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산악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여기를 나갈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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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산악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여기를 나갈 수 있소”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12.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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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두환의 하야를 요구한 김의택 총재의 기자회견

김영삼·김의택·이민우 세분의 회동 후, 김영삼 총재는 다시 2차 연금으로 창살 없는 감옥의 고통을 겪게 되었고, 이민우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김영삼 총재가 참가하지 못하는 민주산악회를 추스르고 전국 산하를 누볐다.
 
김의택 민권당 총재는 비록 독재자 전두환의 사슬에 결려 그들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고 값없이 희생양이 되었지만 어떻게든 제도권 안에 머무르고 있는 정당의 총재로서 망국으로 치닫는 전두환 일파의 권력형 부패를 구경만 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 김의택 총재에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없다.
“나 김의택이오. 노 위원장, 지금 곧 성북동 우리 집으로 오시오. 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되도록 빨리 오시오.”
그래서 곧바로 김의택 총재 댁을 방문했다. 건강이 안 좋아 수척한 얼굴로 김 총재께서 입을 열었다.

“노 위원장, 나라가 이렇게 돼서야 어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나? 우리 당이 비록 국회의석은 두 자리밖에 없지만 이런 어려운 때에 손 놓고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김영삼 총재도 또 불법연금을 당하고, 장영자 사건은 사건만 있지 속 시원히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으니, 언제 죽을지 모를 늙은 나지만 꼭 한마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 위원장을 오라고 했어요. 내가 기자회견을 하려고 하는데 회견문을 작성해주세요.”

“총재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기자회견을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기자회견 문안작성 위원을 총재님께서 임명해주시고,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내용을 담아 전두환에게 전달해야만 합니다. 총재님, 저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문안작성 위원의 수와 누구로 할 것인지를 말씀해주십시오.”

내 말에 김 총재께서 대답하셨다.
“문안작성 위원은 노 위원장과 사무총장 최인영, 그리고 대변인 이영권 동지 세 사람이 좋겠소.”

“총재님께서 그 두 사람에게 문안작성 위원 임명통지를 해주시고 내일 바로 문안작성에 들어가도록 대변인에게 지시해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총재 댁을 나왔다.

다음 날, 문안작성 위원들과 글을 쓸 사무간사 송요욱 네 사람이 모였는데,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정보부 요원들이 우리들의 동태를 밀착감시를 하는 게 아닌가. 궁리 끝에 여관방을 빌려 작업을 하기로 하고 어느 여관을 정해서 그곳에 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안 있어 그곳에 정보부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래서 우리와 그들과의 숨박꼭질이 시작되었다.

대여섯 번을 옮겨 변두리 여관방을 잡는 데 성공한 우리 네 사람은 이번 기자회견을 우리들의 모든 것을 걸 각오로 가감없이 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아마 이번 기자회견이 성사되면 우리는 틀림없이 정보부에 끌려가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농반 진반의 이야기를 하면서 문안작성에 들어갔다.

박정희, 전두환 두 정권이 똑같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체제 도전’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체제 도전’이라는 문구를 꼭 넣기로 했다. 회견문과 결의문에 직선제 개헌과 장여인 사건 처결 등 여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이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면 현 정권은 즉각 퇴진할 것을 권고한다고 썼다.

회견문은 은밀히 100부를 복사해두었다. 다음날, 김의택 총재께서 직접 당사에 나와 기자회견을 해야 하는데, 만들어 놓은 회견문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밤중을 기다려 늦은 밤에 무슨 도둑질이나 하듯 당사에 몰래 들어가 천장 한곳을 감쪽같이 뜯어 그 속에 감춰놓았다.

기자회견이 예정된 날, 아침 일찍부터 민권당 당사 주변은 정보부요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성된 회견문을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당사에 들어가는 당 간부들과 위원장들을 붙잡고 사정도 하고 협박도 하고 요란을 떨었지만, 단 한 부도 사전에 유출되거나 빼앗기지 않았다.

1982년 6월 18일 아침 10시, 우여곡절 끝에 기자회견을 마쳤다. 그날 김의택 총재는 병세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당사에 도착해서야 미리 만들어 놓은 회견문을 천장에서 꺼내 기자들에게 나눠주고, 김 총재도 그때 처음으로 회견문을 받아 힘없는 어조로 낭독해 갔다. 그곳에 온 간부와 당원은 물론 기자들도 회견문을 듣고 모두 질렸다.
 
그리고 문안 작성위원 세 사람과 간사 송요욱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즉시 어디로 숨어 있으라고 권했다.

회견이 끝나고 병중에 있던 김의택 총재는 들것에 누운 채로 당사를 나가면서 “네 사람은 이 길로 집에도 가지 말고 숨어 있으라”고 걱정하셨다. 우리는 모두 헤어졌고 정보부 요원들도 회견문을 얻어 들고 사라졌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서 약국에 들렀는데, 경옥이 말했다.
“조금 전에 김의택 총재께서 전화를 걸어 지금 정보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노 위원장이 집에 오거든 즉시 몸을 숨겨 당분간 집에 오지 말라고 하라고 했어요. 당신이 할 일을 했지만 이 사람들이 이성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총재님 말씀을 들으세요. 당신, 장해요, 큰일했어요. 집 걱정은 말고 총재님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설악산에 가서 등산이나 하고 돌아오세요.”

