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쟁취의 개척자 김영삼을 추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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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쟁취의 개척자 김영삼을 추대합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3.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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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영삼 고문의 부민농장 방문으로 이천, 여주 경찰이 떠들썩

#1. 김영삼 상임고문은 나의 돼지농장에 큰 관심을 보이며 언제 목장에 가서 구경할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우태 산행대장과 상의해서 1986년 12월 4일 산행의 목적지를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트람산으로 정하고, 당시 용인·이천 민주산악회 지부장을 맡고 있던 조종익 의원과 합의해서 용인·이천 지부와 중앙본부 합동으로 산행을 하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여주 가남면에 있는 부민농장을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영삼 상임고문과 함께 서울에서 4대의 버스로 도트람산으로 향했고, 용인·이천 지부가 도트람산에서 합류해 약 300명의 회원이 모여 산행식을 했다. 전날 이계봉, 김용각 두 동지가 미리 목장에 와서 나와 함께 규격돈 두 마리를 잡아 직접 순대도 만들고 고기를 익혀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을 참가한 회원 모두에게 나눠주어 점심식사를 하도록 했다.

점심식사 후 모든 참가 회원들과 김영삼 상임고문이 부민농장을 찾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천경찰서와 여주경찰서에서 서장을 비롯한 많은 경찰들이 나와 인사도 하고 교통정리도 해서 부민농장은 일약 유명해졌다. 1000마리가 넘는 돼지와 350킬로그램이 넘는 웅돈을 보고 김영삼 상임고문과 회원들은 “이런 구경은 처음”이라고 놀라며 즐거워했다.
 
민주산악회의 전국조직과 광명시 지부 결성
 
#2. 전두환의 탄압이 극성을 부릴수록 민주산악회 전국 가 지부의 결성에 활력이 붙어 전국 유명산에는 어디를 가나 산악회 마크를 가슴에 붙인 회원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조직이 확산되어갔다. 나는 민주산악회 조직위원장으로서 다른 지역의 지부장들을 인준해주며 지부결성에 초청도 받아 축사도 하고 환대도 받으면서 바쁘게 지냈다.

1986년을 바쁘게 보내고 1987년을 맞으면서 광명시 지부장을 맡아 지부결성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여주에 부민농장을 시작한 이래 서울로, 여주로 바쁘게 다녔기 때문에 평소에 약국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나 나를 연금하기 위해 찾아오는 안양경찰서와 광명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 그리고 나의동정을 살펴서 보고하기 위해 가끔 약국에 들러 약을 사는 철산 3동 동직원들 하고만 접촉했을 뿐 순수 광명 시민들과는 별로 접촉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 상황에서 막상 지부를 결성하려고 하니 뜻 맞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지부구성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사람을 찾던 중 마침 영등포 갑구에서 신민당을 함께하다가 광명시로 이사 와서 살고 있는 심상구·성춘성 씨, 과거 시흥군 시절에 신민당에서 활동하던 강두근 씨 등을 만났다.
 
그들의 도움으로 1987년 봄 애기능에서 모두 20여 명이 모여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광명시 지부는 그 자리에서 나를 준비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첫발을 내디뎠다.

1987년 6월 중순, 광명 7동 예비군교육장에서 80여 명이 모여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지부장에 노병구를 만장일치로 선출하고, 수석 부지부장에 성춘성, 부지부장에 심상구·강두근을 선출했으며, 그 외의 간부는 회장단에 위임하여 창립총회를 무사히 마쳤다.
 
젊은 사람 중에는 유명환, 김종복 등이 참가해 주었다. 1987년에는 민주와 독재를 가르는 사건들이 줄이어 발생했다.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그해 이른 봄,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안기부와 경찰의 수배를 받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군이 체포되어 경찰의 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이것을 은폐하려고 별별 구실을 붙이다가 신문 도중 경찰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돌려댔는데, 검시를 맡았던 양심적인 의사에 의해서 타살로 밝혀져 그간의 많은 사건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작되었음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또한 분노한 국민의 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힘만으로 민의를 탄압하던 전두환은 최루탄을 마구 만들어 시민과 학생을 가리지 않고 쏘아대다가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군을 사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6·10 민주항쟁을 불러왔다.
 
