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판을 뒤흔든 김현철의 선택…결과는
스크롤 이동 상태바
대선판을 뒤흔든 김현철의 선택…결과는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12.14 1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현철의 결단>김덕룡 정운찬 김현철, 문재인 지지로 '보수대연합' 분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 사실상 문재인 민주당 후보 지지를 밝히면서 대선판이 요동치고 있다.

새누리당은 민주동지회(YS계)-이회창-이인제-동교동계 등의 박근혜 지지를 이끌어내며 보수대연합이란, ‘빅텐트’를 만들어 냈다.

보수대연합 이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줄곧 앞서왔고, 대선전이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여졌다.

하지만 지난 10일 김덕룡-문정수-최기선 등 상도동 핵심 인사들이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YS 아들인 김현철 전 부소장마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면서 보수대연합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의 방향선회로, 대선에 승부를 가를 PK(부산 경남) 민심 향방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대선판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세운 김 전 부소장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선거전 뛰어든 김현철

▲ 김현철의 문재인 지지로 인해 대선판이 요동치고 있다. ⓒ시사오늘
‘김현철’은 아직 젊다. 우리 나이로 오십 중반이다. 그런 그가 문재인 지지라는 결단을 내린 배경은 그의 정치역정과 맞닿아 있다.

김현철은 처음부터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 1987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선전에 뛰어들자 김현철은 직장에서 나와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때문에 그의 정치이력은 거의 30여년이다.

하지만 그해 치러진 대선에서 야권분열로 승자는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상도동계 내부나 언론 등은 양김(YS와 DJ)이 분열해 야권이 패했다고 분석했으나 김현철의 생각은 달랐다.

김현철은 여론조사를 통한 과학적인 선거에서 졌고, 홍보전에서 패했다고 생각했다. 여의도연구소의 전신격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조사연구소를 김현철이 설립하게 된 동기다.

여론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론조사 기법을 선거에 도입한 선구자가 바로 김현철이다.

당시만 해도 YS나 상도동 측은 여론조사 등 과학적인 선거 전략의 중요성을 몰랐다.

그러나 김현철의 중앙조사연구소가 이듬해 총선에서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과학적인 선거 전략이 대두됐고 김현철이란 존재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중앙조사연구소는 3당합당 이후 김영삼의 정책 제안이나, 정치 행보를 과학적 여론조사를 통해 보좌해 나갔다. 이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고,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1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김현철은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든 1등 공신임에도 원내에 진입할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김현철에게는 원내에 진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인 김영삼으로부터 적극적인 출마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김현철이 고사했다. 이유는 서석재 전 의원 때문이었다. 출마를 권유받은 곳이 서 전 의원의 지역구였던 것.

1992년 YS가 대선에 출마하자, 부산 서구가 공석이 됐다. 이때 김현철은 아버지 지역구인 서구에 애착을 가졌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민정계 곽정출 의원이 공천권을 따냈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오르자 김현철은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1996년 15대 총선이 다가오자 김현철은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란 책을 출판하며 출마의지를 다졌다.

당시 김현철은 경남 거제가 지역구인 김봉조 의원을 경남지사로 보내고 그 자리에 가겠다는 전략을 짰다. 하지만 김봉조의 거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YS가 김현철 정치행보를 돕는다는 건 ‘오해’

세간에는 김영삼이 김현철의 정치입문을 돕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일이다. 

상도동계 인사들의 주장도 그렇고, 김현철 본인도 같은 주장을 한다.

상도동계의 한 원로정치인은 “YS가 김현철 때문에 박근혜를 칠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YS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솔직히 YS가 나서서 김현철을 도왔다면 벌써 원내에 진입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현철도 “내가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아버님이 적극적으로 신경을 쓴다든지 하는 건 없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서운한 점도 많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보사태의 배후자로 김현철을 기억…'오해'

아무튼 김현철은 이후에도 총선출마를 노크했지만 출마조차 못했다.

그 이면에는 한보사태가 있기 때문이다. 1997년 한보문제가 터지자 배후로 야당은 김현철을 지목했다. 여론재판을 받아 김현철은 마녀사냥식으로 구속됐다.

검찰조사결과 김현철과 한보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김현철을 구속시키기 위해 ‘조세포탈죄’라는 죄명까지 만들어 구속시켰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여상규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기소장만 봐도 이 사건은 명백히 무죄라 확신한다. 표적수사고 짜 맞추기 수사의 전형이다. 법리해석을 잘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은 그를 한보사태의 배후자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런 기억들로 인해 그는 원내에 진입하기 어려웠다.

오십 중반에 접어든 김현철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배수의 진을 쳤다. 명예회복이 필요했다. 그는 새누리당에 공천을 요구하지 않았다. 경선에 참여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공천을 관장한 박근혜와 친박계 인사들은 김현철에게 경선에 나갈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막후에서 서청원 권영세 등이 김현철 공천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김현철 문재인 지지로, 보수대연합 '균열'

공천에서 배제된 김현철은 새누리당을 탈당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상도동계 대표인사인 김덕룡 김무성 등과 함께 신당 창당을 서두르며 박근혜를 겨냥했다. 하지만 김무성의 당 잔류선언으로 그는 또다시 불출마를 선언하며 원내진입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 총괄선대본부장으로 돌아온 김무성이 ‘보수대연합’을 위해 뛰었고, 겉으로는 성사된 듯 보였다.

YS나 김종필(JP), 이회창 이인제 뿐 아니라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의 박근혜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자평했고 언론도 그렇게 받아 썼다. 승기를 박근혜가 잡은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 10일 김덕룡 등 상도동계 핵심인사들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김영삼이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일”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여기에 김현철 또한 문재인을 지지하고 나서, 보수대연합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번 대선전에 PK 지역 민심이 승부를 가를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김현철의 선택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