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3)>따발총 내 가슴을 겨누고…"이 학생의 성분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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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3)>따발총 내 가슴을 겨누고…"이 학생의 성분이 어떻습니까?"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1.12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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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전쟁과 학문과 야망

위인들을 만나다

1950년 4월 나는 영남대학교(당시 대구대학) 초급대학 법정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나의 평생 친구이며, 후일 한국 UN외교의 거목이 된 박수길 군을 만나게 되었으며, 저명한 국문학자 양주동 교수와 서울대의 민병태 교수의 강의를 듣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대구로 피난 와서 대구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2·5 학도 결사대 조직

전쟁이 발발하자 준비 없이 방심하던 한국군은 삼일 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게 내어주고 줄곧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경찰관들 그리고 피난민들이 몰려왔다. 우리는 의사이며 반공투사인 정경택 씨의 주도로 ‘6·25학생결사대’를 조직하고 피난민들의 길안내, 응급환자 치료, 낙동강 도강 가능 여부의 정보 제공, 심한 기근자에 음식 제공 등 하루 종일 뛰었다.

그러나 성주가 ‘인민군’에 점령되기 직전 우리들도 피난길에 뛰어들었다. 우리 가족들은 낙동강 도강이 불가능한 것을 확인하고는 성주의 여러 곳을 다니며 피신을 했다. 우리가 성주읍 성산동 수비실에 있을 때였다. 결사대의 일에 열중하다가 낙동강 도강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따발총 내 가슴을 겨누고

우리 일행에게 방을 내어준 사람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배씨라는 노인이었다.

나는 낮에는 산에서 지내고, 밤이면 집에 내려왔다. 하루는, 아마 팔월 초인지, 집을 나서는데 헛간에 서울신문 한 뭉치가 있었다. 나는 산에서 읽으려고 신문 한 장을 가지고 산으로 갔다. 인민군이 오늘 내일 성주읍까지 점령한다는 말이 있을 때였다. 나는 6·25 학생 결사대에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성주”를 점령하면 나를 반동 분자로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나는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울신문 전면에 빨간 잉크의 펜글씨로 그것도 크고 투명한 글씨로 ‘역적 김일성을 잡아 죽이자!’,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날리자’ 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상황을 생각할 때 그 자리에서 신문을 찢어버릴 수도 있는데, 남의 눈치 잘 못보고 이해에 둔한 나는 그 신문을 있었던 자리에 갖다놓는다는 거의 본능적 생각으로 오후 여섯시쯤 산을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자그마한 버드나무 밑에서 인민군 두 사람이 군복 상의를 벗어들고 아마 옷 속의 ‘이’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위기다 싶어 “인민군 동무, 수고하십니다”라고 먼저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인민군이 “학생 동무, 이리 오라”고 하며 손에 든 것을 보자고 했다. 나의 손에는 영어 문법책과 서울 신문이 쥐여있었다. 서울신문을 본 그 군인은 옆에 놓인 다발총을 잽싸게 들고 나를 겨누었다. “앞에 서!” 당장 방아쇠를 당길 것 같았다. 그때 내 눈앞에 한 노인이 소에 꼴을 먹이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인민군 아저씨, 저 노인에게 제가 어떤 학생인지 물어보이소”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조건 시간벌기가 목적이었다. “아저씨, 제가 그 글을 쓴 사실이 없습니다. 그 글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학생 동무, 그걸 어떻게 누가 증명하나? 왜 거짓말 하나? 너는 우리의 국가 원수를 죽이려고 했어.” 하면서 노인 동무, 노인 동무 하고 꼴 먹이는 노인을 불렀다. 나는 마음속으로 ‘No one knows except God’이라는 영어 문장 한 구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노인이 오시자마자 그 인민군은,

“이 학생의 성분이 어떻습니까?, 어떤 학생입니까?”

“아, 그 학생은 읍의 유팔룡씨의 아들인데, 어른들께 인사도 잘하고, 또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요.”

나는 노인의 말씀이 고맙지마는 이 현장의 분위기에는 의미가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큰소리로,

“예? 성주읍에서 명월관 요리집 하는 유팔룡씨를 말하는 겁니까?”

노인은 무언가 짚은 듯, 그리고 노인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나도 이 순간 놀랐다.

