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토끼 같은 새끼 먹여 살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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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토끼 같은 새끼 먹여 살리려고 합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1.17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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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김영삼의 23일 단식투쟁-2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경찰의 연금과 양도 소득세의 감면

민주화요구 세력의 저항을 겁낸 전두환 정권은 민주세력들을 감시하기 위해 그들의 집으로 정보과 형사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정치활동 또는 사회운동을 못하도록 밀착감시를 했다. 1982년 봄 김영삼의 2차연금 무렵 안양 경찰서 정보과에서 형사 3명이 운영하던 약국으로 들어와 “이 시각부터 상부에서 별명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들은 노 위원장님과 행동을 함께 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왔습니다”며 나의 개인행동을 제한한다고 통고했다.

“약국에 계시면 영업에 지장이 있을 것이니 저희들과 같이 노 위원장님 댁으로 가 계시던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 바람이라도 쏘이러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 사람들아,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이고 법치 국가인데 아무런 명시적인 이유도 없이 나라에서 월급을 타고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치안의 임무를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 그것도 3명이나 나와서 개인의 자유를 속박 하다니 말이 되느냐?”

“그리고 나는 신림동에 살 때 조그만 빌딩을 한 채 지었는데 지난 11대 선거에 출마할 때 그 건물을 담보로 사채를 얻었소. 그 돈은 선거자금으로 모두 날려 건물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는데  남부세무서에서 2천 300만 원의 양도소득세가 부과될 것이라고 통지가 왔소. 나는 지금 살림집을 월세로 살고 있어 낼 돈도 없고 가서 사정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럼 그런 일도 보지 말란 말이요."

그랬더니 “개인적인 일까지 지장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저의가 저의 차로 남부세무서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세무서에서 나온 통지서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가서 위원장님의 일을 대신 보아 드리겠습니다.”

“나를 세무서까지 차를 태워주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내가 할 일까지 당신들이 어떻게 본단 말이요.”

“걱정 마시고 위원장님은 저희들과 같이 차에 앉아 계시고 저희 중 한 사람이 세무서에 가서 일을 마치고 오겠습니다.”

형식상 집은 팔았지만 선거자금으로 다 날리고 세금 낼 돈이 없어 담당 직원이나 세무서장을 만나 사정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대신 봐준다고 하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소환통지서를 그 중 한명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가지고 세무서에 들어간 형사가 한참만에야 돌아왔다.

“위원장님, 세금 문제는 다 해결됐습니다. 양도소득세를 부과하지 않도록 했으니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세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고맙다기보다도 참으로 허탈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부과 예정액이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인 2천 300만 원인데 한참을 깎아도 적지 않은 세금을 내야 했을 텐데, 정보과 형사의 말 한마디로 면제가 됐다니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다행한 일이었지만 헌정질서에 따라 움직여야 할 나라가 정보부의 농간에 따라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불법, 무법이 판을 치고 있으니 이 나라의 앞날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토끼 같은 새끼와 여우같은 각시 먹여 살리려고 합니다.”

“위원장님 미안합니다. 우리가 위원장님을 연금하는 것을 우린들 좋아서 합니까? 우리는 다만 토끼 같은 새끼들과 여우같은 각시 먹여 살리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는 모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족을 위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처럼 군부권력은 사람들의 목줄을 잡고 무려 32년 동안 권력을 독점해 왔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솔직해서 오히려 귀엽고 가여운 생각도 들었다. 명문대학을 나오고 학식경험이 풍부한 인사들도 먹고 살기위해, 또는 그들의 공갈 협박에 견디지 못하여, 더 약삭빠른 사람들은 부귀영화와 출세에 눈이 멀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군부에 복종했다. ‘일제시절 자발적으로 일제에 충성한 친일파들’처럼 그들 주체세력에 달라붙어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권력, 더 큰 혜택을 받았다. 거기 무슨 양심과 철학, 그리고 인격이 있겠는가.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명 강의로 존경받던 헌법학자 몇 분이 유신헌법을 만드는데 동원됐다.

그 후 그 학자들은 그 공로로 박정희의 유신정권에서 임명제 국회의원도 하고 또 높은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나 존경받는 학자로서의 존경과 명성은 끝이었다. 존경받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학생들로부터 어용교수로 낙인찍혀 수강을 거부당하고 존경과 명성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는 수천 년 내려오는 미덕도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하고 싶어 자발적으로 했겠는가, 어용교수가 그들뿐이겠는가.

수준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가족과 함께 먹고살기 위해 어용을 하지 않으면 교수로서의 생명을 지탱할 수가 없었고, 학생들로부터 어용교수라는 낯 뜨거운 말을 들으면서도 출세를 위해 양심을 팔았던 시대였다.

교수뿐 아니라 정관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군사통치에 동원돼 양심을 팔아 고위직에도 올랐다.

민주화된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중앙정보부도 대법원도 검찰도 경찰도 잘못한 과거를 사과하고 종교지도자들까지도 이유야 어떻든 독재자에게 바른말을 하지 않은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출세하고 누리면서 살아온 일부 기득권 세력은 과거를 덮기 위해 박정희 독재를 미화해, 이를 산업화라고 포장한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민주화가 됨으로써 비로소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일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자 이들은 말을 바꿔 “민주화와 산업화의 이상적 결합”이라고 하면서 지난 잘못을 합리화하고 있다. 좀 더 솔직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쏟아내는 반지성적 여론형성은 민주화가 된 지금도 현실과 미래를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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