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DJ, 김상현에 "김영삼과 함께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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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DJ, 김상현에 "김영삼과 함께하지 마라"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5.0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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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김상현의 민주화 투쟁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민주화투쟁 선언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 사명임과 민주주의는 오직 국민의 투쟁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유신독재에 대한 전(全) 민중적 합의와 열망의 표현으로 나타난 10·26 사태를 민주주의로 수렴, 승화시키지 못한 것이 12·12사태 5·17 비상 계엄조치와 광주사태, 그리고 그 후에 전개된 현 정권의 폭력과 기만에 의한 것으로서, 그 정당성과 정통성을 상실한 민족사의 치욕임을 국민과 더불어 확인했다.

현 정권은 소수의 부패한 특권층만을 위해서 절대다수 국민을 핍박하고 수탈해오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하여,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주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한다.”      

이렇게 해서 민주화운동 세력은 자연스럽게 민추로 모여들었고, 민추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나도 2차로 상임 운영위원에 발탁되어 민주산악회와 민추의 일원이 되어 군부독재 타도에 힘을 쏟았다.

김영삼 총재의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과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민주산악회의 결성,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의 발족 등이 이어졌다. 참으로 김영삼 총재의 투지와 정치력은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도록 감동시키며 힘이 되었다.

민추협은 전두환 정권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탄압과 방해로 돈을 주고도 사무실을 얻을 수가 없었다.
서울시내 모든 건물주에게 민추협에게는 절대로 사무실을 빌려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모든 건물주들이 아예 겁에 질려 있어 민추의 이름으로는 사무실 계약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원의 이름으로 사무실 임대 계약을 하고 입주를 하려고 하면 건물주는 위약금을 내고라도 해약을 하자고 애걸할 지경이었고, 사무용 집기를 실어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사무용품을 못 들여 놓게 하거나 억지로 들여 놓으면 밤중에 주인이 몰래 문을 따고 모든 집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맨바닥에 돗자리를 사다가 깔고 앉아 회의도 하고 사무도 보았다.   

전두환 정권의 엄청난 탄압에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은 날로 거세어져서 민추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갔다.
민주산악회와 민주화추진협의회의 민주화요구 시위도 거세졌다. 날로 무자비해지는 경찰의 최루탄에도 겁내는 사람 없이 잘도 싸워 나갔다.

김상현의 민주화 투쟁

박정희의 5·16 군사반란으로 나타난 군부독재정권은 탱크와 총칼 등 무력을 총동원해 국민을 탄압하고, 막대한 부정한 돈으로 국민의 혼을 빼면서 반란정권을 18년이나 끌어 오다가 10·26으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박정희의 하나회를 통하여 군부 내의 세력을 잡은 전두환 일파가 박정희가 하던 대로 정권을 이어 받아 온갖 부정 탈법 무법으로 독재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독재권력에 부당성을 역설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우리나라의 건국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수한 민주인사와 청년학생들이 싸우다가 그들의 음해 조작 불법감금 불법체포 그리고 몸서리나는 고문에 시달리다 고귀한 목숨마저 잃었다.

이렇듯 수십 년에 걸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무수한 희생은 개인 또는 분산된 소수집단 단위의 개별적인 투쟁으로는 무고한 희생만 늘어날 뿐 효과를 내기가 어려웠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1984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 4주년째 되는 날을 기하여 김영삼 총재가 정치권에서 김영삼 감대중 두 갈래로 나누어진 상태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두 계보가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여 투쟁하자고 제의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이 외국에 체류 중이어서 직접 대화가 불가능했다. 김대중의 대리격인 김상현 의원에게 그 뜻을 전했다.
김상현은 김대중 계의 지도급 인사였던 조연하 김록영 박종률 등과 상의하여 효과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의기 투함했다.

이름을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라고 짓고,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공동의장으로 하고 김대중이 귀국할 때까지 김상현이 김대중을 대리하여 공동의장 대리로 하여 민추협 조직의 모든 직책은 두 계보가 1대1로 반분하여 실무조직까지 마치고 결성했다.

드디어 정치권의 양대 계보는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추협이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여 2.12돌풍을 일으켜 전두환이 만든 형식만의 정당정치였던 여당으로 포장한 민정당과 야당으로 포장한 민한당, 그야말로 전두환의 1중대 2중대라는 무늬만의 정당정치를 단숨에 깨부수고,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은 1985년 2월 12일에 실시한 선거에서 진정한 야당 신한민주당을 선택하여 2·12돌풍을 일으켰다.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도 나라를 생각하는 진정성도 없이 오직 영웅심만으로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전두환 일파는 2·12돌풍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히 박정희로부터 이어 받은 독재적 발상을 청산하지 않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해야 한다는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시간이 없다는 구실로‘호헌’을 고집했다.

