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노병구를 내세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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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노병구를 내세우세요˝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9.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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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거물정치인과의 만남-1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이재형 선생과 김두환 씨의 만남

지구당 부위원장이 되고도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동지 중에 이범수 씨가 이재형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어서 종종 사직동 이재형 씨 댁을 찾아가곤 했다. 하루는 이범수 씨가 이제 부위원장도 되었으니 이재형씨에게 인사를 해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함께 가자고 해 인사를 갔다. 

이재형 선생은 나를 무척 반기면서 자주 들러 줄 것과 기왕에 정치에 발을 들여 놨으니 함께 나라의 일을 하자고 격려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범수 씨는 기왕에 왔으니 안채에 가서 사모님께도 인사를 드리자고 해 사모님께도 인사를 했는데 외모부터 부잣집 마나님 스타일로 중후해 보이고 미소 지으며 하시는 말씀도 다정다감해 이재형 선생의 오늘은 사모님의 역할이 컸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그 후 이재형 선생이 이끄는 한국정치연구회에도 가끔 나가 정치 강의를 듣고 또 그 모임에도 종종 참석하기도 했는데, 이재형 선생께서 거기 참석하는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그때부터 중앙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노병구는 이재형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정치가 무엇인지 탐구하지도 않았고 또 여러 계보가 있었는데 어떤 계보가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다만 이범수 씨를 따라서 이재형 씨 댁을 드나드는 것만으로 이재형계가 돼버렸다.  

어떻든 이승만 정부에서 약관 30대에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고 4·19라는 엄청난 정변을 격고도 용케도 살아남아 다선 국회의원이 되어 한 계보를 이끄는 거물급 정치인에게, 30대 초반인 내가 인정을 받는다는 게 싫지 않았다.

어느 날 이재형 씨 사모님이 지프차를 타고 신길동 약국으로 찾아 왔다. 사모님이 빨리 정장을 하고 나오라고 했다.

지금 시흥군 근처 몇 군데서 박재환 선생의 국회의원 후보 정견발표회가 열리는데 영감이 노병구 씨를 모시고 가서 찬조연설을 하도록 하라는 심부름으로 왔으니 가서 수고좀 해야 겠다는 것이다.

얼른 차려 입고 지프차로 가서 차 안을 들여다보니 몸집이 크고 우락부락한 중년 한 분이 미리 차에 타고 있었다.

사모님이 “ 김두한 씨에요 인사 하세요” 하고 소개를 해 돌아봤다.

“나 김두한이요, 반갑습니다.” 솥뚜껑만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김두한 씨와 지프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그 큰 손을 잡고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 걸걸한 목소리로 “노 선생, 잘해봅시다”고 했다.

연설회장에 가보니 김두한 씨가 온다는 말을 듣고 꽤 많은 청중이 모여 있었다.

입후보한 박재환 선생은 없고 사회자와 나 그리고 김두한 씨만 참가하는 연설회였다. 내가 공화당의 독재성과 부정부패를 공격하며 연설을 끝냈다. 두 번째로 김두한 씨가 등단했는데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특유의 육두문자와 음담패설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성 유권자들을 향하여 “ 여기 여자 아주머니들은 없지요” 그렇게 한바탕 청중을 웃겨 놓고 나서 느닷없이, “야, 공화당 이 새끼들아, 너희들은 죽으나 사나 잘 먹고 잘 사는 여당만 쫓아 다니냐? 이 새끼들아, 자유당 땐 자유당 하고 공화당 땐 공화당 하고 4·19로 학생들이 얼마가 죽든 아무리 독재를 하든 너희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냐? 이 새끼들아, 너희들도 애국심좀 가져봐”하며 대담한 욕설을 퍼부어도 청중은 조용했다.

그날 김두한 씨의 연설은 재미있는 만담 정도로 크게 간직할 말은 없었지만 직설적이고 진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김두한 씨의 사내다운 모습과 함께 내 가슴속에 명연설로 간직하고 있다.

영원한 나의 스승 유진산 선생과의 만남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한 신민당의 후보인 윤보선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맞붙어 치열하게 싸웠지만 관권과 금권 등 기타 여당의 기득권을 한껏 활용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승리로 야당은 정권획득에 실패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서울의 국회의원 선거구 중에 동대문 을구와 영등포 갑구만 공화당이 이기고 그 외의 선거구는 압도적인 표차로 신민당이 승리했다.

당시 영등포 갑구의 공화당 위원장은 중앙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였던 윤주영이 맡고 있었는데 치밀한 조직 관리와 남다른 열정으로 야도여촌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많은 표차로 승리해 박정희 후보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1967년 6월 8일자로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일자가 정해지고 공화당에서는 당연히 윤주영 위원장이 공천을 받았다. 주위에서는 윤 위원장의 당선이 무난할 것이라고 말들이 돌았고 정치 철새들은 윤주영에게 줄을 대려고 기웃거렸다.

따라서 신민당에서는 영등포 갑구 공천에 비상이 걸렸다.

국회의원이자 지구당위원장인 한통숙 의원은 대통령 선거 결과에 책임을 물어 공천에서 탈락됐다. 정치적으로 영등포구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유진산 선생이 신민당의 공천을 받았다.

