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김대중의 승리는 나(YS)의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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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김대중의 승리는 나(YS)의 승리입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0.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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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김영삼과 박정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유진산의 신민당 총재 취임과 김영삼 의원의 40대 기수론

1970년 2월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려 유진산, 이재형, 정일형 세분이 당수 경쟁에 나서 2차 투표에서 유진산 327표, 이재형 276표를 얻어 유진산 선생이 총재로 선출됐다.

당시 나는 송원영 선전국장 밑에 문화부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유 총재 선출 후 당직개편 때 나는 선임 서열인 공보부장에 임명됐다.

1969년 말 경, 1971년에 치러질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신민당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에 경선 후보로 나서겠다고 40대 초반인 김영삼 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선언했다.

김영삼 의원에 이어서 김대중 이철승 씨도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줄을 이어 선언하고 나섰다.

당수가 된 유진산 선생은 40대 기수론에 대해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구상유취 (口尙乳臭)”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당내 많은 노장층은 거의 유 총재와 같은 생각들을 하였지만 젊은 층이나 일반인들은 오히려 신선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40대 기수론이 신선감은 있지만 남북이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철학과 경륜을 겸비한 노련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역구에서는 유진산을 위원장으로 모시는 부위원장으로써, 중앙당에서는 선전국 공보부장자리에 있으면서 세상에서 평하는 유진산에 대한 소문은 그분의 인격과는 너무도 상반된 악선전임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전남 광주에서 서울까지 삼선개헌 반대 천리행군에 참가한 정성태 의원과 그 일행이 안양을 거처 시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당시 진산 선생의 비서실장인 신동준과 함께 박카스 몇 상자를 가지고 택시를 타고 막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정성태 의원 일행이 시흥을 지날 무렵 무장 경찰에 의해서 행군을 저지당하고 그 일행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와 신 실장은 방향을 바꿔 몸살이 나서 며칠째 요양 중인 상도동 자택으로 유 총재 문병을 갔다.

진산이 거처하는 방 창 앞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한여름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진산을 만나 모신지 몇 년이 되었지만 이처럼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자리를 함께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씀 드리고 병문안을 했다

그러면서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에 대한 언론과 세론이 왜곡된 것을 말씀드렸다. 유 총재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병구야, 정치인은 투철한 자기 철학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 책임도 당당하게 져야 하는 거야”라고 했다.

“대중에 대한 인기전술이나 사술로 정치를 하면 당장에는 박수도 받고 인기를 누릴 수는 있어도 결코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어.”

“국민은 오늘 속는 것 같지만 역사는 결코 속지를 않는 거야.”

“내가 오늘 하는 일은 투철한 나의 정치관에 입각해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책임은 10 년, 20 년 아니 멀게는 100년 후 역사가의 평가에 맡기고 그 책임과 비난도, 칭찬도 냉혹하게 받을 각오를 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야.”

“오늘 내가한 정치행위에 대한 곡해나 오해를 예상하고 소나기 사이로 비를 피해 빠져나가듯 약게 처신하려고 하면 아무 일도 못할 뿐 아니라 설사 어떤 일을 했다고 해도 일관성도 없고 더구나 나라의 역사 발전에는 해를 가져오거나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거지.”

“나는 내가 오늘 한 일에 대하여 먼 훗날 역사가의 평가에 맡기고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는 거야.”

“신문과 방송이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을 해도 나는 그것을 변명하거나 자랑 하거나 불평할 생각이 없네.”

“△변명 하지 마라 △자랑하지 마라 △불평하지 마라, 이것을 명심하게.”

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의 전기 ‘대망(大望)’을 읽은 적이 있다. 대망에서 이에야스를 가르치는 승려 스승 ‘즈이후’는“이에야스, 너는 지도자로서 ①자랑하지 마라 ② 변명하지 마라 ③ 불평하지 마라. 이 세 가지를 명심해서 살아가라”하는 대목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날 유진산 선생으로부터 그 교훈을 묵묵히 실천해 가는 것을 보았다.

변명과 자랑과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니며 거물인양 거드름을 피우는 정치인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세 가지 교훈을 묵묵히 실천하는 거목을 보았고 그 아래서 운 좋게도 큰 교훈을 받은 것이다.

