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영삼> “상도동계 YS, 신의와 배려로 만들어져”
스크롤 이동 상태바
<내가 본 김영삼> “상도동계 YS, 신의와 배려로 만들어져”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3.22 1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천 약속해 달라’고 하자
YS,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습니다”며 정중히 사절
 
나는 1984년 8월 15일 오전 10시에 서울 하얏트호텔 커피숍에서 정채권 목사의 소개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산악회에 입회했다.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김 전 대통령이 그때 막 광복절 성명서를 발표하고 오는 길이라면서 이 군사정권은 일제 식민통치보다 더 심하게 국민을 탄압하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 말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커피숍 네 귀퉁이에는 정보원 네 사람이 앉아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 1982년 4월 1일, 민주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김덕룡, 김태룡, 박희부, 최형우, 김기수, 홍인길, 최기선 등의 모습이 보인다.

호남 출신인 내가 그 자리에 나가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3년 연초쯤이었을까, 정 목사가 나를 찾아와서 민주산악회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하자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김영삼 총재가 아직도 대통령 꿈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려면 산으로 갈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보내줘야 갈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의 항의에 나는 다시 “감옥에 갈 일을 안 하니까 안 보내는 것 아닙니까?”라고 꼬집었다.

그때 나는 김 총재가 1차 연금 1년을 당했던 사실도, 현재 2차 연금 중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신문에는 ‘시국문제’라는 단어가 오르내렸고, 입에서 입으로 김 총재의 단식투쟁 사실이 알려지더니, 서울대학교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한 후에는 거의 모든 국민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23일 간의 단식을 끝내면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나는 이제 두려움과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했다. 나는 이 선언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의 선언이 진심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1년 쯤 지났을까, 정 목사가 다시 나를 찾아와서 “이제는 됐느냐”고 물었다. 나는 두 말없이 민주산악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김 전 대통령을 그 호텔에서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나에게 “심 동지, 민주화는 멀지 않아 반드시 됩니다. 우리 함께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총재님, 우리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옳은 길이라면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정 목사는 나에게 이 기회에 미리 공천 약속을 받아놓으라고 사전에 코치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데 총재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무엇입니까”라고 묻기에 “다음에 총재님께서 정치를 다시 하시게 되면 저의 고향에서 공천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 때는 김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적 라이벌 관계이긴 했지만 같은 당 안에서의 동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호남지역이라도 양 김씨가 하는 당의 공천만 받으면 상도동계라고 해도 별 문제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건 약속할 수 없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호남 출신으로서의 희소가치를 봐서라도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약간 무안해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는 다시 이렇게 위로 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하다보면 꼭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심 동지가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 전 대통령의 말대로 그가 나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발생했다. 비록 본인은 정치규제에 그대로 묶어 있었지마는, 그래도 김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선명야당을 표방하고 출범한 신한민주당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작업의 핵심은 현역 국회의원을 많이 영입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삼 민주산악회 상임고문은 산행식에서 어제 저녁에 신순범 의원이 김상현 전 의원의 안내로 상도동에 와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지역구인 여수는 내 고향이고 내가 신한민주당의 공천을 받고 싶어 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두 다리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신 의원의 영입이 잘못된 처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서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고향에서 공천을 받고 싶다는 내 청에 김 전 대통령이 ‘알았다’라고 대답했더라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위약을 트집 잡아 그의 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 후 정당생활을 하면서 나는 “꼭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두고두고 상기했다. 그런 경우에는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었다. 이 말이 어찌 정당생활에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정치인이 모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정치인이 더 많다고 말한다면 망발이 될까? 그 말은 평범해 보이지마는 신의를 지키며 인생을 살겠다는 철학이 없으면 선뜻 나오지 않을 말이다. 철부지 정치지망생에게 자신의 인생철학을 성심껏 강의해준 김 전 대통령에게 감사한다.
 
▲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때 닭장차에 실리는 YS  

홍인길, ‘왜 ’님‘자 붙이지 않냐’고 항의하자

YS, "오늘 기도 최고였습니다”로 무마

여수에 내려가서 민주산악회 지부를 설립하기로 발기하고 발기인대표 5인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서 민주산악회 산행에 참여한 것은 10월 초순이었다. 그런데 처음 산행에 따라 나선 나는 참으로 놀라운 일에 접하게 되었다.

정상에서 산행식이라는 것을 하는데 김영삼 상임고문의 인사말 앞에 기도하는 순서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만으로 구성된 단체도 아닌데 그곳에서 기도로 공식행사를 시작하다니 한국정치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김영삼 장로가 맨 먼저 기도를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나갔을 때는 주로 정채권 목사가 대표로 기도를 했고 어떤 때는 김 장로도 기도를 했다. 때로는 외부에서 방문한 목사가 기도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산에 가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에게도 대표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986년 초라고 기억이 되는데 그날 산행에는 김영삼 장로도 정채권 목사도 모두 불참했다.

그래서 내가 장로라는 이유로 김덕룡 당시 비서실장의 권유를 받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정 목사와 내가 대표로 기도를 하게 되었고 정 목사가 민주산악회를 떠난 후에는 주로 내가 기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면 항상 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우리 총재님”이라거나 하면서 김영삼 총재를 너무 떠받든다는 점이었다. 나도 김 총재를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의식하고 기도하면 그것은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지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하는 기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총재 앞에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총재 뒤에 ‘님’자도 붙이지 않고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 앞에서 자기 남편을 지칭할 때는 ‘아비’라 한다. 시아버지가 남편보다 높기 때문에 남편을 낮춰 불러야 한다. 기자가 대통령을 지칭할 대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 기자 개인보다는 대통령이 높지만 보도를 보고 듣는 국민보다는 대통령이 낮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지 않아야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기도를 몇 차례 했는데 어느 날 산행식이 끝나자 홍인길 비서가 나에게 와서 기도할 때 왜 총재한데 ‘님’자를 붙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난감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그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궁리를 해야 했다. 마침 그 때 김영삼 장로가 나에게 와서 “장로님, 오늘 기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이제는 총재 앞에 ‘님’자를 붙이지 않은 이유를 홍 비서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때 나는 내가 정말로 기도를 잘 해서 김 장로가 나에게 치하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홍비서가 나에게 와서 무엇인가 묻는 광경을 보고, 묻는 문제가 ‘님’자에 관한 것이라 짐작하고, 나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는 내가 몇 년간 기도를 했지만 단 한 번도 내 기도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일이 없다. 그의 감사인사는 그 때가 유일하다는 사실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는 자세한 설명으로가 아니고 간단한 인사 한 마디로 나를 난처한 입장에서 구하고 홍비서의 오해도 풀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심  의 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해동화재해상보험㈜ 대표이사
국민연금관리공단 상임감사
한나라당 성북갑지구당 위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