경옥은 그날 약국 서랍 속에 있던 돈을 몽땅 나에게 주면서 등을 떠밀었다. 나는 설악산으로 달려가 수원에서 정치의 꿈을 꾸며 설악산에서 청수장여관을 하고 있는 홍경선 선배를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홍 선배는 속시원하게 잘하고 왔다고 환영하며 언제까지나 해결될 때까지 있으라고 하면서 방 하나를 내주었다.

나는 청수장여관에서 지내며 낮에는 홍 선배와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산에 오르고, 밤에 내려와 자고 하는 생활을 일주일 동안 계속했다. 사람들을 시켜 집에 전화를 해보면 지프 두 대가 약국 양쪽에 배치되어 있고 정보요원들이 경옥에게 “어디있는지 빨리 오라고 하라”고 심하게 독촉하고 있지만, 그래도 별도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걱정 말고 있으라고 한다고 홍 선배가 전해주었다.
 
남산 지하 3층 감방에서의 일주일
일주일이 되어갈 무렵 김의택 총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노신영 정보부장과 이야기도 했고 결코 심하게 다루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으니, 이제 돌아와 나를 만난 뒤 편리한 시간에 가겠다고 연락하고 가면 될 것이네.”

그래서 일주일 만에 집에 와서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성북동 김의택 총재 댁을 방문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김 총재의 연락을 듣고 달려온 정보부 차에 실려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 지하 1층으로 들어가는데, 고문기구인 듯한 의자가 몇 개 보였다. 양손 팔거리에 팔을 고정시키는 데 쓰는 듯한 팔찌 같은 것이 달린 의자가 우선 겁을 주고, 어디서 고문을 하는지 고통당할 때 지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실내에는 백열등이 눈부시게 켜져 있고, 수사관 다섯 명이 나 한 사람을 담당해 교대로 들어와 심문을 하는데, 구슬리기도 하고 겁도 주면서 추궁했다.
“너 각하한테 하야하라고 하는데, 각하가 하야하면 너는 무슨 장관을 하려고 했어?”

“대통령이 하야하면 하야했을 때 어떻게 한다는 절차가 헌법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헌법절차에 따르면 되는 것이고, 또 우리가 한 말은 한 정당이 국정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할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야했을 때 무슨 장관을 하려고 했느냐를 묻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우리는 소신껏 정치인으로서 국민에게 책임 있는 말을 한 것뿐 개인적인 의도는 없습니다.”

다섯 명이 돌아가며 한 말 또 묻고, 기자회견 내용에 대하여 일일이 물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한 일을 낱낱이 쓰라고 두툼한 백지를 갖다주고, 다 쓰면 도 다른 용지를 갖다주고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하는데, 매 끼니마다 의사가 들어와서 혈압과 맥박을 재고 간단한 진찰을 했다.

처음에는 식사와 의사의 출입을 세면서 아침, 점심, 저녁을 가렸는데 백열등 아래서 며칠을 잠을 자지 못하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나중에는 시와 때를 구분할 수 없었다. 문을 열어놓고 심문을 하는데, 문쪽에 인기척이 있어서 그쪽을 보니 노신영 정보부장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2~3일쯤 지났을 때, 나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옮겨놓고는 젊은 정보부요원이 큰 더블침대에서 함께 자자고 하면서 과일과 과자 등 먹을 것도 잔뜩 주었다. 그는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한다면서 이것저것 다정하게 물으며 아주 인간적으로 대해주었지만, 나는 너무 졸려서 실컷 잠을 잤다. 다음날, 잠이 깨어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았는데, 이름은 알아 무엇 하느냐고 하면서 자기 신분에 관한 것은 한마디고 말하지 않았다.

다음날은 나를 지하 3층으로 데리고 내려가 한 반 평쯤 될까 싶은 조그만 철창문으로 된 방에 들어가게 밀어넣고는 철문을 밖에서 잠가 버렸다. 그야말로 낮밤을 구분할 수 없는 그 지하 3층 감방에서 얼마를 있었는데, 나오라고 하더니 앞서 심문을 받던 지하 1층 방에 데려다 놓고 말했다.

“당신은 운이 좋아서 이제 내보내는데, 각서를 한 장 써야 나갈 수 있어요. 각서에 이제부터 민주산악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만 쓰고 나가시오. 그리고 나가면 그 각서대로 산악회에 나가지 말고 당신의 사업에만 전념하시오.”

나는 그가 내민 백지를 보고 말했다.
“도대체 산에 안 가겠다는 각서를 왜 쓰라고 하시오? 이 나라는 산에 갈 자유도 없단 말이오?”

