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종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변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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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변화없다˝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2.07.14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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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변호사무균질 정치인 ˝새누리당 해산시켜 정신차리게 하고 싶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연말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갈망이 크다. 이에 편승, 기성 정당들이 변화에 앞장선다면서 이런저런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다지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다. 근원적인 개혁과는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박찬종 변호사의 얘기를 들어봤다. 박 변호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며 '무균질 정치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지금의 새누리당-민주당 구도로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 개혁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3지대에서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인터뷰는 2012년 7월 3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박찬종 변호사는 기성 정치권으로는 제대로 된 정치개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 변호사는 지난 4·11 총선 당시 박세일 국민생각 대표를 지지했다. 그 이유부터 물어봤다. '기성 정당의 비민주적 행태'가 답이었다.

 

"현재 기득권 정치세력이 잘못됐다는 대의(大義)에서 박세일 대표와 저의 생각이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제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곳(서울 서초)에 박 대표가 출마했고,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지원연설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현재 우리 정치의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패하고 부정직합니다. 정당 운영이 비민주적인데 (지난 4 ·11 총선 당시) 밀실야합 공천, 돈 공천, 헬리콥터 공천, 돌려막기 공천, 낙하산 공천 등이 현저했습니다. 우리 헌법에는 정당 민주화 규정이 있습니다. 절대로 정당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돼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새누리당 경선룰에 대해 비박(비박근혜) 주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큰 문제가 없다며 그냥 무시합니다. 요즘 정당들의 행태는 엄청난 사기극입니다."

그는 그러면서 정당의 계보 정치를 질타했다.

"1987년 6·29 이후 현행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도 선거를 합니다. 공화국이라는 용어도 쓰지요. 남과 북의 두 체제가 경쟁관계인데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두환 아마추어 독재는 김일성의 프로 독재를 못 따라간다. 그래서 여기서는 철저한 민주화를 해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따라서, 국민들의 희생으로 얻은 현행 민주주의 헌법의 내실화를 단단히 해야합니다. 올해가 헌법개정 25주년이 되는 해인데 지금 정당들에 계파가 있어요. YS와 DJ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군사정권과 싸우는 방법으로, 자기 보호 본능에 기인해 사람 중심으로 뭉치다보니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독재정권의 공작정치에 살아남기 위한 상호 견제 작용을 했어요. 서로 '누가 전두환 협박에 넘어가나' 하면서 상호 견제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정부로 정권 교체가 됐는데도 계보가 있어요. 그 자체가 비민주적입니다."

이 대목에서 박 변호사는 새누리당 해산까지 언급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헌법에 비민주적 정당, 위헌적 정당을 해산시킬 수 있는 조항이 있어요. 정당해산제소권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1987년 개헌 당시에 제가 (통일민주당) 개헌특위 간사였습니다. 그 때 정당해산제소권을 대통령에게만 주는 게 아니라 국민 10만명의 서명이 있을 때도 가능하도록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번에 대장이 되어서 새누리당을 해산시켜 정신을 차리게 했을텐데 아쉽습니다."

 

-박세일 대표의 국민생각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양자 대결이 너무 치열해서 제3세력이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특히, 나꼼수 파동과 진보진영의 연대 때문에 표가 양쪽으로 쏠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의 46% 정도가 '국민생각은 좋지만 이번 선거에서 될 수 있겠나'하면서 대량으로 기권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제3세력이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나요.

"이번 대선 국면은 나꼼수 사태 및 진보진영 연대가 소멸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기존정치에 대한 실망감은 총선 때보다 더 늘었다고 봅니다. 양 기득권 세력이 펼쳐놓은 질서에 못마땅한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제3정치세력이 세력화되고 그 '링'에 안철수 교수를 비롯한 국민 눈높이에 맞는 후보들이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적 여망을 담은 '국민혁명안'을 다듬어 내거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3세력인 '국민추대위'에서 제3의 후보를 내고, 새누리당, 민주당 후보와 3파전을 벌인다면 지난 총선에 참여하지 않은 유권자들의 무더기 표를 겨냥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그 동안 관성에 젖어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찍었던 사람들도 제3후보가 그럴듯하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큽니다."

