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YS,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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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YS,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2.20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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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김영삼과 박정희 대결-1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고흥문과 나

내가 스승으로 모셨던 참다운 지도자 유진산 총재가 돌아가신 후 신민당은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했다.

중앙당 선전국 공보부장 직을 맡고 있던 나는 사무처에 출근하면 고흥문 사무총장이 불러 “노 부장은 8대국회의원 선거 때 나의 선거구인 도봉구에 와서 찬조연설을 해주었는데 이제 노 부장의 정치적 장래는 내가 책임질 것이니 아무소리 말고 나와 함께 하자”고 졸라 나는 자연스럽게 고흥문계가 되었다.

고흥문계가 되어 나는 참으로 성심을 다해서 그의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 했다. 하지만 역시 고흥문은 유진산 총재에 비하면 정치가로서 특히 지도자로서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났다.

고흥문계가 되어 두 번의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언행과 정치적 행태로 인하여 많은 좌절을 느끼다. 지도자가 자기의 참모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도 자기의 지도자를 고르는 안목이 뚜렷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역시 그 점이 모자라는 것을 절감하고 정치를 그만두려고 경기도 여주에 가서 돼지 키우는 목장을 약 4 년 동안 운영했다.

신민당의 5.30전당대회의 역전 드라마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마포당사에서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 이철승, 이기택, 신도환 등이 당수에 도전했는데 1차 투표에서 이철승, 김영삼, 이기택, 신도환의 순으로 나왔다. 2차 투표에 들어갔을 때 이기택이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사퇴를 하고, 신도환이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를 했다. 김영삼 이철승 2인이 결선투표를 했는데 김영삼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승리해 2년 만에 당권을 되찾았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김영삼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고흥문은 이때에도 이철승을 지지했다. 따라서 고흥문 계보는 비당권파로 떨어지게 돼 내가 정치를 하겠다고 이 대열에 끼어든 후 처음으로 중앙당에 당직을 갖지 못하게 됐다.

앞서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권, 타락, 부정, 불법을 자행하고도 공화당이 68명밖에 당선이 안됐다.

반면 신민당은 61명의 당선자가 나와 의원 수에서 근소할 뿐 아니라 전국 유권자의 총득표 수에서도 공화당이 31.2%를 얻는데 그치고 신민당은 32.3%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1.1%를 더 얻어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불신임을 받았다. 신민당은 유신정권의 대체세력으로 국민의 엄청난 성원을 받은 선거 결과였다.

결국 뜻도 분명치 않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온건 자세를 취한 이철승 대표의 지도노선을 신민당 대의원들은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정권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앞장서는 김영삼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한마디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종소리였다.

김영삼은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오늘의 결의는 우리 신민당이 곧 여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수권 준비태세가 돼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최고위원으로 있던 사람들은 막후로 물러나고 이민우, 박영록, 조윤형, 이기택 네 사람이 부총재에 지명됐다.

나는 고흥문 의원과 함께 당의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평당원으로서 주로 개인생활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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