그 결과 전두환, 노태우의 6·29항복(그들 말로는 이른바 6·29선언)으로 스스로 묘혈을 판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6·29 항복으로 이제 곧 민주화가 되고 군부독재는 종식될 것으로 믿고 민주산악회도 민추도 그리고 통일민주당과 많은 국민들도 80년의 봄 이상으로 새로운 희망에 들떴다.
 
그런데 지난 1986년 11월 5일, 민추공동의장 김대중 씨는 누구와도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단독기자 회견을 자청해 “직선제개헌을 받아들이면 나는 대통령선거에 나가지 않겠습니다”하고 굳게 국민에게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김대중계의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김대중 후보론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80년의 봄에도 이른바 3김씨와 최규하 씨를 비롯한 당시 집권자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각자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당했는데, 나라의 호기를 놓치는 전철을 또 밟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 창립결의대회
 
#3.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3선 개헌에 반대하고,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그의 3선 개헌 저지투쟁에 몸 바치고,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독재에도 굴하지 않고, 또 전두환·노태우의 군부독재에도 철저하게 저항하며,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외국에 나가 있다가도 감옥에 갈 각오로 망설임 없이 들어와 “어떠한 고통도 국민과 함께한다”면서 온몸으로 앞장서 싸워온 인물 김영삼.

나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 실천자요 선봉장으로서 6·29 항복을 받아내는 데 가장 뚜렷한 공로를 세운 김영삼 상임고문이 새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했다.

직선제개헌이 되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굳은 약속까지 했던 김대중 씨의 후보추대를 그의 측근들이 공공연히 퍼뜨리고 있었지만, 김영삼 의장 쪽에서는 아무도 공공연히 김영삼 의장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 나라의 민주지도자로서 김대중 씨도 대단한 분임에 틀림없었지만, 김대중 씨는 박정희의 유신선포 때 외국에 나가 있다가 귀국해서 당할 신변의 위협을 겁내서 귀국하지 않고 외국에 계속 머무르다가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강제납치로 타의에 의해서 귀국했다. 만약 납치를 당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시절 김영삼 의원은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정치인이 외국에서 편히 지낸다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인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감옥에 갈 각오로 결연히 귀국했다. 어쨌든 온몸으로 맞서 능동적으로 국사독재와 싸운 지도자는 김영삼 의장이었고, 김대중 씨는 김영삼 의장이 앞장서서 싸워 넓혀놓은 마당에, 남이 지어놓은 밥상에 수저만 들고 뛰어들어, 그것도 얌전히 먹는 것이 아니라 남도 먹기 어렵게 휘젓는 식이었다.
 
늘 소극적 내지 반사적인 효과만으로 운 좋게도 김영삼 의장과 같은 반열에 선 민주지도자였던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민주발전을 위해서는 두 분이 똑같이 필요하지만 김대중 씨는 이미 직선개헌을 조건으로 불출마선을 한 바 있고, 지금까지의 투쟁과정으로 보아 김영삼 의장이 먼저 대통령이 되고 그 다음에 김대중 씨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삼 쪽에서도 추대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추대 움직임을 보이기로 했다. 함석헌 선생의 제자이자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도 치르고 고려대학교에서 해직의 수난을 당했던 김용준 교수가 쓴「내가 본 함석헌」314~315쪽에 나오는 함석헌과 김대중 간의 일화를 여기에 옮겨본다.