"연말 대선에서 제3세력 성공 가능성 높아"

-안철수 교수에 대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부패하고 타락한 여의도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국민들의 바람이 안철수 현상입니다. 단순히 새누리당 재집권을 막아달라는 것이면 안철수 교수는 민주당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요. 안 교수가 어떤 선택을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안 교수를 만난 일도 없고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안 교수가 민주당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계속 말합니다."

-안철수 교수가 제3지대에서 출마한다면 지지할 것입니까.

"지금으로서는 제3세력 후보가 될 사람으로는 안 교수가 가장 유력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꽃가마를 태워줄 수 없기 때문에, '스파링'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제 몸에 체득화된 개혁안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제 생각도 전수하고 다른 후보들끼리 경쟁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 제3후보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면 안 교수가 당연히 1등을 할 텐데…,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죠."

박 변호사가 제3세력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가 제3세력의 원조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3후보로서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줬던 1995년 서울시장 선거로 화제를 돌렸다.

"젊은 박찬종에 위협 느낀 DJ, 문희상 통해 삼고초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아쉽게 당선되지 못한 이유가 뭔가요.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제가 그 때 약 34%를 득표했습니다. 어떤 선거이든 간에 득표율이 1/3을 넘으면 당선권입니다. 무소속으로 세(勢)부족, 자금부족에 시달렸는데 나름 선전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이 있었습니다. 50대 박찬종이 서울시장이 되면 다음에 대통령 선거에 나올 것이고, 그러면 DJ가 안 될 수 있고, DJ가 안 되면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도 함께 몰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DJ가 미리 박 변호사에게 영입 제안을 하지 않았나요.

"DJ가 그해 1월 초에 제게 삼고초려를 했습니다. 문희상이 세 차례 저를 찾아와 DJ 뜻을 전했습니다. 문희상은 '선배님이 민주당 후보가 되면 조직, 자금 전부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는 당연히 서울시장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지방자치에선 정당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 취지도 지방자치와 관련해선 정당공천 배제 입니다. (관련해서) 정당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당적을 떠나는 것도 우리 헌법의 취지입니다. 저는 문희상에게 '김대중 총재도 이런 내용을 잘 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일본 얘기를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정당이 지방선거에서 공천권을 거의 행사하지 않는 대신 '아이노리(합승)공천'을 합니다. 그러니까 무소속 출마한 후보에 대해 몇몇 정당이 지지를 표시하는 겁니다. 결국 얼마나 많은 정당의 지지를 받느냐가 당락의 관건이 되는 셈이죠. 저는 그에게 '이번에 DJ가 이런 식으로 박찬종 동지를 지지한다고 하면 얼마나 아름답냐'고 말했습니다."

-JP는 어떻게 했나요.

"JP도 같은 달에 김용채를 제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조선호텔 별실에서 만났는데 문희상과 똑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자민련 공천 받으라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자민련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얘기하는데, 공천 받으면 안 된다. DJ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되는데 그 쪽은 안 된다. DJ 정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으면 호남 몰표가 있다. 그리고 나를 지지하고 있는 무소속 성향 표 절반이 달아나겠지만 (결과는 승리이다.) 하지만 내가 자민련 공천 받으면…, 자민련이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도대체 얼마인가. 게다가 무소속 성향의 내 표도 다 달아난다.  그래서 내가 3등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JP가 일본 사정을 잘 알테니 아이노리 공천을 해라. DJ당도 JP당도 박찬종 지지한다고 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제가 앞도적으로 되면 세대교체 바람이 불 텐데 두 사람이 그렇게 할 리가 없죠. 그러다가 DJ와 JP가 만나서 박찬종을 조지자고 뜻을 모은 것입니다. 그 때 제가 당선됐다면 세대교체로 한국 정치사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도 운명이라고 봅니다."

