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정희> YS, “나만 편히 외국에 있을 수 없다”…유신발표하자 급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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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정희> YS, “나만 편히 외국에 있을 수 없다”…유신발표하자 급 귀국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6.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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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민주화의 아버지, ‘김영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김영삼, 내란선동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1963년 3월 22일 12시 당시에는 서울 종로에서 가장 유명한 ‘백조그릴’에서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12시가 되자 김영삼 윤보선 정해영 서범석 유진산 김준연 김도연 박순천 등 150여 명이 하객으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미리 작성한 각파인사 88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박정희의 군정 연장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5·16 이후 처음 있는 군정반대집회이자 정치집회였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젊은 국회의원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을 도와 중앙정보부와 경찰, 계엄군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암암리에 면밀하게 준비한 사람이 복진풍이었다.   

철통같은 보안 속에 진행되어 정보부와 경찰 계엄군을 완전히 따돌리고 결혼식을 가장한 박정희의 군정연장 반대대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백조그릴부터 시작하여 을지로 태평로 광화문을 향한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가자 진압경찰 1000여 명이 몰려 왔지만 그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위대와 저지하려는 경찰이 맞붙었다. 시위대원 한 명당 경찰 3~4명씩 들러붙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시위대를 닭장차에 실어 경찰에 연행했다. 이들을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 관할관으로부터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했다.

그리고 군사재판은 빠르게 진행됐고, 이들은 남산근처에 위치한 군사재판정에 계속 불려 다녔다.  

이때 김영삼 김동영 김상흠 복진풍 서정귀 등 10여 명이 큰방 하나에 같이 있게 되었는데 김상흠이 평소“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함흥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고 자랑삼아 무용담을 늘어 놨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후 김상흠은 면회자들이 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겁먹은 표정으로 물어 봤고, 수감 중이던 인사들에게 “우리 모두 사형 아니면 무기래요”하며 전전긍긍했다.

김영삼도 당시를 회상하며 “그분 참 겁쟁이였어, 정말 사형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면회 오는 사람만 있으면 붙잡고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 봤지…”라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계엄치하는 그만큼 살벌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쿠데타 세력도 미국 앞에서는 꽁무니를 뺐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언론에 ‘구속 정치인 석방’을 요구한다는 기자회견문이 나오자, 미국 눈치를 보느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날 바로 석방했다.

총칼의 위협에도 겁내지 않는 반대자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음해와 고문 등으로 죄를 만들어 붙였다.

김영삼은 22일 만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당시 박정희의 반란군은 김영삼 등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인들을 계엄법을 적용하여 어마어마한 ‘내란선동죄’를 지었다며 최고형에 처하려고 했는데,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눌려 할 수 없이 석방하기 위한 구실을 새롭게 붙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법률위반’이라고 죄명을 바꾸어서 석방했다.

행정안전부 국가 기록부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이라고 적혀있다.

이를 가리켜 일명 백조그릴 위장 결혼식사건 이라고 한다.

새삼스럽게 백조그릴 위장 결혼식 사건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고 36년 동안 일본의 압제 하에 불행한 세월을 보내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으나 몽매에도 그리던 완전독립을 못하고, 38선을 경계로 남한만의 반쪽에 민주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을 세워 잘 나가는가했는데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이 부패하고 오만하여 3선 개헌을 하고도 불안하여 3·15 부정선거로 영구집권을 꿈꾸며 독재로 치닫다가  4·19로 무너져 내렸다.

모처럼 순수한 국민총의에 의한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모범적인 선거로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수립되어, 짧은 시일 안에 경제제일주의와 수출입국의 경제정책을 내세우며 모범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완성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부터 외자도입계획도 세우고, 한일회담을 매듭지어 청구권자금도 도입하기로 함으로써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자금계획도 세워놓고, 5월 23일 국회대표단을 일본에 보내어 완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성사 1주일을 남겨놓고, 다된 밥에 코 빠뜨린다고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한일문제는 무위로 끝나 버렸다.

박정희가 한일교섭을 4년이나 후에 타결 지음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약 4년 이상 후퇴시켰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1962년 1월부터 구체적인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참으로 아쉽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권력에 눈이 먼 박정희 일파의 군사반란으로 무려 32년 동안 부정부패와 독재정치로 뜻 있는 수많은 청년학생과 민주인사들이 반란군의 정보정치와 맞서 싸우다가 많은 사람들이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 혹은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협박을 당하다가 고통을 못 이겨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그들이 조작하여 부르는 대로 죄를 인정하고 목숨마저 그들의 처분에 맡기고, 억울하게 이 땅을 떠난 사람도 많고 혹은 전기고문 물고문등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도 많다.

군사정부를 반대한다고, 혹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출세에 눈이 먼 어용검사와 판사의 엉터리 재판의 형식을 거쳐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고생한 사람도 많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갔다.