내가 한참을 버티자 오히려 그쪽에서 사정을 했다.
“안 쓰면 못 나갑니다. 어서 쓰고 우리 일을 끝냅시다.”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대로라면 쓰나 마나 한 각서였고, 또 오늘 이후 나가서 민주산악회에 다시 나간다 해도 그것만으로 문제를 삼아 나를 도로 이곳에 끌고 와서 가두지는 못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것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그들 역시 장영자사건에 대한 기자회견 내용에 공감하고, 그것으로 고통을 준 데 대한 미안함을 얼버무리려고 어설픈 요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아내 경옥과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걱정을 끼쳤고, 또 이 정보요원들의 체면도 있고 해서 나는 “이후 민주산악회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지면 관계로 당시 기자회견문 전문을 옮기지 못하고 결의문만 여기에 적는다.

기자회견문(記者會見文)

민권당 총재 김의택(民權黨 總裁 金義澤)

결 의 문(決 議 文)

우리 민권당(民權黨)은 미회유(未會有)의 난국(難局)을 극복(克服)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事項)을 의결(議決)한다.

1. 정부(政府)는 장녀인사건(張女人事件)의 배후(背後)를 더 이상(以上)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밝혀라.
2. 도탄에 빠진 국민경제 위기(國民經濟 危機)를 조속(早速)히 해결(解決)하라.
3. 언론(言論)에 대(對)한 우섭(于涉)을 배제(排除)하고 언론인(言論人) 용기(勇氣)를 가져라.
4. 모든 정치범(政治犯)은 무조건(無條件) 즉시석방(卽時釋放)하고 정치규제자(政治規制者)의 해금(解禁)을 즉시단행(卽時斷行)하라.
5. 대통령(大統領)을 국민(國民)이 직접(直接) 뽑을 수 있도록 직선제(直選制)로 고치기 위한 헌법(憲法)을 즉시개정(卽時改正)하라.
6. 이상(以上)의 사항(事項)을 조속(早速)히 해결(解決) 할 자신(自身)이 없으면 현정권(現政權)은 즉시퇴진(卽時退進) 할 것을 권고(權告)한다.

 
 

1982. 6. 18
민권당 정무회의(民權黨 政務會議)


당시는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의 배후문제와 대통령 직선개헌, 그리고 정권퇴진에 대해서는 정당도 개인도 말할 수 없는 살벌한 때여서 신문사에서는 이 기자회견의 내용을 적당히 순화해야 했는데, 그나마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만 ‘대통령 선거법 개정 촉구’ 정도의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꼬박 일주일 만에 돌아와 약국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아내 경옥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당신, 수고했어요. 아침에 김의택 총재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별일 없이 오늘 나온다고 나보고도 수고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신, 장해요. 그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가족 누구에게도 당신이 정보부에 연행됐다는 얘기를 안 했어요. 알면 별로 도움도 못 주면서 애태우는 것도 그렇고, 모두 찾아와서 걱정을 하면 약국운영에도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나 혼자 하나님께 기도만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역시 지금까지 고생하며 민주화투쟁을 한 것이 헛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한 경옥에게 참으로 여장부다운 기상이 넘치고 있음을 보면서 더욱 믿음직하게 아내를 우러러보았다.

정보부 남산 분실 지하 3층은 끔찍한 곳이다. 일제 때 서대문감옥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모진 고문에 시달리고는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쓰러진 무수한 애국지사들이 생각나는 곳이다.
 
우리끼리 오순도순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하자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싸워 쟁취한 나라인데, 국민적 합의를 짓밟고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여 몇 사람 군인들의 정권안보를 위해 일제가 만들었던 서대문감옥을 남산공원 좋은 자리에, 그것도 지하 3층에 옮겨놓고 여기서 또 얼마나 많은 미주인사들을 고문하고 괴롭히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 희생시켰을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언젠가 민주화가 되면 이것부터 없애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제2의 독립운동인 셈이었다.

1982년 6월 18일자 국내외의 언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東亞日報)>
대통령선거법(大統領選擧法) 폐기 국민(國民)이 직접 뽑도록
-김 민권(金 民權) 총재 회견
 
<중앙일보(中央日報)>
선거법(選擧法) 개정 촉구
-김 민권(金 民權) 총재 회견
 
이 기자회견에 대해 <뉴스위크>지는 1982년 8월 2일자에 ‘나쁜 사건들과의 싸움’이라는 제목을 달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뉴스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금년 봄 광란하는 한 경찰관이 57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남부지방에서 발생했고, 전투적인 학생들이 부산에 있는 미문화원을 방화했으며, 일련의 치명적인 건설공사 사고가 서울지하철공사 현장을 강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사건은 대통령 자신의 가족 중 수명이 10억불 상당의 금융스캔들에 연류되어 한 야당 지도자가 신랄하게 그의 퇴진을 요구하게 된 사건이다. 그러나 국내 언론은 그들의 억압에 눌려 회견내용의 진실을 묻어 버리고 겁에 질려 동문서답 식의 기사로 국민을 현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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