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 'YS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라'…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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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 'YS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라'…감격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7.06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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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김영삼 제 14대 대통령에 당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제14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 1992년 12월18일로 공고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탄압받던 야당에서 오늘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 파노라마 같은 세월이 눈앞에서 지나갔다. 1980년 6월9일 첫 번째 산행 이후 1985년 신한민주당이 창당하기까지 숱한 사선을 넘어야 했다. 그 후  신한민주당의 총재가 된 이민우 초대 민주산악회 회장이 부득이 물러나고, 1985년 이후 2대 회장에 김명륜 씨가 선임됐다. 선거를 앞두고는 1992년 초부터 최형우 신임회장이 부임하면서 민주산악회 조직을 전면 개편했다. 이때 나는 조직위원장에서 연수원 원장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그해 봄부터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된 11월 중순까지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리조트와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알프스리조트, 춘천 소양강에 있는 청수장, 청주 청원군, 대구관광호텔, 경주관광호텔, 제주관광호텔 그리고 서울 관철동에 있는 민주산악회 중앙본부 강당까지 전국에 연수원을 차려놓고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전국을 오갔다. 민주산악회 중앙간부 및 광역시도 협의회와 전국의 시군지부 지부장과 간부들을 모아놓고 ‘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야하는가?’ 등 1박2일 코스로 연수를 진행했다. 진행은 전현직 국회의원과 원외위원장 40여 명에게 산악회연수원 교수로 위촉하고 그해 봄에서 여름을 거쳐 늦가을까지 전국에서 약 3만여 명에게 연수를 시키고 연수원수료증을 교부했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연수원에서 기거하느라고 내 지역인 경기도 광명시 지부는 심상구 수석 부지부장과 간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연수에서 돌아오면서 잠시도 쉴 틈 없이 남은 한 달 간도 열심히 선거운동에 몰입했다.

광명시는 민자당 광명시 지구당위원장인 김병용 의원이 공당의 선거운동을 담당하고, 사조직인 민주산악회의 선거운동은 내가 관장했다.

당시 민자당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로 일관했던 박정희에서부터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온 32년의 긴 세월동안 군부세력에 길들여진 오랜 여당 세력이 75%, 그들의 반대편에서 일관되게 반독재·군정종식을 외치면서 그들과 투쟁해온 민주화세력은 불과 25%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철학과 신념이 전혀 다른 오월동주라고나 할까, 얼기설기 모양만 갖춘 여당이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에도 다수인 75% 당원들의 열기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통일민주당 세력인 민주산악회가 비록 사조직이지만 공조직인 민자당을 앞질러 극렬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민주산악회는 전국 광역시도협의회와 민자당의 전국 지구당수와 거의 맞먹을 만큼 전국 시·군·구에 268개의 지부가 있었다. 선거유세장마다 민자당의 깃발보다도 민주산악회의 깃발이 더 많을 만큼 열기와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그러다보니 공조직인 민자당 조직과 산악회의 조직이 선거운동 경쟁을 하다가 서로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 선거자금의 대부분은 공조직인 지구당위원장이 수령하고 관리해 지구당은 넉넉한 선거자금을 썼다. 하지만 민주산악회는 중앙본부에서 약간의 지원을 받고 회원들이 각자 주머니를 털어 오직 열과 성으로 기어이 민주화를 이룩하겠다는 사명감만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광명시 민주산악회 지부는 변변한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민병권 지도위원이 광명시청 입구에 있는 자신의 소유 금산빌딩 4층에 60평짜리 번듯한 사무실도 내주고 또 종종 후원도 해 주었다.
나는 금산빌딩 10층 옥상에서 2층까지 내려간 크고 긴 민주산악회 현수막을 걸어놓고 4층 넓은 사무실에서 3천여 명의 회원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 미친 듯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거운동에 열중했다. 그래서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광명 경찰서에서 불법 선거운동을 조사한다고 나와 여러 간부들을 교대로 불러 들였다.

드디어 32년의 세월동안 갖은 박해와 불이익을 감내하며 반독재·군정종식을 외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싸워온 보람이 우리들 눈앞에 나타났다.

꿈속에서라도 들어보고 싶었던 문민대통령.

1992년 12월19일 새벽 개표가 끝이 났다.

목숨을 내놓고 시작했고 또 죽음보다 더 참기 어려웠던 모욕과 고통을 수없이 넘기면서 “민주화는 꼭 온다”고 어려움에 지치고 쓰러지려는 동지들을 위로하고 격려해가며 오늘을 이끌어 온 김영삼.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김영삼 대통령 당선.
우리 광명시 민주산악회 3,000여 명의 회원들은 김영삼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얼싸안고 울었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로부터 32년의 군정을 종식하는 이날의 감격은 광복의 감격에 필적하는 또 다른 감격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민병권 사장께 거듭 명복을 빌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날로부터 17년이 지난 요즈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산악회를 회고하면서, 만약 민산이 없었다면 민주화도, 대통령 당선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무한한 고마움을 말한다.

당선 축하의 밤

1992년 12월22일 오후 6시.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는 한복예식장 지하에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 축하의 밤 연회를 가졌다. 장소가 좁아 핵심 산악회원 300~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내와 여성간부, 여성회원들이 김밥 등 여러 가지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적은 예산으로 푸짐한 상을 차렸다. 광명시에서 사회단체를 이끌고 있는 여러분의 유지들까지 초대해 축사와 격려사를 하며 한껏 축제분위기를 고취시키고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한 산악회원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왕년의 스타 문미봉 여사까지 참석해 노래도 부르며 흥을 돋아 주었다.

광명시지부 간부 명단: 노병구저 <만세를 위하여 새벽을 열다> 471페이지에서 473페이지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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