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불법 타락 선거로 금배지 꿈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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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불법 타락 선거로 금배지 꿈 좌절"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2.03 1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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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유신의 본질-2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제9대 국회의원 출마

1973년 2월 9일자로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공천장을 받아 선거관리위원회에 입후보 등록을 마치고 선거사무장에는 상덕식을 임명했다. 상 사무장은 흑석동에 살면서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몸 바쳐 온 인사였다. 사무실 간사로는 민주당 시절부터 지구당 간사 일을 맡고 있던 김동우를, 여성부장에 주종례를 위촉하고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선거운동을 시작하자 중앙당에서 원외출신 후보에게만 주는 10만 원을 지원받고, 원근의 일가친척, 친지들로부터 성금과 물품이 적지 않게 답지했다.

장오룡 누님은 많은 돈을 선뜻 내놓으면서 더 많은 돈을 주지 못하는 것을 대단히 미안해하며 자신이 기업을 하는 사람으로 여당 쪽에 알려지면 곤란하니 우리 둘이만 알기로 했다.

왜정 시절 중국 상해에서 주먹 하나로 이름을 날리고 해방 후 귀국해 김두한과 이정재, 두 사람이 형님으로 모셨던 시라소니 선생도 내 선거 사무실을 찾아와서 격려하고 내 선거운동을 자처하고 나섰다.

시라소니 선생은 유진산 총재의 비서 겸 경호를 맡았던 이형호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었다. 나와 이형호가 친하다는 말을 듣고 나를 돕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그때는 착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교회에 집사 직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때 나를 도와주었던 분들의 이름을 거의 다 잊어 버렸는데 아는 분들 몇 분의 성함을 여기 적는다.

제재옥, 권오윤, 박건룡, 오중환, 장수익.

개인정견 발표회도 없어지고 그 넓은 지역에 합동연설회만 네 번인가 밖에 없어 주로 악수하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해야 했다. 나와 함께 다니면서 운동 기간 중 나의 빈자리를 잘도 메워준 장승훈 부장이 시종 열심히 해주었다.

유신 선거법은 선거운동원증을 가지고 있는 제한된 몇 사람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설사 운동원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운동에 제한규정이 너무 혹독해 제대로 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경찰과 공무원 기관원 등이 따라붙어 선거 사무장조차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박정희를 따르는 공화당 당원은 물론 경찰, 공무원, 학교 교사까지 총동원해 돈과 권력으로 무제한의 선거운동을 해도 되고, 야당은 입후보자 본인과 그 부인 이외에는 선거운동을 아예 못하게 하는 것이 박정희의 선거법이었다.

나는 선거사무장 보고도 오는 사람 접대나 하며 사무실이나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반면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가 권력의 무한한 보호 아래 무슨 짓이든 무법천지여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선거가 유신 선거였다.

그러니 실질적인 선거운동은 나와 처가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사무실에 들러 그날의 일정을 살피고 장승훈 동지와 함께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제가 신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병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고 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걸어 다녔다.

아내도 신길동 교회에 다니는 홍복동 권사와 최일순 이모 등과 함께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붙잡고, “이번에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병구의 아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며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가 밤늦게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사모님께서 봉천시장에서 노량진 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보고를 받고 나는 노량진경찰서 서장실로 직행했다.

“여보시오, 서장님. 내 아내가 수사 과장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되어 왔다는데 무슨 일로 연행을 했습니까?” 서장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곧 알아보겠습니다” 하고 수사과에 전화를 하고 나서 “사모님께서 선거운동원증이 없이 선거 운동을 해서 모셔다가 조사 중인데 곧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보, 서장님 어떻게 운동을 했는데 선거법 몇 조에 위반됐단 말입니까?”

“사모님께서 운동원증 없이 봉천시장을 돌며 불특정 다수인에게 ‘노병구의 아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여보, 서장님 당신 같으면 당신이 출마를 했는데 부인이 그 정도의 말도 안하고 다닌다고 하면 그걸 마누라라고 데리고 사시겠소?”

“극히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억지로 법에 걸어 탄압하지 마시오.”

“수사과장 좀 오라고 하시오. 내가 따져봐야 하겠소.”

“이것은 명백한 경찰의 선거탄압이요.”

