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YS, 유신선포하자 “내 조국과 국민을 팽개칠 수 없다”며 급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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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YS, 유신선포하자 “내 조국과 국민을 팽개칠 수 없다”며 급귀국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1.0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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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유신의 시작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8대 국회의원 선거와 5·6 파동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가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다.

공화당은 대통령선거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야당에게 대통령선거 패배의 후유증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대통령선거 개표와 결과 발표를 하면서 바로 2~3일 후인 1971년 5월 1일 자로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다고 공고했다. 선거는 5월 25일 치러진다고 발표했다.

유진산 총재는 제1야당의 당수로서 전국 각 선거구에 공천자를 내랴, 공천자들에게 지원할 정치자금 만들랴, 각 지역에 지원유세 나가랴, 시간상 정상적인 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영등포 갑 지역에 본인이 지역구후보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마침 공화당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장덕진이 영등포 갑구에 출마키로 결정이 돼 있었다. 이 때문인지 유진산 당수가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묵계가 있어 지역구를 포기할 것 이라는 등 별 이상한 모략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마침 선거구에 변경이 생겨 내가 사는 신길동은 영등포 을구로 바뀌었다. 자연히 영등포 갑구 조직에서 떨어져 나가 중앙당 일만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영등포 갑구에 속한 당원들이나 간부들과는 예나 다름없이 만나며 친하게 지내고 있어 그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유진산 총재가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나갈 경우 출마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뜻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 경쟁에 뛰어들어 장덕진과 싸워 보겠다는 생각을 하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공천권을 가지고 있는 총재이지만 막상 자신의 공천문제는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당의 원로들 중에도 당수는 당연히 전국구로 나가야 한다고 권하는 이와 당수가 지역구로 나가 지금까지 퍼지고 있는 헛소문도 잠재워야 한다는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유 당수는 난항을 거듭하자 전국구 문제를 김대중, 양일동에게 위임을 했는데 그 두 사람이 후보자 등록 마감시간이 거의 다가오도록 결정조차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등록마감 날 가지고온 상황을, 유진산 총재는 <해 뜨는 지평선> 410 페이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날도 아침 일직부터 내객은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 차례의 재촉에 10시경이 되어서야 양(梁), 김(金) 씨가 찾아왔다. 전국구 1번 김대중, 2번 유진산으로 된 명단을 보니 모두 54명이 막연한 순서로 적혀 있었고 당 원로인 박순천 여사는 35 번째 기록되어 있었다.”

후보 등록 마감날 유진산 총재는 전국구 1번으로 등록을 하고 영등포 갑구는 고대학생회장 출신이었던 6?3세대인 박정훈을 공천해 등록을 마쳤다.

그날 저녁 상도동 유진산 총재 댁은 난리가 났다. 유 총재가 전국구로 나갈 경우 그 지역 공천을 노리던 모측 사람을 중심으로 상도동 총재 댁에 몰려와 화분을 내던지고 유리창을 깨고 난동을 부렸다. 이것을 5·6파동이라고 한다.

원래 양일동이 총재는 당연히 전국구로 나가 당수로서 해야 할 산적한 일을 해야 한다고 권하는 쪽이었고 김대중도 대통령선거 종반에 기자 회견을 통하여 “당수는 전국구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해뜨는 지평선> 405페이지에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지역구에서 나 혼자 열심히 뛰어 국회의원에 당선 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중요하지만 당수된 사람의 입장에서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의 각 지역구 후보자를 도와서 다수당이 되어야 하겠다는 나의 집념이 더욱 큰 비중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전국구 문제, 선거자금 문제 등을 비롯하여 조석으로 찾아드는 동지들의 각양각색의 걱정들을 함께해야 하고 또한 당무는 당무대로 신경을 써야 했으니 내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뜻에서 고대 학생회장을 지낸 6?3세대의 대표로서 박정훈군을 영등포 갑구에 나가게 하고 나는 전국구로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나는 나를 공천하지 않은 것은 섭섭하지만 야당 당수가 지역구에 매이는 것보다 전국구를 택한 것은 적절했다고 생각했다.

이 5.6 파동으로 해서 유진산은 당수직을 사임하게 되고 당은 한바탕 소용돌이를 치면서 선거는 끝이 났다.
선거가 끝나고 당에서는 5?6 파동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중앙 상무위원회를 2~3일간 열어 그 경위를 따졌다.

제7대 대통령 선거운동을 할 때 아버지 같은 유진산 총재는 아들 같은 김대중 후보를 앞세워 지원유세를 다니며 국민적 소망인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자고 역설했을 때 많은 국민들은 박수와 갈채로 환호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김대중 후보는 “아버지 같은 고령의 우리 당수님을 모시고 젊은 내가 대통령후보의 자격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말했다.

이렇듯 조직상으로도 당수가 당연히 전국구 1번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에게 전국구 문제를 위임하자, 자기를 1번으로 쓰고 당수를 2번에 넣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전국구 문제와 관련해 당의 조사위원회와 중앙 상무위원의회에서 김대중은 “그 2번은 당수를 전국구로 공천하자는 뜻이 아니고 당수가 추천한 사람을 넣자는 것” 이라고 해명해 듣는 사람들의 실소(失笑)를 받은 일이 있었다. 2번 추천도 당수 자신의 전국구 추천이 아니고 당수는 지역구로 나가고 당수가 추천하는 다른 사람을 넣도록 배려했다는 뜻이니, 선거 때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수는 전국구로 나가야한다”고 했던 김대중의 속 다르고 겉 다른 대답이었다. 결국 김대중의 사과로 상무위원회는 끝이 났다.

유신정치의 시작

3선 개헌으로 세 번째 대통령이 된지 2년 밖에 안 된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사람들이 명치 때 써먹었던 유신이라는 말을 도용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발동하여 헌정을 중단시켰다. 또 멀쩡한 국회를 해산하고 선거구를 중선거구제로 바꾸었다. 한 선거구에서 2인의 국회의원을 뽑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해 유정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겁 없이 역사를 반전시키는 유신정치의 시작이자, 역사적 비극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반대할만한 사람은 모조리 잡아다가 두들겨 패고 심한 고문을 해 항복을 받아냈다.

야당 정치인중 거물로 불리는 인사들도 ‘유신만이 살길’이라는 구호가 박힌 어깨띠를 두르고 다녀야만 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유신을 밀고 나갔다.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등 여러 정치인이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유진산 총재는 나라에 위급이 닥쳤는데 나라 일을 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피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급거 귀국해 김포공항에서 기관원들에 의해서 연행 됐었다.

김영삼 의원도 ‘하버드 대학에서 아파트와 생활비까지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하겠다. 귀국하지 말라’는 미국의 권고를 뿌리치고“대단히 고맙지만 나는 명색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나 혼자의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 남는다는 것은 내 조국과 국민을 팽개치는 것과 다름없다”며 곧바로 귀국길에 올라 김포공항에서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김대중 의원도 일본 도쿄에 있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김대중은 한민통 등의 후원을 받아 주로 일본과 미국 등에서 반정부 운동에 전념하며 귀국을 미뤄왔다. 이에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가 일본과 외교마찰까지 유발하면서 김대중을 납치해 귀국시켰다.

김대중은 그때 박정희에 의해서 납치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국제 미아가 되어 유랑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을 것인데, 박 정권의 불법납치로 힘 안들이고 한일도 없이 반작용으로 엄청난 투쟁이나 한 것처럼 민주화 영웅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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