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고향과도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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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고향과도 같은 곳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2.10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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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을 다녀와서
기자가 경기도 양평군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을 찾은 것은 지난 19일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였다. 때 아니게 찾아온 추위가 수그러들지 않아 찬 바람이 꽤나 불었다. 날씨도 춥고 평일이기도 해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관람객이 적었다. 한 장애인 단체에서 관람을 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4명의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학창시절 친구들 같았다. 얼굴 표정이 모두 소풍날 어린아이 같이 약간 상기돼 있었다. 10대, 20대를 문학소녀로 보냈을 것이다.

기자와 같은 세대가 아니어서 그 중년의 여성들이 학교를 다니며 황순원의 어떤 작품들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은 소설 '소나기'의 배경인 양평군에 세워졌다.     © 시사오늘 박지순

 
기자는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에 ‘소나기’를 배웠고 고등학교 때는 ‘문학’이라는 교과가 따로 있어서 ‘별’, ‘학’, ‘독짓는 늙은이’, ‘목넘이 마을의 개’ 등 황순원의 대표 단편들은 대부분 읽어야 했다. ‘의무’에서 읽기 시작한 그의 단편들은 나중에는 찾아 읽게 되는 흡입력이 강한 작품들이었다.

소나기마을의 유래가 된 황순원의 정갈하고 절제된 문체의 대표작 ‘소나기’는 1952년 10월에 탈고된 작품으로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면서(1학년 교과서에 실린 시절도 있다.) 전 국민에게 순수하고 아련한 감동을 선사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토론과 논술 교육이 중시되다보니 초등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여겨진다.

황순원 문학에서 ‘소나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얘기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황순원=소나기’ 식으로 황순원 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소나기’만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해방 이후 발표된 여러 편의 장편을 빼놓고는 그의 문학을 논할 수 없어 ‘소나기’는 황순원 문학 전체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학적 평가는 차치하고 한글을 국어로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소나기’를 통해서 작가 황순원의 이름을 알게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황순원 문학촌의 이름이 ‘소나기마을’이 된 것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소설 ‘소나기’의 배경에 세워져

‘소나기마을’은 경기도 양평군에 있다. 서울에서 운전해서 40~50분 정도 거리다. ‘소나기마을’이 왜 양평에 있게 됐을까 의문이 들었다. ‘소나기’를 다시 읽는 계기였다. 소설의 말미에 ‘소나기’의 장소적 배경이 양평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 소나기마을에는 '소나기'에서 소년이 소녀를 업고 건너던 개울이 재현돼 있다.     © 시사오늘 박지순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46년 5월 이북에서 월남했다. 월남한 후로는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로 1955년까지 일했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1957년 취임해 26년 넘게 재직하다 정년퇴임했다.

줄곧 서울에서만 살았던 황순원이 어떻게 양평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썼는지 의문이 든다. 황순원은 작품을 쓸 때 현지 답사를 하지 않고는 단 한 줄도 집필하지 않은 작가였다.
 
어느 작품에선가는 길이 갈라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두세 줄을 쓰기 위해 몇 시간을 들여 현장을 확인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사실에 놀라워하는 문단의 후배에게 “내가 재주가 없어”라고 말했다는 황순원이다.
 
수숫단, 원두막, 개울 등 재현

‘소나기’에 나오는 개울과 호두나무, 수숫단, 기둥이 기운 원두막은 황순원이 머리로 상상한 사물들은 아닐 것이다. 모두 1950년대 초 양평 어딘가에 실재했던 정경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작품으로 형상화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소나기마을’에 들어서서 첫 눈에 들어오는 원두막과 수숫단, 개울이 그저 눈요기를 위한 장식으로만은 보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원두막도 하나고 개울도 하나인데 수숫단은 여럿이라는 점이다. 열 개는 될 듯했다.