“후보님, 지금 수사과장은 자리에 없습니다.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지금 사모님을 모시고 가십시오.”

그래서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아내와 다른 두 분을 모시고 돌아왔다.

이 일로 선거가 끝나고 3~4개월 후에 검찰청 영등포지청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나는 박한상 의원에게 사건을 맡겼는데, 소환장에 적힌 사건내용을 보고 틀림없이 무죄가 되니 나한테 맡기고 걱정을 끄라고 했다.

검찰심문이나 법원의 재판정 심문에서도 사건 내용은 “노병구의 아내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하는 똑같은 내용인데 판사는 운동원증 없이 한 선거운동이라고 판정해 아내에게 6개월 징역에 1년 집행유예를, 또 홍복동 권사에게도 운동원증 없이 불법선거운동을 하는 사람을 수행한 것이 죄가 된다고 똑 같이 6개월 징역에 1년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판결을 본 박한상 변호사와 나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고 고등법원에 상고를 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에도 양심은 없고 유신 정권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무한 권력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1심과 똑같은 2심 판결을 받은 나는 대법원까지 상고를 하자고 했는데 박한상 변호사는 정치관계에 관한한 대법원도 양심은 없고 모든 법관은 정보부의 꼭두각시임이 이 사건으로 드러났으니 더 이상 정력낭비를 하지말자고 하여 그만두었다.

3권분립은 법전이라는 책속에 인쇄되어 있을 뿐이었다. 박정희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만 있어 권력은 그의 욕심을 채우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법원도 검찰도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의 당선을 위하여 수고를 했지만 그 중에서도 봉천동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반듯하게 사시는 여성부장 주종례 여사는 보따리에 생필품을 이고 이집 저집을 샅샅이 다니면서 물건도 팔고 나의 선거 운동을 했다. 개표할 때보니 봉천동 투표구에서 다른 투표구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은 나의 지지표가 쏟아져 나와서 한 사람의 열성적인 운동원의 활동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가 있었다. 주 여사에게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18일간의 선거운동이 끝이 났다. 개표를 시작했는데 나의 개표 감시자는 한나라당 도봉구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백영기가 들어갔다. 투표함을 개함할 때마다 사전에 공화당 후보에게 기표를 한 투표용지 2~3백장씩의 묶음표가 책 다발처럼 뭉치로 쏟아져 나왔다.

투표함이 개함될 때마다 “또 나왔다”하는 백영기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개표장을 압도했다. 개표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양심은 없었다.

현직 판사가 선거관리위원장인데 민주주의를 도둑맞는 그 현장에서 도둑을 잡을 생각은 애당초 없고 ‘그 뭉치만 따로 두고 나머지 표만 계산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신 법관의 참모습이었다.

나와 백영기는 싸웠다. 몇 시간 동안 개표를 중단시키고 문제를 삼았지만 다른 후보 측과 개표 종사원,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유신정권의 위압에 눌려서 아무소리 못하고 있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말대로 빨리 개표를 끝냈으면 하는 태도였다.

언론도 잠을 잤다. 그 개표장에는 언론사 기자들도 있었을 것인데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이를 기사화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김수한 의원도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

시간은 가고 아무도 편드는 사람은 없고 어차피 나는 유진산 총재께서 사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당선이 어려운 선거였는데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유신정권이 달라질 수도 없었다. 이쯤해서 묶음표를 따로 분류시키고 개표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선배 몇 분의 권고를 받아들여 개표를 진행했는데도 그 후에도 여러 투표함에서 묶음표가 계속 쏟아져 나왔다.

9대 유신 총선거는 이름만 붙인 선거지, 유신 정권의 각본에 따른 선거였다. 법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선거무효 선고를 받고 재선거를 해야 마땅한 선거였다.

최소한의 돈으로 치른 선거였지만 넉넉지 못한 나의 경제력으로는 기둥뿌리가 빠지는 선거였다.

결과는 김수한 의원이 1위를 하고 전 보건사회부 장관 출신인 정희섭이 2위로 당선 되었다. 투사로 이름이 쟁쟁했던 김선태 전 장관이 3위 그리고 내가 김선태 씨와 별 차이 없이 4위를 하여 2만여 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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