박 변호사는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섰고 선거 초반 2위 조순 후보에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20% 이상 앞서가다 DJP연대가 조순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아쉽게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YS가 제게는 경남중학교 대선배입니다. 그리고 저는 원래 상도동계로 분류됩니다. 민추협-신민당-통일민주당 과정에서 상도동계 비주류였지요. 또, YS 친인척들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이런 터에 서울시장 선거가 끝나고 가을 바람이 불 때 여러 방면에서 복귀하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특히, YS와 경남중학교 동기이고 제게는 중학교 은사인 전(田) 선생님이 있었는데, 가을부터는 자주 전화를 해서는 '박 의원에 대한 거산(김영삼)의 기대가 크다. 양김(兩金)청산이라고 하는데 한쪽 김은 (대통령이) 됐으니, 나머지 한 김을 청산하기 위해서도 원래 자리로 와야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 때 '무소속'에 지쳐있었습니다."

박 변호사가 언급한 '전 선생'은 YS가 집권 이후에 '동창들을 만나서 세정을 듣는다'고 할 때의 그 '동창'이다. YS는 '동창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복수가 아닌 단수의 '전 선생'이라고 한다.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1996년 1월 16일 무렵 청와대 이해순 의전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대통령이 오찬을 하자고 한다고요. 월·화·수 중에 마음대로 정하라고 해요. 저는 전화를 받은 뒤에 '리서치 코리아' 사무실에 가서, 서울시장 선거 때 박찬종을 지지한 사람들 500명 표본으로, 신한국당 입당에 대한 여론조사를 부탁했어요. 그 결과, 50%는 찬성, 25%는 그럭저럭, 25%는 극단적 반대였습니다. 그걸 들고 (YS를 만나는 날) 시청 앞 다방에서 고민하다가 11시 30분쯤 차를 타는 순간에 그냥 '점심 잘먹었습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하고 나오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하더라구요."

YS, DJ보다 박찬종을 더 높이 평가

박 변호사가 이처럼 신한국당 입당을 좀 더 고민할 생각이었지만 청와대에 들어선 순간 실제 분위기는 달랐다.

 

3金시대에 박찬종 변호사는 늘상 각 정파의 영입대상 1순위였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입구에서 본관까지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YS와 만난 것이) 절대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디다. YS를 직접 만나 그 유명한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사실 과거 야당 시절 저는 정책위의장으로 총재인 YS와 자주 얘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YS가 식사를 빨리 하는데 저는 천천히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YS가 입당하라고 했어요. 점심이 12시 정각에 시작됐는데 1시간이 넘어갔습니다. 쪽지가 들어왔는데 YS가 스케줄까지 취소했습니다. 그 때 '어쩔 수 없겠다' 싶더군요. 제가 YS에게 '대통령 집무실에서 차 한잔 하자'고 요청하니 '그러자'고 했습니다. YS는 제가 반쯤 승락한 것으로 생각한 듯했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니 광화문 충무공 동상이 보였습니다. 제가 무심코 '광화문 네거리도 보이고 경치도 좋습니다'라고 하니 YS가 '내가 말이다. 아침에 조깅하고 여기 나오면 기분이 되게 좋다'라고 해요. 그 대목에서 제가 동의를 해버렸습니다.

 

YS가 윤여준 대변인을 찾았고 윤 대변인이 여의도에서 급히 왔습니다. YS와 제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윤 대변인이 놀라, 저 끝에 앉아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렇게 입당하게 됐습니다."

박 변호사가 신한국당 입당을 발표한 날 때마침 배구시합 TV생중계가 있었다. TV화면 밑에 '박찬종 신한국당 입당'이라는 자막이 지나갔고 1시간 후에 DJ 당에서 비난 성명이 나왔다. 또 그의 집에 '김영삼 똘마니가 됐다'라며 비난하는 전화가 100통씩 왔다. 박 변호사는 이 때 '좋다, 본떼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비례대표 2번 사양하고 21번 선택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입당 발표 후 불과 2~3일 뒤에 '이회창은 (1996년 총선) 전국대책위원장, 박찬종은 수도권 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사실 신한국당은 경상도에서는 유리했고, 수도권에서 이기는게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이회창 씨 표는 별로 안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도권 대책위원장이 된 직후 YS를 만나 '전국구는 뒤로 물러서겠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YS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미 전국구로 당선돼서 산보하는 것처럼 후보들을 지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비장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그리고, DJ가 이번에는 전국구 14번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하고 얘기했어요. YS가 제 손을 잡더니 '네가 김대중과 같나. 니가 뒤로 물러서겠다는 건 (DJ 경우와) 다르다. 너는 정말 사즉생(死卽生) 아니가'라고 해요. 제가 또 '우리집에 욕 전화가 와서 신경이 쓰인다'고 하니 '씰데없는데 신경쓴다'고 해요."

