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당신이 민주산악회 맡아줘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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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당신이 민주산악회 맡아줘야겠소"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2.0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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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김영삼 총재 스스로 이뤄낸 연금해제

#1. 단식 12일 만에 전두환은 권익현 의원을 김 총재에게 보내 “오늘부터 해외든 국내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고, 이제부터 상도동 자택은 물론 이곳 병원에 배치된 경찰병력을 모두 철수하며, 부분적으로나마 건강이 회복되면 직접 만나 대화를 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김 총재는 “나 한 사람의 연금이나 풀려고 단식투쟁을 한 것이 아니다. 나의 민주화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이 싸움은 중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단식을 계속했다.

그때까지 김대중 씨를 비롯한 수많은 민주인사와 재야정치인·종교지도자·야당정치인 중 누구도 오직 무력을 앞세워 무법·불법의 무한탄압으로 일관하는 전두환 정권에 억울하지만 당할 수밖에 없었고, 불만스럽지만 그들의 힘으로 그려 놓은 한계선 앞에서 저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김영삼 총재만이 혼자서 다윗의 풀맷돌을 던져 골리앗 전두환을 정통으로 맞춤으로써 김 총재를 둘러싼 경찰병력을 스스로 물로 만들어 물러나게 했던 것이다.

김영삼 총재는 연금해제 후에도 이 나라에 완전한 민주화가 이룩될 때까지 단식은 멈출 수 없다고 선언하며 계속했다. 우리 모두는 생명까지 위태로워지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단식을 중단시킬 일이 걱정이었다.
 


단식중단

 
#2. 이민우 회장을 비롯한 우리는 이러다가 목숨이 위태로우니 “살아서 같이 민주화투쟁을 하자”고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해외동포와 심지어 학생들까지 나서서 단식중단을 권고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직접 병원을 찾아와 김 총재의 손을 잡고 “살아서 민주화를 이룩하자”고 권고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단식중단을 요청했다. 서울대병원에서도 담당 의료진이 단식 20일이 넘어 더 이상 단식을 계속하면 생명이 위태로우니 이제 중단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23일간의 단식을 끝마치고 1983년 6월 9일 오전 9시 30분경, 김 총재는 병원에서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갖고 단식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김덕룡 비서실장이 준비된 성명 ‘단식을 마치면서’를 대신 읽었다. 민주와 비민주의 갈림길이 된 김영삼 총재의 단식의 변인 회견문을 여기에 옮긴다.
 
|단식을 마치며|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오늘 비통한 심정으로 나의 단식투쟁의 중단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나의 단식을 중단케 하려는 음모가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나의 20여 일에 걸친 단식기간 중 국민 여러분이 보내준 뜨거운 성원과 나의 민주화요구에 대한 열렬한 지지, 그리고 나의 건강과 나의 생명을 염려해주신 그 눈물겨운 애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격려와 애정은 나로 하여금 외로운 단식투쟁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고, 또한 나의 생명을 독재권력으로부터 지켜주었으며, 나아가 이 땅의 민주화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민주국민과의 깊은 연대감을 뼛속 깊이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가 죽기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현 정권이 나의 단식을 중단케 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그들이 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튼튼하게 연대하고 있는 민주국민의 결사적인 민주항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 곰의 죽음’이 대서특필되면서도 한 나라 야당지도자의 오랜 연금과 단식투쟁 사실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 언론상황 속에서 입과 입, 손과 손,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 단식 사실의 전파와 더불어, 민주 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연대를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던 몸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으로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그 고통과 고난의 맨 앞에 설 것이며,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나는 광주사태에서 희생된 영령과 조국의 제단에 자신을 던진 현충(顯忠)의 넋,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청년·학생들의 투쟁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의 맨 앞의 일부를 나 자신이 떠맡기 위하여 민주투쟁의 최일선에 설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서약하는 바입니다.
 