지구당의 많은 사람들은 윤보선과 유진산이 정치적 견해가 달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윤보선이 공화당세가 강한 영등포 갑구에 정적인 유진산을 공천해 고의로 낙선시키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아는 이재형은 윤보선과 가까운 사이로 은근히 유진산을 경원하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세간에서는 유진산을 가리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하는 ‘사쿠라’라고 했다. 복덕방 등 고스톱 판에서는 화투장에 사쿠라가 나오면 “유진산 나왔다”하고 웃으며 떠드는 판이었으니 공화당의 윤주영 후보는 거의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자신만만하게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녔다.

내게도 당연히 연락이 왔다. 나도 중앙대학교 출신이고 젊은 사람 중에서는 제법 주목받는 축에 들어 윤주영이 직접 찾아와서 만났다.

“노병구는 중앙대학교 출신이고 또 유진산 하고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 않나, 그리고 요새 떠도는 얘기도(사쿠라) 있는데 노병구 같은 사람이 유진산을 밀어서 되겠나, 나 딱 한 번만 국회의원 하고 다음 번에 노병구에게 물려줄게, 이번에 내 찬조 연설을 해 줘요”하고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다.

나는 유진산의 떠도는 얘기도 마음에 걸렸지만 무엇보다 정치를 하고싶은 생각도 또 자신도 없었고 박정희의 군사정부는 더욱 싫었다.

“윤 교수님 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선거구를 내게 물려줄 생각 같은 것은 아예 마시고 만약 당선되거든 오랫동안 큰일을 하세요. 그리고 나는 유진산 씨는 아직 만나지도 않았으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저는 공화당을 위하여 선거운동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확실하게 거절하고 돌아왔다.

아마 그때 윤주영과 함께 공화당을 했더라면 30년에 가까운 군사정부 시절 나와 우리 가족은 물질적인 풍요를 만끽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고 또 실제로 일가친척이나 가까운 사람 중에는 ‘공화당을 하지, 왜 그 어려운 야당을 하며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고 권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정치를 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공화당은 더욱 싫고, 유진산의 떠도는 소문도 달갑지 않아서 약국 일과 독서실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공천 발표가 나고도 여러 날이 흘렀다.

어느 날 아침 여섯 시경 약국 덧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위급 환자인가 하고 나가보니 중앙대학교 동문인 임하수 동지가 같이 온 유진산 선생의 셋째 아들 유동열을 소개하며 지금 당장 옷을 입고 상도동에 가자고 했다.

나는 아직 세수도 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와서 무슨 소리냐고 나중에 보자고 했더니 임하수 동지가 “아버지 같은 유진산 선생이 지금 노병구를 만나기 위해 벌써 일어나셔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에 보자니 말이 되느냐” 고 해 등 떠밀려 유진산 선생 댁으로 갔다.

임하수 동지와 유동열의 말대로 들어가자마자 유진산 선생이 거처하는 방으로 직행했는데 정말 혼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유진산 선생을 처음 만나는 나는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떠돌아다니고 있는 좋지 않은 소문만을 들어 별로 좋은 인상을 갖지 않고 있었다.

모시 바지저고리를 단정하게 입고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던 유진산 선생의 첫 인상은 참으로 온화하고 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 동지, 내가 여기 온지 꽤 오래 됐는데 이제야 만나게 돼서 미안해요.”

“내가 이곳은 처음인데 이 지역 사정을 어떻게 아나, 처음 나오자마자 우선 아는 사람을 대강 만나고 다른 준비를 하다 보니 우리의 만남이 이렇게 늦어졌어요.”

“노 동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노 동지, 날 도와주소, 나하고 같이 이 선거구를 돌아다니며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멋지게 하면서 우리 한번 애국시민과 함께 진정으로 나라 일을 걱정해 보자고, 내가 오늘 노 동지를 보자고 한 거요.”
늦게 만나게 된 것을 미안해하며 진지하고 소탈하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정치에 천재요, 선거에 귀재라고 말들을 하기에 선생님은 이미 승기를 완전하게 잡고 계셔서 노병구 정도의 햇병아리 도움은 이미 생각하지 않고 계신 줄 알았는데 다시 계산을 해보니 이제 필요하게 되셨습니까?”

나는 하면하고 말면 말고 하는 장난기 넘치는 생각으로 버릇없는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껄껄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노 동지, 고마워요. 나는 이 지역 사정을 잘 몰라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도와줘요. 나는 노 동지를 믿겠어요.”

이렇게 나와 유진산 선생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사실은 유진산 선생께서 영등포에 와서 지구당 창당 대회를 마치고 그때까지도 영등포에서는 덕망 있는 지도자였던 김석원 장군을 제일 먼저 찾아가서 “형님, 내가 형님 선거구에 공천을 받고 입후보 하였습니다. 형님께서 나를 적극 도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내 연설회장에 형님께서 나오셔서 찬조연설을 해 주시던가 그게 아니면 단상에 앉아서라도 나를 지지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형님, 나 좀 살려 주십시오.”

김석원 장군은 원래 무뚝뚝하고 말이 적은 분이라 웃으며 “잘해보라”는 말만을 하고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유진산 선생은 거듭 도움을 요청하자 옆에 있던 부인 서달순 여사가 “유 의원님, 영감님은 그런데 안 나가세요. 그렇지만 노병구를 내세우세요, 그러면 우리 영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석원이 유 의원님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고 다 따라올 거예요” 하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는 말을 김 장군의 사모인 서달순 여사로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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