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1)>˝나는 서민의 아들, ´한´을 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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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1)>˝나는 서민의 아들, ´한´을 품게 했다˝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0.3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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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 대신동 주차빌딩을 완공하여 대구 서문시장 활성화추진연합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음

◇즐거운 자전거, 무서웠던 말

아버지께서는 한겨울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나를 자전거 앞부분에 앉히고, 당나귀만 한 키와 몸집이 큰 ‘개’의 목과 허리에 줄을 매고 산책을 하셨다. 성주읍의 번화가 중앙지점에 위치한 우리 집을 출발하여 시장 통로를 거쳐 ‘이천’방천을 둘러 집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이 매일 아침의 일과였다. 나는 그 큰 개가 선두에 달리며 우리 일행을 끌고 가는 것이 마냥 즐겁고도 신기하기만 했다.

또한 대지주이며 인도주의자인 양조장 도재림 사장이 자기 전용 ‘말’을 타고 오후의 운동이 끝나면 마부 강 아저씨께 ‘성환을 태워주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나를 마사가 있는 곳 300m쯤 거리까지 매일 말을 태워주었던 유년의 시절이 팔십이 넘은 지금까지 긴 즐거운 추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왕따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여학생 40명, 남학생 20명으로 편성된 반에 배치가 되었다. 또 다른 60명으로 구성된 4학년의 급장인 ‘박의조’가 나에게 1년에 돈 100원, 운동화 한 켤레를 ‘상납’ 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한 ‘죄’로, 나를 제외한 19명에게 유성환과는 일체 말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져 나는 심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교실에 설치된 자치함에는 날조된 나에 대한 비행이 수시로 투서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사실이 아닌 일들이었으며 1943년 일제 강점기때였다. 담임선생님은 일본인 여선생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1,2학기 성적표의 도덕 과목에 최하위인 ‘가’를 주었다. 여학생 급장 김태희의 폭로로 모든 정황을 알게 된 히라노(平野) 선생은 방과 후 나를 남게 하고는 나를 끌어안고, “わたしがわるかった,わたしがわるかった”(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시면서 우는 것이었다. 겨울방학이 왔을 때 자기 집에 나를 불러서 갔더니 일본식 ‘떡’을 해놓고 또 “わたしがわるかった,わたしがわるかった”하며 우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스승이 제자 앞에서 우는, -꼭 자기 잘못도 아닌데 자기 잘못이라고 하는- 그 스승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며 잊을 수 없다. 나에게 돈과 운동화를 강요한 ‘어린 사회주의자’ 박의조는 일찍이 북한으로 갔다.
나는 이 사건으로 크게 두 가지를 얻었다. 나에게 말을 거는 학우가 없으니 외로워 자연히 책을 열심히 보게 되어 성적이 올랐고, 친구가 없어서 휴식시간에는 철봉을 친구삼아 하게 되어 4학년 때 벌써 大車輪(크게 앞뒤 흔들리기)을 할 수 있게 되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명월관 요리집 아들

1945년 3월 나는 초등학교 전 졸업생 중 2등으로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는 대구의 경북중학에 가기 위해서 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담임인 이덕주 선생님과 기타무라(きたむら,北村) 일본인 교장 선생의 의외의 지시로 경북 중학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대구공업중학은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되는 비행기 부속품을 만들고 있었다. 교장 말씀은 우수한 학생은 대구공업중학에 보내라는 교육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美·英을 ‘격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으며 불복하면 비국민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차로 김천중학을 지원했다. 우리 학교에서 다섯 명이 응시했다. 나는 시험에 과오나 실수 없이 잘 치렀다. 그러나 나 혼자만 낙방이었다. 나는 집에서 ‘베개’가 축축하도록 눈물을 흘렸다. 기가 죽은 나에게 당시 김천중학 5학년이었던 박일하 형(후일 미술가)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학교 교무실에 알아보니, 너는 시험 성적이 전체 수험생에서 5등인데, 합격이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형은 “학교 당국이 너의 집이 ‘명월관 요리집’ 때문에 합격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그 이유는 성주 출신(김천중학 학생 중) 박창○과 박병○등이 김천 요리집에 출입을 하여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이번에 ‘정식’ 요리집 아들이 김천중학을 지망하였으니, 학교 당국은 학생 풍기 문제 등에 영향을 끼칠까봐 유성환은 안 된다는 것이 낙방의 이유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항의나 이의신청이 없었던 시대였다. 나는 아버지의 ‘사업’이 그렇게 ‘나쁜 영업’인 줄은 전연 몰랐다. 그리고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계급’이 엄연히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어린 마음에도 이런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저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평생 내 가슴 속 깊이, 나는 서민의 아들이라는 ‘한’을 품게 하였다.

가계와 출생

1958년 음력 설날 나는 성주 대가면소재 심산(心山)선생 자택에서 외우 이윤기 군의 주선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에게 세배를 드리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재호 군과 함께 갔다. 세배를 받으신 심산 선생님은 우리의 최종 목표는 조국의 통일 독립국가라고 말씀하셨으며, 나에게는, 기계 兪氏 가문은 충의와 선비의 집안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나의 가계와 그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육신 유응부 선조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어른이 되면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우리 기계 유씨는 신라아찬(新羅阿湌) 유삼재공(兪三宰公)을 시조로 모시고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서 사육신 충목공 유응부(忠穆公 兪應孚), 선조조의 좌의정 충목공(忠穆公 兪泓), 영조조 영의정 문익공 유척기(文翼公 兪拓基), 정조조 좌의정 충문공 유언호(忠文公 兪彦鎬) 세 분의 정승을 위시하여 여러 명의 대사헌, 판서, 참판 등 문과급제(文科及第)한 98명의 명현거유(名賢巨儒)를 배출했다.

기계 유시 단성공(丹成公) 단성현감 휘 호공(중종 1522~선조 1579, 丹成懸監 諱 灝公)이 내게는 16대조(祖)이고, 입향조(入鄕祖)는 병자호란 (1636)이후 안성(安城)에서 온양신창을 거쳐 성주(지금의 고령)의 기산(箕山)에서 문중을 이루신 선교랑(宣敎郞, 從六品) 휘(諱) 항공(杭公)이시며, 내게는 13대조(大祖)가 된다. 나의 직계 선대는 농사로 근근이 살아왔으나 조부道字允字께서 농사와 소아병을 전문으로 하는 의원을 경영하셔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셨다.

나는 아버지 諱 在八, 팔룡(八龍), 어머니 휘 금조 (諱 今祚, 安東權氏 㑀射派 34代孫)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성주에서 출생했으며, 처(妻) 남영자(南永慈, 영양 南氏 松亭公派 25代孫) 아래 아들 영만(永萬)과 딸 현주(玄珠) 그리고 손(孫) 수민(受旼)과 창모(昌模), 외손(外孫) 손희목(孫喜木)이 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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