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속죄론도 변증법적 변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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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속죄론도 변증법적 변천을 한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1.17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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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속죄론의 변증법적 변천과정-3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우주의 운동법칙, 그리고 인류역사의 진행과정도 변증법적으로 변천한다고 했는데, 나는 속죄론도 변증법적으로 변천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은 3개의 단계로 변천하는 주기적인 운동인데 첫 단계는 정립(定立, These), 둘째 단계는 반정립(反定立, Antithese), 셋째 단계는 종합(綜合, Synthese)이다. 누구나 대강 알고 있는 내용이지마는 현승일 전 국민대학교 총장은 그의 저서 <사회사상사>에서 이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 단계에서 오성(悟性)이 현상의 상황의 의의를 정설(定說)로 요약하고 결론짓는다. 둘째 단계에서는 처음에 내세워진 정설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서 정설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비판하고, 정설이 가진 부분적인 진리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회의(懷疑)를 제기한다. 다시 말하여 정립과 반정립 사이에는 모순과 긴장이 조성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오성이 정립의 부분적 진리와 반정립의 부정적 비판을 종합하여 현상의 상황을 좀 더 올바르게 파악한다. 즉 정립과 반정립의 부분적 진리들은 모두 종합으로 극복되어서 보다 성숙된 합체(合體)가 된다. 이 합체는 다시 새로운 주기의 정립이 되며, 정립에 대한 반정립이 생기고 다시 종합에 이른다. 이러한 정·반·합의 주기적 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속죄론이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변천해온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함석헌은 “성경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없애준다는 말만 하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복음서는 물론이고 바울서신에도 히브리서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다면 사도시대에는 그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충격이요 부활은 감격이었다.

직접 겪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감사했을 뿐이지 속죄의 이유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속죄 받은 체험이 있었다. 예수와 인격적으로 많은 접촉을 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그의 사랑을 말이 아니라 몸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흥분이 가시자 이성은 부스스 떨고 일어나서 십자가가 속죄를 하는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언제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석양에 나와서 나는 법이다. 아침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이성은 저녁때 가서야 그 의미를 이론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도시대가 지나가고 교부(敎父)시대에 들어오자 십자가가 어떻게 속죄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함석헌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속죄는 “예수의 죽음 가운데 나타난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된다는 말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 (사람의) 죄의 값을 물어주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고, 우리가 사탄에게 팔렸으므로 그 대가를 사탄에게 물어주고 속(贖)해낸 것이라는 말조차도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 말이 있어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설명만을 가지고 간단히는 아니 되는 것임을 들어내고 있다.”  

이 교부시대의 속죄이론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로 정리된 것이 가톨릭의 의화교리다. 그러나 믿음에 선행이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의화교리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으로 크게 타격을 받는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은 태풍을 만났다. 교황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고 많은 교회가 교황청의 지배에서 벗어나 루터교회가 되고 장로교회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의화교리는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일어난 예수회를 중심으로 다시 강조된다. 그들은 구원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 베드로성당을 지을 헌금을 모금하면서 선행보다는 헌금을 강조하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다시 제 길을 찾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구원은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개신교회 중에서도 최근에 와서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과 동시에 행함도 추가하는 교회가 생겨났다.

앞에서 본대로 루터교회와 감리교회가 “칭의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오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선언한 것이다.

구원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선언함으로써 실제로는 행함이 구원의 한 요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제 남은 교단은 칼빈 파 교회인 장로교회가 대표적인데 결국은 장로교회도 이 선언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에 와서 장로교회 강단에서도 “믿음만으로”구원을 받는다는 설교의 빈도가 대폭 줄어든 사실이 이를 암시한다.

그 다음에는 속죄론이 어떻게 변천할까? 물론 그것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예견해보라고 말한다면, 나는 속죄교리를 쓰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원래 속죄 여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의 문제다. 사진이나 엑스레이를 찍어 보일 수 있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고 본인이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정신의 문제다. 정신의 문제는 본인이 체험하고 나서야 알 일이지 남의 말을 듣는다고 알아지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속죄를 말하는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또는 그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스스로 속죄의 길을 터득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속죄를 말하는 성경구절은 어디서나 천편일률로 같은 것이 아니고 저자에 따라 다르고 같은 저자라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바울서신과 복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의 말이 다르고, 같은 바울서신이라도 경우에 따라 그 표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각자가 때마다 강조하고자 하는 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당초에 전도를 크게 그리고 빨리 하기 위하여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반 교리를 만들어 속죄를 설명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교리는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깊은 경지를 표현하기에는 어느 한쪽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쪽을 소홀히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각자가 구체적으로 어느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그 성경구절이 강조하는 바에 따라 속죄의 경지를 체험하는 길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행함에 이르면서 속죄를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행함에서 출발하여 믿음에 이르면서 속죄를 체험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길로 나가면서 속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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