벌써 사반세기가 흘러간 옛일이지만 1980년 8월 27일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것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그것은 만화요 골계이다. 나는 지금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손을 비비며 하나님이 내신 위대한 정치지도자라고 꼴불견스러운 추태를 부린 몇몇 기독계의 저명한 인사들을 연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세력은 박정희 18년 독재가 낳은 사생아”였다. 그 위대했던 전두환 대통령은 지금도 만화요 골계를 계속 연출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광주항쟁이나 당시의 정계표정을 자세히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전정권이 만화라면 그런 웃지 못할 만화를 성사시킨 당시의 3김(金)도 만화요 골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입맛이 씁쓸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날 나는 노명식 교수, 이미 타계한 조요한 교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신문의 가판이 성행하고 있었다. 노 선생이 때 마침 신문을 사서 펼치더니 별안간 “김 선생, 이것 어찌된 거야?”하며 신문을 내게 내밀었다. 신문에는 함석헌 선생님이 김대중 씨의 대통령출마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 싶어 곧바로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선생님이 직접 받으셨다.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평소와는 달리 흥분된 어조로 “큰일 낼 사람들이오. 이 노릇이 다 돈노름이오”하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셋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사연인즉 다음과 같았다.

전날에 당시 선생님 주변의 한 명사의 부인이 성명서를 들고 와서 지지서명을 해달라고 부탁드렸다는 것이다. 그 성명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원만한 합의에 의한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들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 글을 다 일고 나서 별지에 서명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음날 김대중 씨 지지서명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때 전화로 ‘돈노름’이라고 한 말씀의 내용은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다. 미주알고주알 선생님에게 캐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폭력을 휘두르던 전두환 정권의 종말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앞당겨졌고, 그해 12월 16일에는 마침내 1970년대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던 대통령 직접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민주세력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야당후보인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35.9퍼센트의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함석헌 선생은 이때 야당후보들의 분열에 몹시 환멸과 회의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대중과 김영삼 어느 후보에게도 표를 던지지 않았고 아예 투표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씨 측은 함석헌 선생이 자기 편을 드는 것처럼 위장해 언론에 흘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출마의 기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87년 9월 23일 오후 5시, 광명시 광명 7동 예비군교육장에서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 주최로 처음으로 김영삼 추대 단합대회를 개최했다.
 
그날 30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가지는 집회여서 연사나 청중이 모두 진지했다. 그때 김명윤, 김동영, 최형우, 박용만, 황명수, 서석재, 유성환, 김형광, 조종익, 명화섭, 김태룡 모두 열한 분의 연사들이 나와 열띤 연설을 했으며, 청중 또한 열광한 모처럼의 대회였다. 김영삼 추대 단합대회 후 광명 민주산악회는 급격한 활력이 붙어 서로 입회를 희망해서 입회원서를 낸 회원이 단숨에 3000명을 넘어섰다.

매주 가는 산행에도 보통 관광버스 7~8대, 많게는 15대 이상이 넘치도록 참가했다. 누가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교통비나 점심식사조차 보조하는 사람 없이 회원 누구나 한번 등산에 참가하려면 회원 1만원을 내고 그날 먹는 도시락도 각자 싸가지고 나왔다. 나같이 돈 없는 지부장을 만나 크게 대접도 못 받으면서 열성적으로 참가해준 간부 및 회원들에게 나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졌다.
 
나는 지금도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고 행운을 빈다. 산행에 참가한 회원 모두는 오직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우리는 못살지만 부정부패 없는 투명한 민주사회를 만들어, 내 대에는 아니더라도 후손에게만은 제대로 된 선진민주국가를 물려줘야겠다는 일념으로 잘못된 군사정부를 규탄하고 투쟁하며 늘 활기에 넘쳐 있었다.

광명시에서 민주화투쟁 대열에 함께했던 민주산악회 간부 및 회원들의 빛나는 이름을 여기에 옮긴다. 일부 남아 있는 기록과 아직 잊혀지지 않은 분만을 옮기면서, 그보다 더 많은 잊혀진 회원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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