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2)>˝형사 아저씨 전기 고문하지 말고 작대기로 때려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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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2)>˝형사 아저씨 전기 고문하지 말고 작대기로 때려주이소˝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1.0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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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풍류와 의리 그리고 신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스포츠맨이었고 호걸풍의 미남자였으며, 일본 유학을 하셨다. 그러나 4~5년 일본에 계셨으면서도 어떤 졸업장도 얻지 못했으며, 귀국했을 때 가지고 온 것은 황금 메달 한 개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みやもと むさし)’의 책 한권뿐이었다고 한다. 큰 삼촌의 “증언”에 의하면 메달은 오사카(大阪)에서 일본 정종(まさむね) 마시는 전국대회에서 받은 2등상이라는 것이며, ‘미야모토 무사시’는 당신께서 갖고 온 유일한 일본책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정의감과 의협심이 대단했음은 널리 알려졌다. 가장 싫어하신 것은 강자에 비겁하게 굴복하는 남자였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한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님과 나는 요리집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따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와 동생 ‘복환’을 자주 요리집에 불러서 아버지 곁에서 자게 했다.

어느 날 일본인 경찰서장과 다하라(田原)라는 한국인 군수가 술을 마시러 ‘요리집’에 왔다. 나와 내 동생이 아버지 곁에서 마루 위에서 자고 있는데, 서장이 “しゃちょうさん このこどもたちちょっとうんばんしなさい”(이 애들 좀 운반하시오) 라고 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잔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なに にんげんを うんばん するとそんなことばがとこにあるか”(아니, 인간을 ‘운반’한다는 말이 어디 있는가?) 하시며 나와 내 동생을 번쩍 들어 그들 얼굴에 내던졌다. 그 두 사람은 나와 내 동생과 같이 넘어졌다. 아버지께서는 경위와 사리에 어긋남을 보시고는 못 참으셨다.

한번은 겨울에 낙동강을 건너가는데, 버스는 배 위에 세워 두고 손님들은 내려서 배 위에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그 혹한 속에서 뱃사공이 흰 저고리만 입고 노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야! 이 추운 날에 너 이러다가는 얼어 죽는다!” 하시며 당장 당신의 ‘속내의’를 벗어 입혔다. 하빈(달성군) 초등학교 동기생이었다. 패가한 친구, 실패한 친구, 병든 친구에 대한 아버지의 의리는 멈추지 않았다.

성주중·고

▲ 성주중학 2학년때 이정우선배와(1947)

중학 일학년 첫 방학 때, 같은 반 이만흥이 초전면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이런 여행은 처음이었다. 초전에 가자 여러 동기생들과 어울려 윷놀이, 제기차기, 팔씨름, 많이 먹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한인규, 이윤기, 성기수, 성락계, 진대유 등 오늘은 한인규 집, 내일은 이만흥 집, 실컷 먹고 장난 치고 초전면 골목골목을 다 누볐다. 놀라운 것은 이들은 이 후에 한인규는 농학박사(대한민국 한림원 원장), 이윤기는 정치학박사·국회의원, 성기수는 공학박사·대학총장, 성락계는 리학박사·대학학장, 최열곤은 법학박사·서울시교육감, 배재연은 행정학박사·대학학장으로 국가와 사회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경찰 총경이 2명, 초·중·고의 교사가 22명이 넘었다. 같은 클래스에서 국회의원도 2명 배출됐다. 성주중·고의 명사, 석학 등의 인물 배출은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3학년 때 우리는 남녀공학이었고, 예쁜 여학생이 많았다. 장난기 많은 어느 여학생이 나에게 소위 ‘연애편지’를 몇 장 보내왔다. 나는 무심코 그 여학생이 보낸 몇 장의 편지를 불쏘시개로 썼는데 우연히 아버지께서 그 편지를 주워 보시고 나를 불렀다.

“너 사람을 무시하는 것 어디서 배웠나! 더구나 여학생을! 연애를 못한다면 못한다고 깨끗이 말을 해주어야지. 그 귀한 편지를 불쏘시개로 하다니.” 야단하셨다.

나는 가끔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었지마는 이번 나무람이 가장 인상 깊었다. 아버지께서는 여성 인권을 암시했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학교 성적표를 보시고는 느닷없이 나의 머리에 알밤을 몇 대 주면서 “너 이러다가는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기르고 누더기 옷 입는 일본의 고등학생 된다.”고 야단을 치셨다. 그리고는 집에서 일보는 송 서방더러 감나무 위의 침대장치를 당장 부수라고 불호령을 하셨다. 나는 감나무 위의 가설침대에서 책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몇 번이나 읽었다. 독서를 하면서 한 편으로는 신동욱 선배의 지도로 토요일과 일요일은 축구시합을 즐겼다. 신선배의 축구실력은 뛰어났고, 그의 축구화는 대구의 큰 양화점에서 주문해 만든 것이라서 우리 모두 부러워했다. 그는 인정이 많고 후배들을 친구처럼 대해준 심성 좋고 배려가 깊은 선배였다. 후일 국회의원이 되셨다.