나의 투쟁은 이제 시작일 뿐 민주화를 위하여 내가 가야 할 곳이 감옥이라면, 나는 기꺼이 감옥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감옥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개인이 거쳐야 할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단 0.1%만이라도 감옥에 갈 결심을 한다면 민주주의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가 십자가에서 죽어 가장 무력한 것으로 보였지만, 부활하여 사랑과 정의의 빛으로 세상 권세와 불의를 이기셨습니다. 나는 또한 우리 모두가 자신이 처한 처지를 훌훌 벗어 던지고 민주화 투쟁 대열에 사심 없이 합류하여 조직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한다면, 독재의 암흑은 마침내 걷히고 민주주의는 이룩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부활은 바로 민주주의 실현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민주주의 없이는 우리 모두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그 언젠가 국민과 더불어 ‘민주주의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을 갈 것입니다.
 
1983년 6월 9일
김  영  삼
 



민주산악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이 되다

 
#3. 1984년 봄날 저녁, 해가 넘어가 어둑어둑할 무렵 여주의 부민농장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노 선배요? 나 장학노입니다. 지금 바로 상도동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지금 상도동으로 오라는 총재님의 말씀이 계셔서 전화를 했습니다.”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 어두운데 내가 운전을 하고 가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밤길 운전이 신경이 쓰여. 혹시 무슨 일인지 몰라?”

“아마 노 선배한테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 날 밝은 뒤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말씀을 드려봐요.”
그래서 김 총재의 의향을 물은 뒤 통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럼 내일 오전에 꼭 오라고 하시니 너무 늦지 않게 오시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이 상도동 김영삼 총재 댁을 찾았다. 김 총재가 입을 열었다.

“노 국장, 이제는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매주 목요산행에 수백 명씩 참가할 뿐 아니라 먼 지방에서도 참가하는 동지들이 날이 갈수록 늘고, 또 각 시도에서 지방조직을 확대하자는 요구가 답지해서 지방조직을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무작정 할 수는 없고, 일정한 요강을 만들어 희망하는 사람들을 심사해 인준하는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위원장직을 노 국장이 맡아주었으면 해요. 그래서 오라고 했으니 수고해주세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정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또 전에 정치를 할 때도 진산계에서 고흥문계로 이어오면서 김영삼 계보를 해본 적이 없는데, 새로 정당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민주산악회의 전국조직을 하면서 조직의 핵심인 조직위원장직을 맡으라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총재님, 개인적으로는 무한한 영광이지만, 제가 어떻게 그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선배들도 많고 저보다 더 열심인 사람이 많은데 다른 사람을 골라보시지요.”
“노 국장, 내가 충분히 생각하고 맡기는 것이니 더 사양하지 말고 임무수행에 만전을 기해주세요.”

김 총재의 말에 나는 더 고사하지 못한 채 그 일을 맡았고, 그날을 시작으로 김영삼계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내가 조직위원장에 임명된 것이, 그날까지 오랫동안 김영삼 총재를 자기의 지도자로 모시고 고락을 함께한 많은 동지들에게 염치없는 일이기도 해서 몇몇 동지들에게는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미안하다는 인사를 해야만 했다.

내가 김영삼 총재의 권유에 따라 산행에 참가했을 때는 약 20여 명이 산에 올랐다. 그때 산행식을 하면서 김영삼 총재와 정채권 목사가 번갈아 산상기도를 드렸고, 총무와 산행대장 역할을 정채권 목사가 하고 있었다.

정채권 목사 다음에는 K씨가 총무로 임명되었고, 산행대장 역할은 지금 미국에 가 있는 홍사일 씨가 맡았는데, 도중에 총무 K씨가 대기업에 스카웃되어 박정태 씨가 총무를 맡아 수고하고, 산행대장에는『남부군』의 저자 이우태 전 의원이 맡아 수고를 했다.

그런데 박정태 씨가 등산 도중 넘어져 다리를 크게 다쳐서 총무직을 그만두었는데, 당시는 전국조직에 들어가면서 집행부를 사무처라 칭하고 사무처장에 김진억 씨를 임명하고 산행총대장을 이우태 씨가 맡아 수고하고 있을 때였다.
 
조직위원의 수는 위원장을 포함해서 모두 일곱 명으로, 김덕룡(총재비서실장), 이우태(산행총대장), 김진억(사무처장), 노병구(조직위원장) 등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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