 

YS는 박 변호사의 '사즉생'에 고무됐다. 이 사실을 빨리 발표할 것을 주문했다.

"강삼재(당시 사무총장)가 후보 등록 마지막 날에 18번을 얘기하는데 저는 21번을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YS는 '사즉생'이라며 '빨리 발표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고 강삼재와 같이 내려오는데 강삼재 이 친구가 내 오른 편에 서서 제 손을 꽉 잡아요. 그래서 저도 꼭 잡았습니다. 강삼재가 '아, 형님 멋지다'고 해요. 제가 '뭐가'하고 물으니 '지금 의원직 포기하는 사람이 어디있나. 형님 밖에 더 있나. 감동 먹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뭐가~, 다 당과 대통령을 위해서 하는 건데'라고 했더니 '형님 위해 내가 총대 매겠다'고 해요. 그 때 '아, 내가 희생해서 강삼재도 감동하고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 역사가 이뤄진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지만, 정치인 박찬종의 현실정치에서 본다면 너무 안일한 생각이 아니었나요.

"그 사실이 보도된 것을 보고 마누라가 '이게 무슨 소리야. 두고봐라. 아무도 안 알아주고 손해볼 것'이라고 했어요."

박 변호사 부인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선거지원에 총력을 쏟는다.

"그 때 서울 선거구가 47개였는데 27명을 당선 시켰습니다. 그것도 1% 내외 표차로…. 홍준표, 이신범, 김문수 등을 제가 당선시켰습니다. 저의 선거유세 지원 방법은 독특했습니다. 홍준표가 송파 베드타운에서 선거유세를 하는데 아침 6시 반쯤 지하철 정거장 입구에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해서 '끄라'고 했습니다. 대신, 홍준표를 지하철 정거장 안으로 데리고 가서 통로 지형을 익힌 후, 사람들이 이동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맥주 박스를 놓고 그 위에 서서, 지하철에 탑승하는 사람들 뒤에서 마분지를 둘둘 말아 메가폰을 만들어 소리쳤습니다."

그가 시민들을 향해 외친 내용도 특이했다.

"그 때 '장학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YS가 얼마나 저한테 민망해 했는지 모릅니다. (깨끗한) 박찬종을 힘들게 끌어왔는데 그 사건으로 실망할까봐. 그런데 저는 지하철에 타려는 시민들을 향해 '박찬종·홍준표는 장학노 사건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부패청산에 앞장설 것입니다'하고 외쳤어요. 김문수를 지원할 때는 '김문수·박찬종은 장학노 사건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부패 추방에 앞장설 것입니다'하고 외쳤어요. 그러면 시민들이 출근해서 회사에서 화제가 되는 것입니다. 선거 끝나고 김문수가 제일 먼저 와서 제게 절했습니다. '선배님 때문에 됐다'고."

이처럼 박 변호사의 당내 인기는 높았다. 그러나 다음해 대선후보 경선국면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금배지가 없는 박 변호사에게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그의 부인이 한 예언 그대로였다.

-총선 승리 후 YS가 특별히 배려해주지 않았나요.

"선거가 끝나고 며칠 뒤에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 '선배님도 사모님과 함께 당선자 대회에 참석하십시오'라고 해요. 그러나 저는 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10분 후에 다시 전화가 와서 그 다음 점심 시간 때 (YS와) 따로 보자는 것입니다. 앞서 청와대 쪽에서 정무장관을 수락하라는 사전 작업이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지 않느냐'고 하니 '자꾸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연말 때 하나 더 올라가라'고 해요. 그런데 YS와 만난 당일 청와대 쪽에서는 제가 수락하지 않을 것 같다고 YS에게 보고한 것 같아요."

