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이 50만원에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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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이 50만원에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1.1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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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또 다른 민주화투쟁의 시작-대구경북 민주산악회의 결성

 
#1. 1980년 전두환은 일부 헌법을 개정해 국민투표에 붙였는데, 그 내용 중에 기존의 정당을 해체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것을 보고 유성환 씨(당시 경북도당 부위원장)는 그것이 사회주의 공산국가에서나 있는 일이지, 민주국가에서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에서 위헌이나 위법 사실이 있을 경우 재판으로 그 업무를 일시정지 또는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언정 국민투표로 정당을 해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이승호 씨(당시 신민당 경북도당 부위원장)와 몇 차례의 숙의 끝에 앞으로 해체될(국민투표에 의한) 신민당의 사실상의 ‘부활’을 위해서는 ‘민주회복’을 의미하는 ‘민주산악회’ 조직의 필요성과 역사성에 굳게 합의하고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승호 씨는 산악회가 결성되면 회장을 둘 수 있고 고문을 두어야 하며, 부회장·총무·조직·연락·부녀부 등을 둘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정당’이 아니냐고 하며 그 의미를 긍정하고 있었다. 유성환·이승호 씨는 김인갑·곽천순 씨의 동의를 얻었고, 네 사람이 비밀결사에 착수했다. 당시 전두환의 계엄치하에서는 정치활동이나 시위·집회가 모두 금지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대구 주변의 파계사, 부인사, 동화사, 송림사 등을 위장관광하면서 산악회 조직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산악회의 목적은 ‘신민당 부활·반파쇼 반독재투쟁·민주회복’이었으며, 회원수는 33인으로 한정했다.

그들은 발기·창립대회를 개헌투표일로 발표된 10월 27일로 정하고, 대구의 영산 팔공산에서 봉기하기로 했으나 기관요원들의 방해와 저지로 실패했고, 11월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12월 16일에야 성공했다. 초대 간사(회장)에는 김인갑 씨를 선출했으며 고문으로 이대우 씨가 추천되었다. 당국의 심한 방해로 발기·창립대회에 참석한 회원은 이대우, 유성환, 이승호, 김인갑, 곽천순, 박귀조, 이종훈, 이재우, 김종환, 송두봉 열 명이었다.

그러다가 1981년 3월, 유성환 씨가 회장에 취임해 조직을 확대해가던 중 1981년 4월 30일 김영삼 총재가 연금해제 통지를 받자 다음 날인 5월 1일에 대구경북 민주산악회 파계사 산행에 김영삼 총재를 초청해 함께 산행을 했다. 그날 150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산악회 행사장을 포위하고 행사를 감시했다.

유성환 회장은 인사말에서 “오늘부터 민주회복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팔공산, 덕유산, 태백산 등 전국의 산을 두루 산행하자”고 역설했다. 김영삼 총재는 어려운 시기에 이토록 어려운 일을 결정하고 수고하는 동지들을 격려하고 “서울에서도 전국 규모의 산악회를 결성해야 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귀경했다.

이때 LJH라고 행정부에서 국장을 지낸 사람이 적극 참가했는데, 이 사람이 산에 올라 술을 한잔하면 6·25 전쟁은 김일성이 남침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북침을 한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게 무슨 소리냐? 6·25 전쟁은 김일성이 남침을 한 것이 확실한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하면서 유성환 회장은 그 사람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고 다른 산악회원들도 그를 심하게 야단쳤다. 하지만 그는 술을 먹으면 여전히 북침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 말로 인해서 경찰에서 문제가 됐는데, 그가 유성환 회장에게 돈 50만원을 주면서 산악회 동지들을 모아서 “북침했다는 말을 L씨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일본에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유성환 회장과 산악회원들은 이로 인해 민주산악회를 반공법에 걸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를 석방시키려고 산악회원들이 모여 식사도 하고 또 달리 모이는 경비로 쓰면서 애를 썼는데, 나중에 그 50만원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유성환 회장이 경찰에 불려갔는데, 그 50만원은 L씨가 산악회원들 식사나 하라고 준 돈이었다고 해명했더니 “무슨 소리냐? 유 회장이 돈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는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하며 L씨와 대질을 시켰다. 그런데 L씨가 “유 회장이 50만원을 달라고 해서 주지 않았느냐?”고 오리발을 내미는 바람에 유 회장은 1983년 9월 초부터 29일 동안 구속수감되어 고생도 했다. LJH씨는 민주산악회를 용공으로 몰아 없애려고 했던 정보부의 프락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구에서 “유성환이가 어렵게는 살았지만 몇 억원이라면 몰라도 쩨쩨하게 돈 50만원을 가지고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는 여론이 비등해 수사당국도 어쩔 수 없이 29일 만에 풀어주고 유야무야하게 처리하고 말았다.

이렇게 민주산악회는 전국 곳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고, 정보부와 경찰의 회유와 방해, 탄압이 기승을 부렸지만 불타는 애국의 열정으로 모여드는 산악회원들의 산행을 막지는 못했다.
 
작년 6월 9일 도봉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는가?
 