그리고는 집안일을 거들던 송 서방에게 마당에 철봉대, 평행봉대, 역기 등 운동기구 설치를 지시하셨다. 한편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정구(연식)을 치라고 하셨다. 중학 삼학년 때의 나의 ‘전위’ 황태성 군과 같이 ‘군’ 성인팀에 한 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 정구는 연식 정구였다. 황태성군은 저명한 야구인 황규봉 군의 삼촌이었다.

우리는 경북체육대회도 참가했다. 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께서는 가수 백년설 씨와는 친형제처럼 절친했다. 국내외에 그 명성이 대단했던 민중의 우상 백년설 씨가 그의 고향 성주에 오면 아버지께서 경영하는 성주명월관에서 성주의 지주 그리고 유지들이 모여 호화 주연을 열었다. 아버지의 큰 취미였다. 백년설 씨가 명월관에 온다 하면 소식을 들은 귀부인들이 놀랍게도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싸고 요리집을 직접 찾아와 백년설 씨의 노래를 강요했다. 주위의 권유로 백년설 씨는 한두 곡 불렀다. 한상동군과 나는 6·25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될 때 대구 고려빵집에 백년설 씨를 자주 모시고 전쟁과 남북관계 등에 대해서 선생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대구에는 전쟁고아가 많았다. 백년설 씨는 전쟁고아들을 위해 대봉동에 고아원을 설립했다. 미8군에서 한국 민중의 우상 백년설 씨가 경영하는 전쟁고아원이라고 하여 미군 장교가 직접 운전하면서 고아들의 옷가지와 음식을 운반해 왔다. 백년설 가수왕은 고아원의 2층에 방을 만들고 피난 온 많은 예술인들의 숙소를 제공하였다. 풍류와 의리와 신의에 헌신한 아버지께서는 1949년 4월 39세의 한창 젊은 연세에 뇌일혈로 작고하셨다.

전기고문

1947년 어느 날 오후 5시경, 나는 느닷없이 성주경찰서 수사계에 연행되었다. 그 때가 중학 2학년생이었다. 큰 방이 텅 비어 있었고, 책상 위에 자그마한 기구가 있었다.

신문(訊問)이 시작되었다. 성주 장터 일대에 삐라를 뿌린 것을 자복하라는 청천벽력의 강요였다. 이 형사는 사찰계의 김태욱 씨이며 김천사람이었다. 그는 27~8세 정도였다.

나는 그런 일이 없었기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김 형사는 당장 작대기를 가져오더니 나의 어깨 부분을 내리쳐 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나는 계속 아니라고 하니 그때마다 더 강하게 때렸다.

“이놈 고집이 세네. 안되겠다.” 하더니 소위 전기고문을 시작했다. 개구리를 전기에 갖다 대면 개구리는 사지를 직선으로 뻗는 것과 똑같았다. 나는 정말 겁에 질렸다. 5시에서 11시까지 때리고 전기 고문하고….

그때 낯익은 경찰 간부가 김태욱의 귀에 대고 속삭이더니 나갔다. 김은 당황함도 없이 태연히 고문을 중지했다. 기다리던 어머님과 박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고 귀가했다. 그 익일 이 사건은 이건영(중학 이학년 동기생)이 진범인데, 이건영이 유성환은 문제가 되어도 아버지가 ‘유지’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유성환이가 했다고 허위 자백한 사건이었다. 이건영은 6·25때 산 속에서 재판도 없이 불행한 일생을 마쳤다. 나의 절친한 친구 이영철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정부 수립 이전의 인권도 법치도 없던 경찰만능 시대였다.

나는 전기 고문이 심할 때 나의 ‘뇌’가 파괴된다고 생각하면서 김 형사에게 “아저씨 전기 고문하지 말고 작대기로 때려주이소”라고 호소했다. 공부해서 성공해야한다는 어린 생각에 머리를 전기고문으로 다치면 안된다는 판단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사건으로 성주경찰서장은 아버지께 몇 번이나 사과했다.

▲ 향토출신 경제인 김상구회장의 후원으로 대중의 영웅이었던 백년설 추모가요제가 저자의 고향 성주에서 개최되었다. (1993. 10)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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