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함석헌,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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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함석헌,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1.1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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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속죄론의 변증법적 변천과정-2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예수와의 인격적 합일을 속죄와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함석헌이야말로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다. 그는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함석헌으로 돌아가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함석헌은 한 마디 말로 진리 전체를 드러내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은 그가 본 사물의 어느 한 면만을 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어느 한 면만을 드러내는 이상 드러내지 못하는 다른 면은 가리어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말씀은 무한한 것이지만 말은 일면적인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한 개 말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무슨 말이든지 “그렇게도 말해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치과의원에는 福生於齒(복생어치)라 쓴 액자가 걸려있다. 나는 이 액자를 볼 때마다 이 말이 맞기는 하지만 부분적인 이치를 전체의 이치로 과장하여 표현한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가 튼튼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이만 튼튼하면 만사에 복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액자의 문구는 이만 튼튼하면 만사에 복이 있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는 뉘앙스를 풍긴다. 말은 이처럼 구체적인 상항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면이 있다. 그래서 말은 그가 본 사물의 어느 한 면만을 드러낸다는 함석헌의 말은 맞다.

함석헌은 이처럼 말의 상대성을 인정하자고 한 후에 기독교가 타력종교냐 아니냐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는다. 이 문제는 뒤집으면 구원에서 행함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우선 ‘새 시대의 종교’(3-239)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신앙이 자력이냐 타력이냐 하는 것도 옛날부터 있는 문제요, 구원이 근본에 있어서 타력적인 것이라면 타력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하는 것이 다 실생활에서 유리된 종교의 특색이다. 자(自)냐 타(他)냐가 문제 아니다. ‘믿음으로만’이라 하지만 ‘믿음으로만’이라는 믿음은 추상된 관념뿐이지 실 인생엔 그런 것 없다. 십자가도 인생을 일으키잔 십자가요 은총도 인생을 논리적으로 향상케 하는 은총일 것이지, 종교가 만일 인생을 모든 도덕적 노력에서 면제하여 눈을 모히 환자처럼 뻔히 뜨고 청천(靑天)만 우러르게 한다면, 그것은 인생을 추락시키는 것이지 결코 구원하는 도가 아니다. 그런데 신앙이라 하면 아무 인간적인 노력을 아니 하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열심 있는 순신앙(純信仰)이라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이것은 다 말기 노쇠 종교의 제3기적인 현상이다.”

흔히 기독교는 타력종교요 불교는 자력종교라고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누구의 잘못 때문이든 잘못된 것이다. 불교인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생애를 배우고 기독교인은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를 배우는 점에서 둘 다 타력종교다.

그러나 불교인은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기독교인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점에서는 둘 다 자력종교다. 두 종교의 차이는 예수와 석가모니의 차이일 뿐이다. 다만 믿음과 깨달음 중에서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고 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을 뿐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이러한 관계는 조선시대에 불교와 유학 사이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완당(阮堂) 김정희는 백파(白坡)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학과 불교에서 세상사를 말하는 방식이 왜 다를 수밖에 없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유가(儒家) 성인이 세간의 법을 절실하게 말하면서 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한 것은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이 공견(空見)에 집착할까 염려한 때문이요, 불씨(佛氏)가 출세간의 법을 절실하게 말하면서 시(是)와 비(非)를 드물게 말한 것은 세간의 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이 유견(有見)에 집착할까 염려한 것이다.”

세간의 법을 절실하게 말하는 유가도 출세간의 법을 버린 것이 아니요, 출세간의 법을 절실하게 말하는 불씨도 세간의 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완당의 견해는, 오늘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깨달음을 버린 것이 아니요,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가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로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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