묵 때문은 아닐까? 산은 무엇을 강요하거나 종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속도를 내는 곳이 아니라 늦추는 곳이다. 숲길이 깊어지고 전망이 높아질수록 산의 침묵은 더욱 선명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나에게 자유를 주기도 했고 삶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반야봉에서 홀로 사진을 찍고 있던 젊은 처자를 만났다. 서른을 갓 넘은 그는 포항에서 노고단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1시에 출발해 차를 몰고 지리산으로 왔다고 했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완등을 목표로 매주 그렇게 전국에 있는 산을 홀로 다닌다고 했다. 우리와 함께 식사하자고 했더니 낯가림도 없이 자리를 잡더니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새벽길을 홀로 달려와 노고단에서 일출을 기다리다 산길을 걸었으니 몸도 지치고 배도 고팠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 홀로 산을 타는 이유를 물었다. 그저 혼자가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깊은 산의 선명한 침묵을 이미 경험한 듯했다.
삼도봉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우리는 다시 노고단으로 돌아갔다.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미련을 그리웠던 지리산에 남겨두고 우리는 노고단을 지나 성삼재를 내려와야 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