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이 '절대 정의'였던 문학가
스크롤 이동 상태바
순수함이 '절대 정의'였던 문학가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2.10 1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순원 문학의 본질은?
지난 2000년 한국문단은 거장을 잃었다. 황순원이다. 황순원의 부음을 접하고 문화계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애도를 표했다. 각 정당의 대변인들이 ‘어울리지 않게’ “황순원 선생님의 작품이 있어 행복했다”는 등의 매우 감상적인 논평을 발표했다.

문화, 예술계의 거물이 세상을 떠나면 신문 한 켠에 부음 기사가 나긴 해도 정치권에서 논평을 내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황순원이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예시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 서재에 선 생전의 황순원 작가.     © 뉴시스

 
최근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황순원에 대한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김 교수는 황순원 문학 연구를 위해 황순원 전집(문학과 지성사)을 여러 번 읽었다고 밝히며 “단순히 좋은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훌륭한 작가’로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장편 “‘신들의 주사위’와 ‘움직이는 성’은 대가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김 교수는 국내 문학평론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로 이전에는 염상섭과 이기영(장편 ‘고향’의 작가로 해방 후 월북)을 문단 최고 작가로 꼽았다. 황순원을 훌륭한 작가로 표현한 것이 그가 최고라고 했던 염상섭, 이기영과 같은 수순으로 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기자가 황순원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김 교수의 황순원 평을 접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김 교수가 대가의 경지라고 극찬한 ‘신들의 주사위’와 ‘움직이는 성’ 그리고 ‘카인의 후예’, ‘일월’, ‘나무들 비탈에 서다’, ‘별과 같이 살다’ 등 그의 다른 장편들을 차례로 읽었다.
 
해방, 한국전쟁 등 격동기에도 굳건히 자기 자리 지켜

작품을 읽으면서 황순원의 인간됨을 알게 하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도 직간접으로 들을 수 있었다. 한국문단에 황순원이라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2000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황순원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모두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나온 작가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며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 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10대에 이미 공식적인 지면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였으며 일제시대 지식인이었다. ‘그 시절엔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 합리화되는 이름 깨나 있는 작가들의 친일행각에 동참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친일도 하지 않았지만 반일에 나서지도 않았다. 일제 말기 우리말 말살정책으로 한글로 된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어지자 여러 단편들을 탈고만 해 놓고 발표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공개된 단편 ‘황노인’이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황순원과 동시대 작가로 일본어로 된 작품을 남기지 않은 이는 황순원이 유일하다는 말도 있다.

고향에서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이한 황순원은 이듬해 월남을 단행한다. 토지개혁의 광풍이 몰아치던 이북에서 지주계급으로 신분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이 있었던 것도 같다.
 
장편 ‘카인의 후예’는 토지개혁을 둘러싼 해방 직후의 북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인데 황순원이 월남하기 전 몸소 체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 경기도 양평에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이 올해 문을 열었다.     © 시사오늘 박지순

 
관직, 훈장, 명예교수 직함 모두 거부

월남한 1946년 서울중고등학교 교사가 된 황순원은 좌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꾸준히 순수문학을 견지한다. 국민 필독서인 ‘학’, ‘소나기’가 발표된 시기도 이 때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5년간은 좌우의 극한 대립기로 문인들을 비롯한 예술계 인사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표방하는 단체를 만들기 마련이었다. 황순원은 어떤 이념 단체에도 적을 두었다는 기록이 없다.

황순원과 동갑으로 같은 해 세상을 떠난 ‘시의 정부’ 서정주는 해방 후 초대 내각에서 문교부의 관리를 잠시 맡은 적이 있다. 황순원은 서정주와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데 “문인이 관직 제의를 받는 것은 처신을 잘못 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황순원이 갖고 있던 직함은 서울중고 교사를 거쳐 경희대 교수, 예술원 회원, 문예지 추천위원, 여러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위원 등 순수 학문이나 문예와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심지어는 국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거부하며 “노벨상도 수상자가 받기를 원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다. 나는 훈장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사학위 없이 경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는 학교 측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지만 “소설가는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역시 거부했다.

황순원이 어느 정도 작가로서 철저했는지는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알 수 있다. 경기도 양평 황순원 문학촌 전시실에 가면 수없이 고쳐 쓴 원고지를 볼 수 있다. 교정은 후학들에게 맡겨도 될 법한데 손수 교정까지 본다는 원칙은 최후까지 지켰다.
 
소설과 시 외에 일체의 잡문 거절

황순원은 시와 소설 이외에 어떠한 ‘잡문’도 쓰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후배 문인들이나 제자들 작품집에 추천사나 발문을 써줄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신문 연재소설 제의도 모두 거절했다. 소설가는 소설가로 충분하듯이 소설가는 소설만을 써야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던 듯싶다.

아들이며 한국 문단의 대표적 시인이기도 한 황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황순원을 가장 정확히 그리고 있다. 황 교수가 대학생 시절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들어와 잠이 들었다가 목이 말라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는 아버지가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황 교수는 새벽녘 아버지의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황 교수는 그 때도 대학생이었다. 도둑이 심하게 휑휑하던 시절이라 황 교수가 처음으로 맞춰 입은 양복과 그의 보물1호였던 ‘제니스 라디오’를 도둑맞았다.
 
그런 후 어느 날 1층에서 자고 있던 황 교수는 잠결에도 도둑의 인기척을 듣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도둑에게 달려들었다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겁이 나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2층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가 고함을 치며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달려 나오자 도둑은 황급히 도망갔다. 도둑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아버지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자는 황 교수가 2008년 ‘대산문화’에 기고한 ‘아버지’라는 에세이에서 이 일화를 접하고 황순원의 인간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언제나 진지하고 온화한 인상을 지녔던 아버지이며 스승이었지만 불의에는 타협을 거부하는 강직함이 엿보였다. ‘카인의 후예’에 등장하는 오작녀와 주인공 박훈의 시대 저항적 캐릭터는 황순원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특정 인물들을 놓고 ‘친일이다 아니다’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꼭 일제 때만이 아니라 해방 후에도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정권에 잘 보이고 그럴싸한 자리를 얻으려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는 예는 수없이 많다.

과연 황순원처럼 ‘소설가는 소설가로 충분하다’는 원칙을 초지일관 지키며 ‘순수’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 우리 역사에 얼마나 있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