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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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5.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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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노태우의 6·29 항복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은폐사건,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등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이 더욱 분노에 들끓어 서울 뿐 아니라 부산 광주 인천 등 대도시에서 ‘호언철폐 독재타도’의 물결에 거의 전 국민이 합세했다. 경찰의 무력진압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단체와 종교계, 노동계의 지도자들이 효과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해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를 결성했다.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1987년 6월10일 오후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서울 시청 옆에 있는 성공회에서 열었는데 무수한 전투경찰을 동원해 집회를 원천 봉쇄한다고 출입을 통제하는 과정에 김영삼 총재도 일명 경찰의 닭장차에 강제로 실려 갔고 무수한 사람들이 수없이 쏘아대는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 눈물과 콧물을 짜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날을 역사는 6·10 대회라고 쓰고, 그날 이후 매일 밤낮 없이 전두환과의 싸움은 서울 뿐 아니라 부산 광주 인천 등 거의 전국의 대도시에서 이어지다가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6월26일 백만이 넘는 시민의 행진과 대학교 교수들과 지식인들의 연이은 ‘시국선언’을 맞게 되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을 감지한 전두환 노태우는 드디어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 직선제 헌법 개정을 하겠다는 6·29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특히 7월9일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있던 날은 연세대학교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다시는 독재정권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확실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꽃다운 우리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고 나는 다짐 또 다짐을 했다.      

우리국민은 일제 36년의 나라 없는 수모를 겪었고,  6·25 동란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잔혹성을 보았다. 이승만 정권의 혹독한 탄압과 부정부패 그리고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을 일으켰을 때 얼마나 많은 꽃다운 학생들이 희생 되었던가?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고 설파한 함석헌 선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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