당시 박 변호사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정무장관이 됐었고 그해 연말에는 국무총리에까지 임명될 수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니까 YS가 '우짜면 좋겠노. 어떻게 지날려고 하노'라고 물어요. 저는 '뭐가 걱정인가요. 책 쓰고 배낭여행 다니면 되죠'라고 했는데 YS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배~낭여행'하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그럼 대통령께 부탁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뭔데'하고 물어요. 그래서 '내년에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데, 제가 '거기에 나서는 것을 재가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씽긋히 웃으면서 '오, 해라. 해야지. 해라'고 해요. 그 얘기 듣는 순간 단순 재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엔 신한국당 총재인 대통령 힘이 끝까지 갈 것이라고 예견된 상황이었습니다. 저 혼자서 청와대 계단을 걸어 내려와서 청와대 정문을 나올 때 진짜 청와대 문고리를 50% 잡은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인제나 이수성에게도 똑같이 얘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목소리의 강도로 봐서, 그리고 내가 경남중학교 후배이고 김홍조 옹과 우리 집안이 연관이 있고 분명히 나에게 출마하라고 했으니 YS가 절대로 말을 번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97년 전당대회, 줄세우기에 불과한 체육관 선거"

박 변호사는 실제로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기득권 세력의 장벽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저는 경선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여론조사를 도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구당 위원장이 대의원 명단을 써냈습니다. 그렇게 체육관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했습니다. 줄세우면 그만입니다. 민정계가 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론조사에서 박찬종이가 인기가 높으니 그게(여론조사 반영)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회창 씨가 당 대표는 대선후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상황이 달라지니까 완전히 말을 바꿨어요. 모든 신문이 사설에서 이회창 씨의 행태에 대해 비판했어요. 그런데 당시 경선에 참여한 사람들 절반 이상이 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박찬종이 되면 고려장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경선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이인제를 밀었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YS가 이인제를 지지했다고 판단했습니다. YS가 이인제로 기울었습니다. 저로서는 이회창 씨 행태가 그렇고, 이인제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기도 하고 제게 손이야 발이야 빌고하니…. 그리고 YS가 경상도 출신이고, DJ가 전라도 출신인데 충청도 젊은이가 대통령이 되면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500여 만표 나왔는데 제 덕이 큽니다. (그렇게 제가 이회창 표를 갈랐기에) DJ도 나중에 '박찬종 때문에 내가 당선됐다'고 인정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당시 이인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지만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DJ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회창이 대통령 됐다면 광주사태 몇번 났을 것"

"YS도 대통령을 했고 DJ 건강이 아직 시퍼런데 이회창이 되면 '광주사태' 같은 게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인제가 안 되고 DJ가 되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 경상도 출신이고 DJ가 건강하게 살아있는데 대통령이 안 됐다면 국민의 1/3인 전라도 사람들의 허탈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광주사태'가 몇 번 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인제가 되는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나름 순수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인제 도왔다는 이유로 중상모략 당하며 억울한 생활"

"DJ가 대통령이 됐을 때 부산 언론인들이 잘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DJ가 막상 대통령에 취임하고 보니까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 권력기관장 모두 전라도 일색으로 채워졌고 이에 대한 반발이 '박찬종이가 김대중 돈먹었다'는 식으로 터져나왔습니다. 박관용, 김무성은 생방송에서 '박찬종이 이인제를 지지한 건 김대중 돈 받았기 때문이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 뒤에 부산에서 두번 입후보 했는데 안 됐습니다. 한나라당은 제가 전라도 정권 세웠다고 만고역적이라고 했어요. 2004년 총선 합동연설 때 '저보고 한나라당이 돈 먹었다는데 제가 돈먹을 사람입니까.  제가 김대중 돈 먹을 사람입니까. DJ정권에서 잡혀들어간 대한생명 최순영이 제 사돈입니다'라면서 '박찬종이가 그렇게 미우면 저를 죽이십시오. 죽이십시오. 죽이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정의화도 그 때 맨날 제가 돈 먹었다고 했습니다.제가 그만큼 억울하게 살아왔습니다."

