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총재 댁이 어찌 이렇게 쓸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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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총재 댁이 어찌 이렇게 쓸쓸할 수 있는가’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11.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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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영삼 총재 댁 방문과 새로운 인연의 시작

#1. 그날도 우연히 상도동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헌병들이 집을 에워싸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연금을 하다가 막 연금을 해제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낙선자로서 우울하기도 해서 김영삼 총재님께 위로의 말씀이라도 드려야겠다고 총재님 댁을 방문했다.

신민당총재 시절엔 그렇게도 방문객이 많아 미리 약속을 하고 가거나 아주 일찍 가도 보통 때는 독대는커녕 눈도장도 찍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날은 응접실에 대기하는 이도 하나 없이 총재님 혼자였고, 혼자 시중들던 장학노 씨가 나를 반겨 만나주었다.
 
김영삼 총재는 내가 왔다는 말에 곧바로 나오셔서 작선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서로 위로의 말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시국 걱정을 했고, 목장을 시작했다는 나의 말에 꼭 성공하여 구경시켜달라는 말씀도 하시며 나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내 손을 잡고 종종 들러달라는 부탁까지 하는 총재님과 헤어져 나오면서 나는 세상인심의 각박함을 새삼 느꼈다.

‘김영삼 총재 댁이 어떻게 이렇게 쓸쓸할 수 있는가!’
너무도 서글펐다. 나는 김영삼 계보도 아니고 또 이제 정치를 그만 두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나라도 총재님을 종종 찾아 위로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목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얼마를 지나 또 상도동을 지나게 되어 찾아뵈었더니 그날 역시 혼자 계시다가 반갑게 맞으시며 목장사업에 대한 말을 하시고 찾아와준 것을 고마워했다.

“지난번 노 국장이 다녀간 날, 내가 노 국장에게 주려고 글을 하나 썼어요.”
총재님은 ‘민주광복(民主光復)’ 이라고 쓴 글에 노병구 동지에게 준다고 넣어서 내게 주셨다. 그러면서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요새 몇 사람이 등산을 하기 시작했는데 노 국장도 시간을 내서 참가했으면 어떻겠어요? 건강도 좋아지고 공기도 좋으니 같이 등산을 해봅시다.”

나는 곧장 표구를 해서 그 글을 약국 안에 걸었다. 약국에 오는 사람마다 그 족자를 관심있게 들여다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대단히 좋은 글을 걸었는데, 이게 진짜 김영삼 씨의 글이 맞느냐” 저것을 약국에 걸어놓아도 괜찮으냐? 혹시 저것 때문에 약국운영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좋은 게 좋지,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겁 없이 저런 족자를 걸어놓느냐?” 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집에 가보가 생겼네. 밤에 저거 훔치러 도독이 들지도 모르니 여기다 걸어 놓지 말고 집 안방에다 걸어놓으시오.”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돈을 줄 테니 저 글씨 하나 얻어주시오.” 하며 겁도 주고, 용기도 주고, 부러워하기도 하는 등 가지각색의 반응이 따랐다.

그러나 경옥과 나는 일관되게 ‘민주광복’은 우리 독집운동 선열들의 한결같은 요구요 우리 민족이 바라는 이 땅에서의 염원이라고 굳게 믿고 자랑스럽게 그 족자를 걸어놓았다. 가끔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약국에 들러 경옥과 나와 그 족자를 유심히 보고 가기도 했다.

웃기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바람이요, 선지세계가 함께 추구하며, 평등하게 인간답게 오순도순 즐겁고 평화롭게 누르는 이 없고 눌리는 이 없는 ‘민주광복’.
 
36년 동안 주권을 빼앗기고 동물처럼 억눌려 살면서 목숨 바쳐 싸워 찾은 이유로, 정당한 절차를 무시한 반민주적 무력에 의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무자비하게 정권욕을 충족시키는 그들이 무서워 자랑스러운 족자를 거는데도 이유와 구실이 붙으니 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나는 도봉산행에 참가해 가장 뒤에 처져서 헐떡거리며 산에 올랐다. 매주 목요일 10시에 모여 산행을 하는데, 내가 나갔을 때는 약 20여 명이 참가하고 있었다. 산에 오르면 김영삼 총재가 직접 기도를 하자고 해 나라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김영삼 총재와 이민우 회장, 김동영·최형우 두 부회장과 문부식, 김덕룡, 최기선, 홍인길, 이계봉, 박희부, 정채권 목사 등의 얼굴이 보였다. 그 외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모두 합쳐 20여명 정도가 산에 올라 애국가합창과 기도, 묵념, 김 총재의 말씀, 최장인사가 끝나면 산이 떠나가라고 목청껏 ‘야호’ 삼창을 했다.