#2. 1981년 어느 날, 정치 규제에 묶여 있던 김동녕 의원, 최형우 의원과 김덕룡 비서실장이 정보부에 연행되어 민주산악회를 통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대한 심문을 받으며 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때까지 1년 넘게 산행을 하였는데, 첫날 산행한 날짜와 인원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심문하던 정보부원이 “작년(1980년) 6월 9일 도봉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느냐?”고 추궁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 민주산악회의 탄생일이 알쏭달쏭하였는데 정보부원의 심문으로 1980년 6월 9일이 민주산악회의 첫 번째 산행일임이 분명해졌다. 참으로 재미있는 얘기가 아닌가! 민주산악회의 창립일은 1980년 6월 9일이고, 그날 산행에 참가한 사람은 김영삼 총재, 김수한 의원, 김동녕 의원, 최형우 의원, 김덕룡 비서실장, 정채권 목사와 성명 미상의 어느 비서였다.
 
이렇게 7명이 도봉산에 올라 민주산악회가 탄생하였는데, 그중 김수한 의원은 그날 한번만 참가하고 그 후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김덕룡 의원은 회고하고 있다. 이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관한 정보부의 철두철미한 탄압이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민권당의 쇄신과 황명수 의원 영입작업
 
#3. 민권당 기자회견 파동이 지나고 얼마 뒤 나는 또 김의택 총재의 부름을 받았다. 김 총재의 건강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김 총재는 병석에 누운 채로 내게 말했다.

“노 위원장이 정당경험이 많다 보니 자꾸 귀찮게 하는 것 같아 미안 하지만, 보다시피 내 건당도 좋지 않고 내가 나이가 많아서 이 당을 이끌어가기가 힘도 들고, 또 총재는 원래 원내에 있어야 제 역할을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니 너무 답답해. 그래서 지금 무소속의 황명수 의원을 영입해 총재를 맡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황명수 의원하고도 친한 노 위원장이 적격이라고 생각해서 불렀어요. 노 위원장, 이 일을 극비로 추진해주시오. 우선 황명수 의원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시오. 이 일이 누설되면 방해공작이 들어올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추진해주시오.”

나는 황명수 의원을 만나 전후 이야기를 하고 우선 “황 의원께서 김의택 총재를 문병도 할 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서 찾아가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렸다. 황 의원은 민권당 입당은 김 총재를 만나본 연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 문병차 가서 뵈어야겠다며 성북동 김 총재 댁을 찾았다.

민권당에 입당해 정말 국민이 바라는 참된 야당으로 육성해달라는 김의택 총재의 간곡한 제의를 받고 황 의원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황 의원 혼자 입당하는 것보다는 무소속으로 있던 J, K 의원 등 몇 사람과 상의해서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추어 입당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으니 내부적으로 극비에 부쳐 일을 진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나는 민권당 내에서 해야 할 일을 은밀히 진행시키기로 하고 김 총재 다음으로 연령으로나 관록으로나 훌륭한 지도자였던 김정두 선생과 상의를 했는데, 법률가이자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김정두 선생도 크게 기뻐하며 이 일이 꼭 성사되도록 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당시 민권당 정무위원 조철구·권기술·이인수·정대수, 대변인 이영권 씨 등은 대찬성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사무총장 C씨가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했다. 김의택 총재가 이 중대한 일을 사무총장인 자신과는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임무도 당기위원장인 노병구에게 맡겼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김 총재와 나는 일의 성격상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 늦었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당면과제가 중요한 만큼 잘되도록 서로 힘을 합해 꼭 성사되도록 하자고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며 정무회의만 열리면 사람들을 동원해 폭력으로 회의의 개회 자체를 방해하고 나서 도저히 회의를 할 수 없었다.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동원하는 사람들의 경비도 적잖을 텐데 회의 때마다 동원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배후가 있다고 우리 모두는 긴장하면서, 그럴수록 꼭 성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시간만 허송했다. 황명수 의원 쪽의 무소속의원 영입 문제와 또 다른 사람들의 영입 문제도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 좋다고 승낙했다가 며칠이 지나면 태도가 돌변해 입장을 바꾸곤 해서 시간만 끌고 있었다.

애당초 다당제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만들었던 전두환의 정치구도가 깨지는 것을 겁낸 정보부의 방해공작에 결려 민권당은 자주적인 의사결정의 자유를 박탈하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김 총재의 소망이 그 가능성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혼미할 때 김의택 총재는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의택 총재의 장례식을 치른 뒤, 우리들은 다로 모여 전두환의 이런 정치구도를 깨는 길은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당대회를 열어 당의 해체를 결의해야 하는데, 정보부가 알면 전당대회를 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게 뻔했다. 우리들은 전두환의 꼭두각시로 남을 바에는 차라리 정치를 그만둘 각오를 하고 모두 집단탈당을 할 수밖에 없다는 김정두 선생의 비장한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탈당도 오늘 여기서 결행하지 못하면 이 또한 방해를 받아 지지부진할 것이니 아주 지금 함께 탈당계를 써서 중앙당에 내용증명형식으로 등기로 부치자”는 말씀에 무두 동의하고 그날로 집단탈당을 했다. 마침내 재적 지구당위원장 3분의 2이상이 여기에 가세해서 “민주화투쟁에 가담하기 위하여 탈당한다”는 성명을 내고 탈당함으로써 전두환 3중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들의 탈당으로 민권당은 기능이 마비되어 사무총장 C씨와 남은 몇 사람이 사무실만 지키다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민권당을 집단탈당한 우리는 대부분 민주산악회에 가담해 민주화 투쟁을 계속했고, 그중에 이영권, 권기술 그리고 애석하게도 고인이 된 조철구 동지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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