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근혜 '원칙'> ‘내 원칙은 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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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근혜 '원칙'> ‘내 원칙은 당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03.09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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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의 소중한 자산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정치인에게는 지켜야할 ‘원칙’이란 게 있다.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말로만 원칙을 내세운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얼마나 자신의 원칙을 잘 지켰을까? 그들의 정치행보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YS의 눈물의 ‘원칙’

1992년 14대 총선 민자당 공천 발표를 앞둔 어느 날.

김영삼(YS)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다.
노 대통령을 만난 YS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의령․함안(경남)의 여론조사섭니다.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홍래가 정동호를 현격히 앞서 있습니더. 공천을 다시 생각해 보소.”

14대 공천을 관장한 노 대통령은 군 장성출신이자 도로공사 사장을 역임한 현역 의원인 정동호 후보를 이미 내정한 상태였다.

조홍래 후보는 67년 유진오 총재의 비서관으로 발탁돼 8대와 10대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한 인물. 이후 민추협에 동참하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김 대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지금에 와서 바꾸려는 의도가 뭡니까. 이번만큼은 양보 할 수 없습니다.”
14대 공천을 앞두고 노 대통령과 YS는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민자당은 자신의 최대기반인 영남지역에서의 ‘싹슬이’를 목표로 ‘영남석권’에 적합하지 못한 인물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로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쪽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사이에 이견이 있어 적지 않은 진통을 겪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퇴임 후’와도 직결되는 이번 공천을 통해 최대한으로 자기사람을 심으려하고 있고, 차기 대통령 후보 지명과 관련해 자파의원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김 대표 역시 처지는 마찬가지다. 이와 맞물려 5공세력을 어느 정도 수용하느냐는 것도 논점의 하나가 돼 있다.
1992년 1월 25일 한겨레신문 7면 ‘14대 총선 공천 어떻게 돼가나’』

결국 민자당 공천은 정동호에게로 돌아갔다. 여기에 불복해 조홍래는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경남 의령․함안 선거전의 최대 초점은 YS의 의중이었다. YS가 누구 손을 들어줄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만약 YS가 무관심으로 일관 만해도 조홍래가 당선될 판이었다. 조 후보는 선거구에 YS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걸어놓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선거전이 시작되자 YS는 당시 영남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유성환 의원을 상도동으로 불렀다.

“니 마음은 알제. 하지만 내가 민자당을 떠나지 않는 한 정동호 당선을 위해 뛰어야 되는 기 맞제. 그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지. 니, 함안으로 내려가 정동호 지원유세를 해야 안 되겠나.”

유성환 의원의 회고.

“총재가 함안으로 내려가 정 장군(정동호)을 지원하라고 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조홍래는 시간 날 때마다 바둑도 두고 하는 친구인데, 정동호를 지원유세 하라는데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안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나 못하겠다’고 하고서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유 의원이 지원유세를 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는 보고를 받은 YS는 전화 다이얼을 거제로 돌렸다. 자신의 아버지인 김홍조에게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아버님, 함안에 내려 가셔야 되겠습니더. 정 후보 지원 좀 해주셔야 겠습니더.”

지원유세에 나섰던 YS 부친인 김홍조 옹도 소극적이었다.

다급해진 건 정동호 후보 측이었다. 정 후보는 상도동으로 ‘SOS'를 쳤다.

“좀 도와주세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가는 선거전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YS는 거제에 출마 중인 김봉조를 급히 찾았다.

“니, 함안 좀 내려가야 되겠다. 정 후보 지원 좀 하그래이.”
“총재님, 조 후보가 당선되면 어차피 민자당에 입당할 겁니다. 차기 대선을 위해서도 정 후보보다는 조 후보의 당선이 유리한 것 아닙니까?”

“내가 정치를 몇 년했노. 내가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유불리 이전에 원칙이란 게 있다. 내가 민자당에 있는 한 내는 정 후보 당선을 위해 뛰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결국 김봉조는 함안으로 내려가 정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 상도동 가신 1세대인 김봉조의 지원을 받은 정 후보가 14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 김영삼은 일생동안 정당정치와 의회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정치를 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많다. ⓒ시사오늘

YS와 노무현의 시각차

이뿐 아니었다. YS는 부산 동구에 출마한 5공 핵심 세력인 허삼수 후보 지원유세에 나서, 그가 당선되는데 일조를 했다.

당시 이 지역에 출마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YS를 이렇게 비난했다.

『4년 전 ‘반란군 총잡이’로 규정하고 “국회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김영삼 민자당 총재는 지원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뽑아주시면 소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시려면 허삼수 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십시오.” 뽕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다. 나는 김영삼 총재를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자리를 잃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P123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난이 꼭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YS는 집권 후 하나회를 숙청하며 문민정부가 뿌리내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런 결과를 잘 알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이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다는 건 ‘원칙’의 차이일 것이다.

결국 ‘시각’의 차이이고 ‘그릇’의 차이라고 본다.

박근혜의 원칙은 당권?

2008년 18대 한나라당 공천을 놓고 박근혜 전 대표는 ‘공천학살’이란 용어를 써가며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표, 자신은 한나라당 내에서 공천도 받고 당선도 됐다.

그 후 박 전 대표는 ‘원칙’이란 말로 세종시 문제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이명박 정부에 ‘태클’을 걸었다. 박 전 대표가 진정한 원칙주의자라면, 그가 ‘공천학살’이라고 말하는 18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는 한나라당에 남고, 소위 자파계열의 후보들은 ‘살아서 돌아오라’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한마디로 정당정치의 붕괴다. 이게 소위 말하는 ‘박근혜 원칙’인 셈이다. 결국 박 전 대표가 이명박 정부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건 ‘원칙’이 아니라 ‘당권’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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