각자 조그만 버너를 가지고 와서 코펠에 밥을 짓고 김치, 양파, 호박과 고추장, 된장 등을 섞어 돼지고기를 넣고 끓이면 맛있는 찌개가 되었다. 참으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며 언론이 취급하지 않는 각종 국내외 뉴스들을 서로 아는 대로 전하면, 김영삼 총재는 회원들이 식사하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안부도 묻고, 격려도 하고, 또 농담도 하며 우애를 다졌다.
 
또 어떤 때는 정채권 목사가 앞장서서 선도하고 가끔 기도도 총재 대신 자신이 하며 실제로 산행대장 노릇을 했다.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산행을 했다. 나는 종종 거를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정채권 목사가 다음 산행 때 기도를 부탁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나라와 민족, 민주회복과 김영삼 총재의 자유로운 정치복귀, 참가한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하나님께 빌었다.
 
김영삼·이민우·김의택 3자회동 주선하다
 
#2. 1982년 초봄의 어느 날, 나는 당시 종로예식장 앞에 있던 한식집 ‘경향(京鄕)’에 내 이름으로 예약을 했고, 김영삼·이민우·김의택 세 분이 이 자리에서 만났다. 나도 그냥 동석하라고 말씀하셔서 동석을 했는데, 서로 문안과 위로의 말을 나누고, 김 총재님의 붓글씨 쓰는 이야기를 잠시 나눈 뒤 자연스레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을 화제에 올리고 개탄하며 새로운 시국선언 문제까지 이야기하다가 이렇다 할 방안이나 합의는 내지 못하고 언젠가 또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다.

세 분이 가시는 것을 보고 인사동 골목으로 나오는데, 언제 알았는지 정보부 서울 분실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보자고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오늘의 회동은 누가 주선했느냐, 셋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무슨 일을 하기로 했느냐, 또 언제 만나느냐” 등 따지듯이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담담하게 답해주었다.
“오늘 만남은 별것이 아니오. 내가 김의택 총재께 건의해서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김영삼 총재와 이민우 회장님을 모시고 무료함을 달래고 위로하는 차원의 순수한 오찬자리를 만든 것일 뿐이오. 서로 붓글씨 이야기를 하고 시국을 걱정하는 차원에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당신들이 신경 쓸 만한 일은 결코 없었소.”

그러는 가운데 민주산악회의 산행은 계속되었고, 참가인원도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정보부와 경찰은 각 지역에서 산행을 방해했다. 한 번 산행에 수백 명씩 참가하게 되니 국내 언론은 민주산악회에 관한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외국 언론들이 이 기이한 산악회 소식을 조금씩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헨리 스토크 <뉴욕타임스> 동경지국장이 구기동에서 출발해 대남문을 거쳐 우이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산행에 직접 동참해서 직접 산에서의 동정을 취재해 ‘정치활동이 금지된 한국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1982년 4월 16일자 <뉴욕타임스>에 미주산악회를 대서특필했다.

이 기사로 민주산악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산악회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정치인들을 정치규제법으로 묶어놓고 여당과 야당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간교하고 폭력적인 정치를 일삼던 전두환은 자연발생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으로 궁지에 몰리자 1982년 5월 31일자로 김영삼 총재를 다시 연금시켰다.

이 2차 연금의 구실은 정치활동규제법을 위반하고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정치적인 회견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2차 연금을 당하게 된 데는 앞서 말한 김영삼·이민우·김의택 세 분의 비밀만남도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전두환은 폭력으로 권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김영삼 총재를 두려워했고, 김영삼 총재의 움직임이 전두환에게는 늘 바늘방석이 되었다. 김영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전두환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그러다 보니 연금이라는 치졸한 방법으로 김영삼 총재를 억압하며 스스로 쫓기는 정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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