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겸, 지역주의 넘어 대구를 점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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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지역주의 넘어 대구를 점령할까?
  • 윤명철 기자
  • 승인 2013.07.16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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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주목할 정치인(9)>"지역주의가 사라진 정치가 꿈이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 내년 대구시장 출마가 예상되는 김부겸 전 의원ⓒ뉴시스

김부겸 전 의원은 정통 TK출신이다. 명문 경북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순탄한 TK 엘리트 길을 포기하고 DJ와 노무현을 따라갔다. 대구에서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경기도에서 정치적 꿈을 펼쳐 3선의 중진이 됐다.

하지만 지난 19대 총선에서 김부겸은 더 큰 꿈을 펼치고자 안정적인 지역구인 경기 군포를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이자 死地인 대구로 돌아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40.42%의 놀라운 득표율로 의미 있는 패배를 했다. 이제 내년 대구시장선거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김부겸이 지역주의의 견고한 벽을 깰 수 있을지 많은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정통TK를 버리고 운동권 출신 야당이 되다

대구·경북(TK)은 자부심이 강한 지역이다.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넘친다.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대통령까지 4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유일무이한 지역이다. 5.16 이후 TK 인사들은 대한민국의 정계와 관계,군부를 지배했다. 그 중심에는 경북고가 있다. 박준규, 김복동, 정호용, 박철언 등 내노라하는 인사들이 경북고 출신이다. 그들은 3~6공화국을 책임졌다. 경북고-서울대 라인은 대한민국 ‘갑’의 지위를 상징했다. 경기고가 안 부러웠다. 하지만 김부겸은 그 삶을 포기했다.

김부겸은 경북고를 졸업하고 197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대학시절 대부분을 유신반대 시위로 보낸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결국 구속됐고, 2번 제적, 복학을 반복하다 1987년이 돼서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김부겸은 1977년에 유신반대시위로 처음으로 구속됐고, 제적됐다. 10·26이 터졌다. 이제 민주화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전두환의 신군부가 등장했다. 그는 1980년 ‘서울의 봄’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였다. 결국 신군부에 의해 5·17계엄령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과 제적을 당했다.

김부겸은 5~6공 정권에 계속 저항한다. 그는 민통련 간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을 거치며 투쟁했다. 1991년 ‘꼬마 민주당’에 입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DJ에게 정치를 배웠다. 95년이 되자 그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92년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DJ가 돌연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결국 민주당 분당 사태가 발생했다.

▲ 지난 총선 당시 큰 힘이 되준 딸 텔런트 윤세인ⓒ뉴시스

김부겸은 이 순간에도 의미 있는 선택을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조순 서울 시장까지 당선시켜준 국민들께 분당의 명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분당에 반대했다. (그래서)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의 이회창 총재와 민주당 조순 총재가 합당을 해버렸다. 야당투사 김부겸이 하루아침에 보수 원조 한나라당 창당멤버가 됐다. 그의 표현대로 자신의 정치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16대 총선 당시 경기 군포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국회에 처음 입성했다. 그러나 김부겸에겐 한나라당이 체질적으로 안 맞았다. 2003년이 됐다. ‘대북송금 특검 법안’에 대해 한나라당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당 지도부가 그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왕따가 됐다.

김부겸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경북 상주 출신에 경북고를 나왔는데 기왕에 간 한나라당에서 웬만하면 적응하지 않겠습니까?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제 정치적 소신이나 정책적 입장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탈당을 감행한다. 혼자가 아니었다. 이른바 한나라당 ‘독수리 오형제’가 있었다.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과 뜻과 행동을 같이 했다. 민주당을 거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김부겸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김부겸은 승승장구했다. 열린우리당 의장 비서실장, 원내수석부대표를 거치며 집권당의 샛별로 성장했다. 17대 대선에서 MB가 당선됐다. 정권이 바꿨다. 김부겸은 한나라당이 압승한 18대 총선에서 살아남는다. 3선의 중진이 됐다.

그러나 김부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2010년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체제가 된다. 손학규계의 좌장이었던 김부겸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무총장 1순위로 거론되던 김부겸에게 ‘영남출신’에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로 배제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부겸은 참담했다. 오죽했으면 같은 당 소속 동료의원 86명에게 자필로 자신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썼다. 그는 “한나라당 출신이란 낙인과 멍에를 제 어깨에서 좀 벗겨달라”고 호소했다.

▲ 19대 총선 당시 대구 출마를 선언한 김부겸 전 의원ⓒ뉴시스

김부겸, 지역주의 벽 넘고자 대구로

김부겸은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자신의 뿌리이자 적지인 대구에서 2012년 총선에 도전키로 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죽는 길이라고 말렸다. 대구에 뼈를 묻겠다던 유시민 전 후보도 2008년 실패했다.

하지만 김부겸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지역주의의 벽, 기득권의 벽, 과거의 벽을 넘기 위해 대구로 가고자 한다”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이어 김부겸은 “가치·세대·정당정치의 혁신으로 나아가기 위해 대구에서 민주당의 미래를 개척하고자 한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아성을 총선·대선의 최대 격전지로 만들겠다. 죽기를 각오하고 한나라당과 싸워 이겨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역시 TK는 민주당의 김부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40.4%라는 의미 있는 패배의 성적표를 받았다. 김부겸은 40.4%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것이 뭔가 계기가 있으면 변화에 대한 요구가 분출될 것이라고 봤다. 김부겸은 이제 지역주의를 깰 가능성을 봤다.

김부겸은 민주당에서 TK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지난달  미국으로 6개월간  공부하러 떠났다. 한 언론사에서 내년 지방선거 출마여부에 묻자 "죽을 명분이 주어지면 죽어주는 것도 맞다"고 답했다. 철옹성 같은 지역주의의 벽을 깨고싶은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가 돌아오면 새누리당 깃발만 꼽으면 당선된다는 TK의 심장 '대구‘를 점령하려고 할 것이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김부겸에게 “대구에서 도망가지 말고 계시라. 대구의 복이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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