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김영삼 경선 제의에 김대중, '4자필승론' 내세우며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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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김영삼 경선 제의에 김대중, '4자필승론' 내세우며 탈당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5.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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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김대중의 4자필승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정치 지도자의 변명

민주화 열망으로 투쟁대열에 뛰어든 수많은 애국시민들의 소망은 전두환 노태우의 6·29 항복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직선 헌법 개정안은 1987년 10월12일 국회를 통과하고 10월27일 국민투표에 붙여져서 국민의 절대다수인 93.1%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로써 군사정부는 끝이 나고 민주화가 확실하게 이뤄졌다고 온 국민이 믿게 됐다.

문제는 김영삼 김대중 둘 사이에 단일화가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직선제 헌법을 통과시킨 민정당은 노태우 후보를 일찌감치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 놓고 사력을 다해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통일민주당과 야권에서는 대통령후보를 결정하지도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끌고 있었다.

마치 80년대 10·26 후의 정치판과 유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0·26 후에도 김대중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은 채 민주화세력을 양분시켰다. 이후 김대중은 민주화보다도 자신의 영달에 혈안이 되었다가 내란음모죄까지 뒤집어쓰고 사형선고까지 받고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전두환에게 정치를 않겠다고 살려달라는 탄원서를 써놓고 미국으로 나가 참으로 고생도 많이 하고 돌아왔다. 노태우의 6·29항복 후에도 비슷한 태도로 일관해 민주화세력과 국민에게 엄청난 불안을 안겨주고 있었다.

대통령직선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안을 받아들이면 대통령선거에 나가지 않겠다는 불출마 선언을 자기 자신이 직접 기자들을 불러 발표까지 해놓고, 막상 6·29 선언이 나오자 대통령출마 여부는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며 괴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의 지지 기반이 확실한 광주와 호남 일대를 돌면서 모여든 인파를 핑계로 그것이 국민의 뜻이라고 불출마 선언을 걷어 들였다.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50대 50의 비율로 세력을 반분해 창당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입당 절차까지 밟아놓고도 김대중은 후보단일화 작업을 특별한 사유 없이 미루어갔다.

양 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지금뿐 아니라 대선 후에까지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혹시 분당까지도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분당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얘기이며 후보 단일화는 반드시 이뤄지고, 경선도 하지 않고 합의로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후보가 결정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9월초부터 동교동계에서 김대중 후보 추대를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김대중은 후보단일화는 꼭 한다고 하면서 호남을 중심으로 한 군중집회를 하고 다녔다.
10월이 되면서 김대중은 다니는 곳마다 국민들의 지지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다고, 마치 집회에 모이는 인원을 가지고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하며 지금까지 모인 인원이 많음을 자랑했다.

부산 수영만에 모인 150만 명이 훨씬 넘는 김영삼 지지 모임

김영삼도 김대중의 아리송한 태도를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던 김영삼은 10월17일 고수부지와 야산을 합쳐 50만평이 넘는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 국민대회를 가졌다.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에서도 관광버스 여섯 대로 약 300명이 참가했는데 나는 수많은 정치 집회를 보았지만 수영만 대회처럼 인산인해를 이룬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모인 인원을 외신들조차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로 보도할 만큼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김영삼 총재는 이날 군정 종식이라는 국민 여망의 부응과 민주화 세력의 후보단일화를 역설하면서 집회 참가인원으로 한다면 김대중이 지금까지 한 달 동안 모은 인원을 모두 합쳐도, 단 한번인 오늘 수영만 추대 대회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후보단일화를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역설했다. 그 말에 모든 청중은 열광하며 속히 단일후보를 내라고 박수를 쳤다.
 

김영삼의 군정 종식에 대한 마지막 충정인 경선제의

군정종식이 대통령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또 다시 무산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김영삼는 당초 김대중이 요구한 제의를 무조건 수용한다고 10월22일 발표했다. 통일민주당은 애초에 김영삼 김대중 양쪽이 50대 50으로 세력 균형을 이루어서 창당했고, 남은 미창당 지구당 수도 동일하게 반분하자고 김영삼이 제의했으나 김대중은 창당 지구당의 경우, 김영삼 계가 더 많다는 억지주장을 펴며 미창당 지구당 중 다수를 자신이 임명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단일화가 늦어지자 김영삼은 경선패배까지도 염두에 두고 무조건 김대중 주장을 수용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나는 경선에서 지면 깨끗이 승복하고 지난날 김 고문이 신민당 후보로 나섰을 때처럼 김 고문의 선거운동에 앞장설 것이니 딴 생각 말고 군정종식만을 생각하고 경선 합시다.”
김영삼의 이런 제의에도 김대중은 묵묵부답이었다.


김대중의 4자필승론과 평민당 창당

김대중은 변명과 변신의 명수였다.

자신의 집회에 참가한 인원을 자랑하던 김대중은 김영삼의 수영만 대회를 보고, 그 어떤 이유로도 큰 소리를 칠 수 없게 됐다. 더구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소집해 정정당당하게 경선으로 후보를 뽑자는 김영삼의 제의를 받은 김대중은, 그 어떤 핑계꺼리도 없어지자 드디어 철판 깔고 1987년 10월28일 대통령 출마와 신당창당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나하고는 신민당 시절에 고흥문 계보를 함께 했고 또 2·8 동지회라는 친목모임에서 회장으로 있는 이중재 부총재가 김대중의 대선출마와 신당창당 방침을 전하기 위하여 민족문제 연구소로 김영삼 총재를 찾아왔다.

김영삼을 만나 김대중의 뜻을 전하고 나오는 이중재 의원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찼다. 나는 예감이 좋지 않아서 이중재 의원을 따라가서 “회장님 불길한 소식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힘없는 어조로 “틀렸어, 다 틀렸어. 나는 호남 사람이니 틀린걸 알면서도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어”라고 답했다.

“그럼 또 80년대처럼 다 잡은 정권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이번에야 말로 군정을 확실하게 끝낼 호기인데 합의가 어려우면 김영삼의 경선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 거부하는 겁니까? 이번에 놓치면 우리 대에서는 민주화하자는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그 책임은 김대중이 져야 합니다.”

한참을 내말을 듣고 있던 이중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도 노 국장 생각과 같아. 그런데 김대중은 자기 집 지하 방에 나와 양순직 씨 그리고 몇 사람을 앉혀 놓고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이 세 사람을 대통령선거에 나오게 해서 넷이 싸워야 자신이 틀림없이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고 역설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김대중의 4자 출마 필승론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경상남북도는 김영삼, 노태우가 나눠 갖고 충청도는 김종필이 많이 가져간다고 해도 전라남북도와 수도권은 자신이 절대 우세하고 강원도도 자신이 있다면서 이렇게 4자가 출마를 해야 꼭 당선 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가 없어. 나도 답답하고 양순직도 경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인데 어쩔 수가 없구먼. 노 국장, 이제 결과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됐어, 수고해.”

그러면서 이중재 의원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김대중이 확실하게 이기는 길은 후보 단일화가 아니라 김영삼을 꼭 출마하게 하고 내가 나가야 이긴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의 계산은 김영삼은 아예 상대가 안 된다고 보고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김대중은 기나긴 군정기간동안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운동은 했지만 언제나 김영삼이 앞장서서 이끌고 뒷전에 서 있다가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오면 이상한 변명과 변신으로 대응했다. 이토록 김대중은 민주화의 호기를 방해하는 처신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민주화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잿밥에만 생각이 있어서 결국 민주화투쟁을 한다고 자기가 만든 정당을 두 조각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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