인간세상에 살면서 변명과 자랑과 불평을 하지 않고 산 사람은 오직 완전한 인격을 갖춘 예수님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유진산이 그 세 가지를 모두 지키고 산 완전한 인격자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범인은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책임감이 투철했으며 국가와 국민을 위함이라면 어떠한 수모도 능히 감당하며 산분이라고 나는 확신하다.

이런 분이 대통령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런 지도자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그의 진실을 투명하게 보도하지 않은 언론 문화가 국민의 눈을 가렸다고 생각한다.

신문 사설마다 모두가 이겼다고 높이 평가한
제7대 대통령후보 지명 신민당 전당대회

1970년 9월 28일 제7대 대통령후보 경선 신민당전당대회 일자가 공고됐다.

먼저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김영삼 의원과 뒤따라 선언한 김대중, 이철승 세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
제일 야당 당수가 대통령 후보로 나올 것은 거의 상식적인 일인데 김영삼 의원의 40대 기수론 제창 때만해도 한마디로 구상유취라고 평가절하 했던 유진산 총재가 경선포기를 선언했다.

『나는 당시 당수의 위치에서 그대로 지명경쟁에 나서면 지명될 공산도 컸었다. 그러나 당인으로서 내 나름대로 민주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할 입장이라는 점과 이 제1야당의 당수 된자가 당내 정치도의가 파괴적으로 동요되는 상황속에서 대통령 후보를 경쟁한다는 것은 나의 헌정관, 나의 양심이 허락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수인 내가 대통령후보로 나설 것이라는 건 당 내외의 예견이었고 직접 많은 사람들이 후보 경쟁에 나서는 게 당연 하다고 권유를 해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야당의 존립, 야당의 시대적 사명을 두고 생각해 볼 때 대통령후보 문제만을 가지고 지나친 아집과 독선의식으로서 경쟁을 벌렸다고 할 때 예상되는 당내의상황, 또는 노소 상투(相鬪)하는 신민당의 인상을 국민 앞에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 정권교체에 있다는 사실 등을 그야말로 냉철히 고려할 때 당수인 나는 정치이성을 견지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유진산 총재 자서전, 「해뜨는 지평선」 389 페이지에서

원래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영입한 유진오 박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동으로 제외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3인이 너무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서 유진산 총재가 후보 경선에 나서지 않는 대신 후보 추천권을 위임해 달라고 세 후보에게 요청 했으나 김영삼, 이철승 두 후보는 각서를 쓰고 서명을 했지만 김대중 후보가 거부했다.

전당대회 전날인 9월27일 중앙 상무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젊고 발랄하면서 투지가 왕성해 박정희 후보와 능히 대결할 수 있는 김영삼 의원을 추천합니다”며 유진산 총재가 김영삼 지지선언을 했다.
이날 유진산의 추천을 받은 김영삼은 다음날 치러지는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었다.

도하 언론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김영삼이 결정된 듯이 보도했다.

당시 신민당의 조직분포는 최대계보인 진산계와 이재형계, 정일형계 그리고 김영삼, 이철승, 김대중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영삼은 본인의 계보 외에 최대계보인 진산계와 두 번째 계보인 이재형계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추천에서 제외된 이철승이 반발해 이탈하더라도 절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보는 결정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9월28일 전당 대회 1차 투표에서 김영삼 후보가 421표 김대중 후보가 382표로 김영삼이 제일 많은 표를 받았으나 과반수 443표에 22표가 모자라 2차 투표에 들어갔다. 원래 이철승은 김영삼 후보를 밀기로 약속을 했으나 김대중 후보가 자신의 명함에다 “소석형님, 다음 전당대회 때 당수를…”이라는 밀약 메모를 이철승에게 전달했다. 이 메모 한 장으로 이철승 후보를 밀던 대의원들이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던짐으로써 근소한 차로 과반수 득표에 성공한 김대중 후보가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영광을 차지했다.

김영삼의 승리는 거의 상식이었는데 왜 2차 투표까지 가야했나?