-대선에서 이인제를 지지했는데 나중에 거리가 멀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인제가 정치개혁을 하고 국민신당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저와의 약속을 깼습니다. 그리고 국민신당 이만섭 등이 주동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DJ 당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국민신당에서 사람들이 가니까 DJ가 '박찬종은 왜 안 오냐'면서 저를 찾았습니다. 올 줄 알았던 거지요.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만섭은 그렇게 가서 국회의장을 했습니다. 저도 만약에 갔다면 국회의장이나 국무총리가 됐을 겁니다. '전라도 대통령, 경상도 국무총리'라는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지니까요. 제가 그렇게 됐으면 위세 등등 했을 겁니다. 돈 먹었다는 중상모략도 사라지고 지금은 '전 국무총리' 직함을 달고 있겠죠."

박 변호사는 그러면서 호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호남 사람들에게 '표 좀 달라' 말할 수 있어"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2007년 4·27 보궐선거에서 신안·무안에 DJ 아들 김홍일이 출마했습니다. 저는 무소속 이재현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유세 지원을 하면서 '이건 DJ 실수입니다. 아름다운 승계가 아닙니다. 감옥 갔다 온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출마하는 건 이 지역에 대한 모욕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97년 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인제 지지해서 DJ가 당선됐습니다. DJ도 그걸 인정하고 저보고 자기당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안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DJ에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경상도에서 완전히 역적패당으로 몰렸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을 비롯해 이희호 여사까지 다 내려왔습니다. 제가 '이 사람들은 박찬종이 그렇게 (역적패당)으로 몰리고 있는데도 집권 5년 동안 저를 부른 적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박찬종 때문에 집권해서 좋은 자리에 앉은 것을 알텐데 제게 전화 한통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밤에 지원유세 할 때 '박찬종 대통령'이라고 수군데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저는 지난해 4월 보궐선거 때도 전라도 순천에 출마한 김경재 전 의원을 지원하면서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경상도 출신이지만 전라도에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박근혜가 전라도 가서 무슨 얘기를 할 겁니까. 고작, 예산 많이 주겠다는 얘기나 할 겁니다. 문재인, 김두관은 '위대한 김대중 정신'이라는 말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표 좀 주소. 못 준당가. 좀 주랑께로' 농담삼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참 서럽게 살아왔습니다."

-1997년 이회창과 2012년 박근혜 사이에 닮은 점이 있나요.

"이회창도 불소통이 문제였습니다. 이회창은 사람을 껴안을 줄 모릅니다."

-박근혜 의원의 높은 지지율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박근혜 지지율은 일종의 '트랜드'입니다. 수치 자체는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유권자 절반 이상이 투표를 안 할 텐데, 이 투표 안 하는 사람들에서도 지지율 40%가 나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의 박근혜 지지율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대신, 국민추대위가 결성되어서 제3후보가 나온다면 상당한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박근혜 의원이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요.

"박근혜, 문재인, 손학규가 대통령이 된다면 변화가 없습니다. 안철수가 민주당 후보가 되어서 대통령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여의도 정치 풍토를 못고칩니다. 정치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거대 정파의 수장이 되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미국 등에서는 정당 의미가 약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정당독재가 심화되는 모습입니다. 당권을 쥐면 정당보조금까지 좌지우지합니다. 진보당 파동 이면에는 정당보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 대표 비서실장을 국회의원이 하는 썩어빠진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지금 양대 정당에서 편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대통령이 되면 이런 잘못된 것들이 고쳐지겠습니까."

-최근 종북논란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주사파가 자생적으로 생긴 시기가 전두환 때입니다.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하는 그런 품질의 정권 하에서 차라리 김일성 정권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조직적 주사파도 투입되었겠지요. 그 때 생긴 자생적 주사파가 6·29 이후 다 전향했지요. 그런데 요즘 종북·주사파는 그렇지 않은데…. 저는 전두환이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두환이 '제가 대통령 할 때 종북·주사파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광화문 충무공 동상 앞에서 돗자리 깔고 대성통곡하면서 국민 앞에 사죄하고 '저를 밟고 주사파 논쟁을 그만두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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