‘소나기’에서 가장 마음 따뜻해지는 부분이 바로 소년과 소녀가 수숫단에서 비를 피하는 장면이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려 기울어진 원두막에 들어갔지만 비가 샜다.
 
소년은 소녀를 수숫단 안에서 비를 피하게 하고 자신은 밖에 서 있으려 했지만 소녀가 소년을 들어오라고 하면서 소년과 소녀가 함께 수숫단 안에서 비를 피하게 된다. 소녀는 소년의 체온으로 떨리던 몸이 누그러진다.

한국인이 쓴 문학작품 중에 수숫단이 등장하는 것이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나기’에 그려진 수숫단은 순수로의 회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참 보기가 좋다.

소녀가 “바보”라고 말하며 소년에게 던졌던 조약돌이 깔려 있는 개울은 공간상의 제약으로 축소된 모형이 되고 말아서 아쉬웠다. 개울을 건너가면 문학관이 나오는데 처음 보면 독특한 외형을 하고 있지만 수숫단을 본떴다.
 
문학관 전시실은 희귀자료 가득

전시실로 들어서면 황순원의 문학과 그의 인간됨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생전에 사진 찍기를 남달리 꺼려했던 황순원의 비공개 사진자료와 육필원고, 실물 크기로 재현된 그의 서재, 만년필과 안경 등 유품에서 순수 문학만을 고집했던 작가의 숨결과 체취를 느끼게 된다.
 
서재에서는 어떠한 가식과 미사여구도 발견할 수 없다. 글쓰기에 필요한 조그만 앉은뱅이  책상과 사전류, 장서만 있을 뿐이다.

장편 ‘신들의 주사위’ 육필원고를 보면 황순원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작가였는지가 피부에 와 닿는다. 세로로 쓰여진 원고에는 제목 ‘신들의 주사위’는 21P(포인트), 작가이름 ‘황순원’은 14P, ‘제1부’는 12P로 인쇄할 것을 기재해 놓았다. 다른 많은 원고들에는 수없이 고쳐 쓴 퇴고(推敲)의 흔적도 보인다.

경희대학교 제자인 소설가 전상국의 동영상은 ‘스승 황순원’의 인간됨을 알려준다.  전상국이 대학 2학년 때, 습작 원고를 들고 교정에서 황순원을 만나 “제가 쓴 원고입니다. 한 번 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황순원은 전상국에게 “전군, 잘 썼더군”이라며 원고를 건네줬다.

‘잘 썼더군’ 이 짤막한 스승의 말 한 마디에 너무나 기뻐 하숙방으로 뛰어가 원고를 다시 보니 황순원이 꼼꼼하게 고치고 지적한 부분이 여러 군데였다. 전상국은 “그 때 작가의 자세를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관 한 켠에는 황순원의 장편들인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신들의 주사위’, ‘움직이는 성’이 영화화됐을 때의 화면들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조금 걸어 나오면 옛 학교 교실이 보인다. 두 명이 같이 써야 했던 초록색 책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교실이다. 기자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썼던 책상이어서 어릴 적 생각이 났다.
 
황순원 ‘제2의 고향’ 소나기마을에 묻혀

문학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황순원의 묘가 있다. 실향민인 그에게 ‘소나기’의 무대인 양평이 ‘제2의 고향’이었을까? 묘비에는 황순원과 그의 아내로 일생을 내조한 양정길이 함께 묻혀 있다고 적혀 있다. 황순원은 동갑인 양정길과 21살에 결혼했고 양정길은 생존해 있다.
 
▲ 황순원은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소나기'의 무대 양평에 묻혔다.     © 시사오늘 박지순


황순원은 아내가 아침상을 차렸던 2000년 9월 14일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전날 밤까지 여느 때와 똑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가 세상 누구보다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함께 있었던 이는 아내뿐이었다. 합장을 미리 준비한 묘비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소나기’가 씌어진 1952년 양평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올 4월 개관한 ‘소나기마을’ 주변도 아름다운 전원의 모습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어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가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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