그러나 ‘한국정치범동지회’와 감옥생활을 했던 일부 민주인사를 비롯하여 일부 민주인사들이 김대중은 감옥생활을 했는데 김영삼은 감옥 한번 간적이 없으니 민주화운동의 격이 떨어진다고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조그릴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김영삼도 계엄군법회의의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감옥에도 갔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감옥에 가고 안 간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누가 더 진정성을 가지고 효과적인 민주화투쟁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유신이 나고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에 나섰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그때 외국에 나가 있었다. 김영삼은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난에 처하고, 국민이 반란군의 총칼에 억압받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나만 외국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고 죽어도 국민과 함께 죽고 함께 싸워야한다고, 미국의 저명인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곧바로 귀국하여 가택연금 당했다.

김대중은 겁에 질려 귀국하지 않고 외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일본에서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납치되어 바다에서 살해 일보 직전에 미국에 의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김영삼은 처음부터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던졌고, 김대중은 겁에 질려 목숨을 사리다가 강제 귀국 당했다.
이때부터 김대중은 민주화보다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정권욕이 앞서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박정희와 전두환은 김대중을 가볍게 우습게보고 납치도하고 사형선고도 하고 감옥에도 보내고, 또 김대중이 큰 잘못도 없으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탄원서를 쓰면 은전이나 베푸는 것처럼 외국으로 내 보냈다.

그러나 김영삼은 달랐다.

민주화에 대한 김영삼의 열망과 진정성은 국민을 감동시켜 국민적 봉기의 도화선이 되고, 동기가 되어 김영삼을 감옥에 보내면, 자칫 감당키 어려운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박정희와 전두환이 김영삼을 꼭 감옥에도 보내고 아예 없애고도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오히려 감옥보다도 더 참기 어려운 헌병 1개 중대를 보내어 집을 둘러싸고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가택연금을 몇 년 동안 계속 했다. 연금은 감옥이 아니냐고 오히려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민주화의 실현도 박정희가 영구집권에 방해가 되는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고 없애려다가 불같이 일어난 부산, 마산, 창원의 국민이, 죽음을 각오하고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김영삼의 진정성에 화답 하고자 봉기한 부마항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대책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강온으로 갈려 싸우다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김영삼과 박정희의 맞대결에서 박정희의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난 것이다.

김대중의 비협조와 방해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도 그들의 부정과 비리를 가려 감옥에까지 보내어 군의 정치개입의 길을 확실하게 끝낸 것도 김영삼이었다.

민주화 역사는 김영삼으로부터 새로 써야 한다

해방 후 49년 건국 후 45년 동안 우리는 독재자에게 시달려왔다.

산만한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묶어 민주화를 이끌어낸 중심에는 김영삼이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그의 불굴의 신념과 의지, 목숨을 건 애국심과 일관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제를 살린다고 비인간적 비정신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제에 못지않은 탄압으로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가 희생됐다.

헌정중단이 또 헌정중단을 낳는 악순환을 김영삼과 민주산악회 그리고 수많은 애국학생과 민주인사들이 싸우고 또 싸워 끝내 문민정부를 세웠다.

박정희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장장 32년 동안 불법, 무법, 부조리가 판을 쳤다. 안가 등의 밀실정치로 저질러진 뿌리 깊은 부정부패를 단숨에 몰아내고, 불과 5년의 짧은 임기 중에 박정희가 사병화한 하나회를 척결해 이들을‘자랑스러운 군대’로 복귀시키고, 선진국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공직자재산공개, 금융실명제를 제도화해 투명한 민주경제의 터를 확립했다. 박정희가 없앴던 지방자치제를 실시해 선진 민주정치의 꽃을 활짝 피웠다.

김영삼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32년간 저질러진 독재 퇴폐문화를 투명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완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빛나는 성과는 김영삼의 투철한 애국심과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로 국민을 감동시키고 하늘을 움직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비로소 사람대접을 받는 두 번째의 완전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드디어 새벽이 밝았다. 이대로 곧바로 가야한다. 만세를 향해서 말이다.

황무지에서 꽃이 피듯이 50여 년 동안 이승만 독재와 특히 박정희의 총칼 앞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국민은 정신문화를 향상시켰다. 이제 정치의식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다시와도 그들의 독재방식을 하루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으니 말이다.

김영삼은 국부는 아니더라도 민주화의 시작이요, 민주화의 아버지로 기록해 지금부터라도 후배 대통령들의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영삼을 민주화의 아버지로

미국의 조지워싱턴이 사심 없는 애국적인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것은 인류의 부러움이다.

이승만이 그렇게 될 뻔 했는데.

우리는 건국의 아버지는 없어도 목숨 걸고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쟁취했으며, 자유민주주의의 제반 제도를 완결해, 비로소 민주광복을 제자리에 갖다놓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민주화의 아버지로 후대에 알려, 선진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다져 나가야한다고 감히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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