전두환은 날 새는 줄 모르고 민주화를 거부하면서 계속해서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다가 서울대학생 박종철 군을 물고문으로 죽여놓고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엉뚱한 변명과 구실로 고문 치사사건을 위장하다가 진실이 밝혀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다가 연세대학교 이한열 군을 최루탄으로 즉사하게 만들었다.

국민은 격분했고, 김영삼과 민추협은 모든 민주화 세력의 대동단결을 이끌어 구체화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그 이름으로 드디어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이름하여 6·10 민주항쟁 국민대회를 열어 드디어 노태우의 6·29항복을 받아 냄으로 써 지루하고 고달픈 민주화투쟁은 국민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빛나는 성과는 그냥 된것이 아니다.

김영삼의 민주산악회→김대중을 대리한 김상현 등이 합세한 민주화추진협의회→신한민주당→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6·10국민 대회.

이렇게 발전하며 여기 소속한 모든 민주인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한 결실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쟁취한 기회를 말로는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 걸고 투쟁한다고 ‘행동하는 양심’까지 들먹인 김대중이 민주화보다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겠다”는 야욕을 앞세워 말 같지 않은 ‘4출마필승론’을 내세워, 합심하여 전두환 노태우의 민정당을 물리치고 수권 정당을 만든다고, 김영삼 김대중 두사람이 함께 만든 통일민주당을 스스로 걷어차고,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통령후보를 함으로써 전 국민의 70%에 달하는 민주화세력을 양분하여 결과적으로 군사정권과 노태우에게 승리의 꽃다발을 안겨 주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절대다수 국민의 가슴에 패배의 쓰라림을 안겨 주었다.

노태우의 6·29항복을 이끌어낸 민주화투쟁의 과정은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과 신한민주당의 창당이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이다.

나중에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이 민추협 공동의장에, 그리고 신한민주당 상임고문에 추대 되었을 때만 해도 김대중의 민주화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확정되면서 김대중의 태도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거짓과 변명으로 민주화 세력에 불안감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 평민당을 만들면서 “행동하는 양심”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김대중의 조직 내에서 김대중을 대신해서 민주화투쟁을 진정성을 가지고 여러 번 감옥을 드나들면서 효과적인 민주화투쟁을 한 김상현 조연하 김록영 박종률 등이 김대중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나고 말았다.
나중에 나온 말이지만 김상현이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할 때 “김영삼 하고 함께 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김상현을 내쳤다고한다.

민추를 만들 때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실정은 어두웠다. 그러면서 김대중은 “김영삼하고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김영삼하고 하면 나하고는 의절이다”하고 김상현을 몰아 붙였다.

당시의 국내 정세가 양 계보의 단합이 없으면 민주화투쟁은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김상현은 조연하 김록영 박종율과 상의하여 “나중에 김대중이 귀국하면 이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김대중을 대신하여 열심히 투쟁하여 전두환 노태우의 항복을 받은 것이다. 전투 중에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중대장처럼 말이다.   
그때 민추와 신한민주당을 합심해서 만들지 않고 양분된 상태로 갔더라면 민주화는 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시 민주화세력 모두의 상식이었다.
김상현이 현장에서 김대중의 이름을 내 걸고 목숨을 내 놓고 성심을 다해서 투쟁을 했고 또 소기의 성과도 만들어 냈다.
김상현의 충성을 치하하고 외국에 있어 현장 사정을 잘 몰라 민추도 신한민주당도 하지 말라고 한 자신의 옹졸함과 미숙함을 사과하고, 민주화를 이룩한 김상현을 치켜세우고, 그와 함께 더욱 민주화의 완성을 기하자고 격려를 했어야 했는데 역시 김대중은 졸장부였고 개인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자기의 이름을 내걸고 어렵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공동의장과 상임고문자리를 만들었고, 또 실제로 김대중 자신이 귀국하여 공동의장 자리도 상임고문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권한을 행사하며 영광을 누려놓고, 오히려 김상현을 마치 배신자처럼 만들었다. 이보다 더한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는가.

김대중은 민주화 투쟁을 한다고 하면서 진정한 민주화는 방해하고 자신의 출세만을 위하여 민주화세력을 등에 업고 이용만한 위인이었다.

진정한 민주화 투쟁의 지도자는 김영삼이였고, 소위 동교동쪽의 민주화투쟁은 김대중이 아닌 김상현이 한 것으로 민주화역사에 기록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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