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신민당, 선거혁명으로 제1야당으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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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신민당, 선거혁명으로 제1야당으로 우뚝"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5.23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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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신한민주당 탄생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

국민의 거센 민주화 요구에 밀려 지금까지 부당하게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있던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1984년 11월30일자로 전두환은 크게 은전이나  베푸는 양 해금조치를 했다.

그때에도 풀리지 않은 빛나는 정치인들의 명단을 여기 옮긴다.

김영삼, 김대중, 김상현, 홍영기, 윤혁표, 김윤식, 김덕룡 등.

1985년 2월12일로 예정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화세력이 참가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고민에 휩싸였다.

그때까지 미국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인사들이 총선참여를 반대했다. 김영삼 총재와 더 많은 인사들이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1984년 12월20일 신한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게 되었다.

신한민주당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창당에 임했다.

①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폐지. 
② 김영삼 김대중 등에 대한 전면 해금 단행.
③ 조기 총선 철회와 선거 실시일 연기.
④ 자생적 민주정당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 제도적 개혁과 국민 역량 결집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민주 회복을 위해 이번 총선을 대승으로 이끌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 

이렇게 해서 1985년 1월18일 신한민주당은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는 식으로 빠르게 창당되었다.

총재에 이민우를 선출했고 나는 당의 기강을 잡는 당기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민주화운동은 돕지만 정치를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김영삼은 민주화의 붐을 조성하기 위하여 종로에 지역 기반이 전혀 없는 이민우를 입후보하도록 강권했다. 이에, 이민우는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것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느냐”고 거부했지만, 김영삼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해 할 수 없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다는 각오로 이를 수락한다고 하며 종로중구에 입후보를 했다.

김영삼과 전국에서 달려온 민주산악회 회원들의 열렬한 운동에 힘입어 국회의원 선거 사상 유례가 없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합동 유세장마다 10만이 넘는 청중이 몰려와서 마치 대통령 선거를 방불케 했다. 그 붐을 타고 전국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들이 ‘신당 돌풍’을 일으켰다. 기존 야당인 민한당을 현격한 차로 이겨 전두환에게 민주화의 쐐기를 확실하게 박아 놓았다.

그때까지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선거 4일을 남겨 놓고 2월8일, 출국한지 2년 만에 귀국해 신민당이 승리하자 신당창당에 반대하고도 무임승차해 김영삼과 함께 신민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12대 국회의원 선거후 전두환은 여론에 굴복해 그해 3월6일 김영삼 김대중 등 남은 정치규제자를 모두 해금하기에 이른다.

선거후 당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아침 일찍 전당대회장에 나갔다. 김덕룡 비서실장이 “선배님 귀 좀 빌려 주세요” 하면서 내 귀에다 입을 대고 “오늘 아침 김영삼 고문께서 오늘 전당대회에서 우리 쪽 전당대회 부의장에 노 선배를 선출하도록 하라고 지목하셨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라고 했다. 

나는 민주산악회 조직위원장에 임명됐을 때도 놀랐지만 전당대회 부의장 지명은 더욱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정당에서 전당대회는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며, 정당의 기구 중  제일 먼저 선임되는 직책이 전당대회 의장과 부의장 자리다. 그것도 계보 별로 한자리씩 돌아간다. 

그러니 김영삼 계보에 돌아오는 한자리뿐인 부의장 선임에 내가 지명된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고맙고 황송해 한동안 어리둥절해 했다. 

전당대회가 시작되고 의장 선거에 들어갔는데 의장에 송원영 의원이 선출되고 부의장은 2인을 선출 하는데 이철승계에 충북 영동 옥천 보은에서 여러 번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고 있던 최극과 내가 선출됐다.

12대 국회의원 선거후 1985년 11월15일 김영삼 상임고문은 민주산악회와 민추 외에‘민족문제 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개인사무실 문을 열었다.

나도 자동적으로 민족문제 연구소의 회원이 되어 민추 사무실로 민족문제 연구소로, 그리고 민주산악회로 돌아다니며 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민주화 투쟁에 열을 올렸다. 

민주산악회 조직도 더욱 활발해지고 민주화요구 데모도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전국에서 지식인 6천명의 민주화 요구 시국선언

개헌논의 유보를 천명한 전두환의 ‘4·13조치’ 이후, 다시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8개항을 담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78일이 걸렸다. 헌정이 실시된 후 민주화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와 투쟁이 이어온 것을 생각하면 78일만의 역사적 대전환은 오히려 빠른 변화 같기도 했다.

물론 그 78일 동안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학생시위나 여야의 정치공방은 더욱 거세어졌고, 특히 ‘박종철 군 고문 은폐 조작사건’이 터지고 ‘6·10대회’로 이어지면서 국민적 저항의 격렬함과 시국의 위기감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고조되었다. 그 78일간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조용한 움직임이 불꽃처럼 일어나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전형적인 앙가주망인 ‘지식인 시국선언’이다. 현실에 대한 참여와 저항, 혹은 투쟁의 의미로 표출된 ‘지식인의 시국선언’은 대학교수들이 시작해서 종교인, 문인들을 거쳐 사회 각 분야에 파급되며 마침내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호헌철폐와 민주화’로 집약되는 ‘지식인의 시국선언’은 ‘4·13조치’이후 ‘6·29선언’때까지 전국적으로 80여개 단체 6천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다수 지식인이 현 정권 혹은 현 체제에 반대의사를 자발적 행동으로 표현한 것은 세계의 역사에도 유례가 없다. 그리고 역사는 이 조용한 움직임이 ‘6·29선언’을 탄생케 한 결정적 역할의 하나였음을 기록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내가 사는 광명시에서는 시국선언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약사인 내 처와 관내 여약사 등 10명과 함께 모여 ‘호헌철폐, 직선제개헌’을 내걸고 시국선언을 했다. 그 명단을 여기에 적는다.

지혜숙 오행자 최명신 맹경옥 이춘지 박경옥 장춘희 임혜남 이명옥 조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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