나는 그때 김영삼 후보를 지지해 1, 2차 투표 모두 김영삼 후보에게 표를 찍고 뜻대로 되지 않아서 무척 속이 상하고 당황했는데 제일먼저 신상 발언을 얻은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은 모두 힘을 합쳐 김대중 후보를 앞세우고 기필코 정권 교체를 이룩합시다. 이 김영삼이도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서울에서 전국 방방곡곡 무주구천동까지 선거운동에 나서겠습니다” 하는 신상 발언이 끝났을 때 대회장 안은 찬반을 초월해 떠나갈듯 한 환호와 발수갈채가 넘쳤다.

다음에 신상 발언을 얻은 유진산 총재는 “당원동지 여러분 이상할 게 없습니다. 나는 40대 기수 중에 한사람을 여러 대의원들 앞에 추천했으나 나보다도 여러분들이 더 밝은 눈을 가지고 적합한 판정을 내려준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당수의 권위가 훼손되었다 하더라도 당이 있고 당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투표결과에 전적으로 승복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뽑아준 김대중 후보를 내세워 최선을 다해 일치단결해 비록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를 하지 않은 분들일지라도 김대중 후보를 적극 밀어 기필코 승리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합시다.”

유 총재가 ‘대의원들의 눈이 나보다 더 밝아 여러분이 선택한 판정을 순수하게 승복하겠다’고 선언하자 나를 비롯해서 수많은 대의원들이 울면서 박수갈채를 보내며 주류, 비주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 되는 기쁨을 나누었다.

다음날 조간신문부터 모든 언론의 사설이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는 당선된 김대중 후보와 유진산 당수, 김영삼 후보가 넓은 아량과 포용력을 발휘해 모두가 승리한 전당대회였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고 명랑한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김대중 후보와는 대통령후보와 당수자리를 주고받기로 밀약을 하고, 유진산, 김영삼, 이철승 3인이 사전에 직접 서명까지 해 약속한 맹세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김대중 후보를 밀어 상식 밖의 이변을 낳게 한 이철승은 대선 후에 오히려 김대중으로부터 냉대를 당했다. 그때 명함에 뚜렷하게 써서 받은 김대중의 각서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철승이 유진산, 김영삼 3인이 함께 작성한 서약서에 직접 서명하고 맹서한 그 약속을 사내답게 지켰더라면 본인도 40대 기수 3인의 대열에서 밀려 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철승 개인도, 나라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재형의 변심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의 결과였다

당시 김영삼의 참모였던 김봉조 전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정치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김대중과 어떤 인연도 맺어 본적이 없던 이재형이 하루아침에 변심해 김대중을 밀었기 때문에 1차 투표에서 과반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까지 가게 됐고, 2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쪽 대의원들의 이탈로 전혀 예상치 못한 김대중의 승리로 결말이 났다.

박정희는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 걸고 정권투쟁에 앞장선 김영삼이 가장 두려웠다.
김영삼을 제거하기 위해서 박정희는 물론 중앙정보부가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정권안보를 위해서는 헌법도 없었고 합법성, 합리성, 도덕성, 민주질서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다.

다만 공작정치, 정보정치만이 그들이 소망하는 정권안보의 수단이었다.

3선 개헌 후에 치르는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이 신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면 박정희는 승산이 없었다.

신민당 대통령후보 전당대회의 예상외의 결과에 대하여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말고는 못하는 짓이 없던 중앙정보부 정치공작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작의 대상은 이재형이었다고 말이다. 얼마 후 ‘혹시나는 역시나’로 바뀌었다.

이재형은 전당대회 전에 김영삼을 밀기로 한 약속을 뒤집고, 그렇다고 김대중하고도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나 홀로’ 김대중에게 표를 던졌다.

이재형은 그 후 신민당 내에서 자기들을 보는 시선이 따가워지자 김대중과 박정희가 한참 선거운동을 하는 중간에 신민당을 탈당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 공로로(?), 이재형은 전두환 정권 시작 때인 11대와 12대 두 대에 걸쳐 국회에서 국회의장까지 하는 영광을 얻었다.

김영삼을 배제하려는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이 말기적 현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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