“예 유팔룡씨 맞습니더. 그 분은 없는 사람들 보면 그저 지나가지 않는 사람이란 걸 읍내 사람들은 다 압니더.”

인민군은 옆의 동료에게 귓속말로 2~3분간이나 얘기하고는, “학생, 네 이름이 뭐지?”

“유성환입니다.”

인민군은 거의 흐느끼다시피, “이놈아 이 철없는 놈아, 네 동생 이름은 복환이지…”

“네? 네, 군인 아저씨”

“너의 아버지 팔룡은 나와 하빈소학교 동기야. 우리는 씨름선수였어. 우리는 죽마고우야. 내가 월북할 때도 내 딸 시집보낸다고 너의 아버지로부터 여비를 준비했단다, 나는 인민군이 아니다. 나는 최전선 유격대다. 형수님은 잘 계시냐?”

“예, 이 고개만 넘으면 어머님이 계십니다.”

“아니다. 대구 해방이 일주일 남았다. 그때 꼭 형수님을 찾아뵙겠다. 어서 집으로 가고 모든 일을 조심해라.”

주위를 살펴보니 나를 구해주신 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노인은 성주읍 이용소와 자전거방을 경영하는 정경모 씨의 부친이라고 했다. 나는 그 어른이 작고하고 난 뒤에야 그 분의 행적을 찾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께서 나의 고모와 진외가의 할머니가 미군 기총소사에 작고했다고 했다.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날 밤은 성주읍 전체가 적어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성주읍이 미군의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하에 철저히 완전 전소되었다. 내가 누워서 책 읽던 감나무와, 가설 침대의 나뭇가지도 다 타고 있었다. 요리집 하던 아버지에 대한 나의 깊은 원망도 오늘로서 불타고 있었다. 그 인민군이 아버지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짝사랑, 전화(戰火) 속에 불태우고

1950년 8월 중순경, 나는 방준석 형의 강요로 용암면 죽전동 골짜기로 피난하게 되어 꽤 높은 지대에 있는 중거동 마을을 넘어, 곰주골로 향하였는데, 상당히 높은 산을 넘어야 했었다. 양 산등성이 사이의 계곡물을 따라 곧장 올라가는데 흰 수건을 쓰고,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흰 운동화를 신은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김옥주였다. 성주 태생이며 나와 중학 동창이었다. 하늘에는 제공권을 확보한 미군 ‘구라망’ 전투기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 영남대(구대)초대생 때(1950. 12)

“옥주, 피란을 여기서 하나?”

“아! 그래, 넌 어데를 가노?”

“나, 방준석 집에 간다. 거기서 피난하려고.”

“그렇다. 거기는 하늘이 안 보이는 골짝 마을이 있제.”

전쟁이 터진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누가 죽었다, 누가 학살되었다, 누구는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누구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죽고 죽이는 죽는 얘기뿐인가 하면, 집이란 집은 다 불타버리고, 거리에서, 나무 밑에서, 동굴에서 피신해야 했던 그때, 영양실조에 흩어진 가족의 행방을 찾으며 울고 다니던 한민족 동족상잔의 전쟁이 광기를 뿜어낼 때, 산중 개울가에서 만난 옥주는 천사같이 아름다웠다.

나는 중거산 개울가에서 본 옥주가 내 가슴에 꽉 찬 이후, 사랑의 열정이 마치 고개를 처든 성난 뱀처럼 치솟기 시작하였다. 그전부터 눈여겨보았던 옥주에 대한 사랑이 나를 거의 멍한 미숙아로 변화 시키고 있었다.

미군과 아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옛 집터에 가건물을 지어 견디던 피난 생활이 거의 얼마간의 안정이 왔을 때, 우리는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자 밀회를 거듭했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옥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7~8세 된 여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옥주는 연애소설 읽는 것을 싫어했으며, 그런 것이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남동생 ‘호조’가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된 후 그의 소식을 알아서 그녀의 어머니께 알려드리려고 내가 만나자고 할 때마다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우리는 성주읍의 명승지 성주 서문 밖 숲에서 때로는 나의 고모집 과수원에서 만나곤 했다.

나는 대구에서 방학이 되어 성주에 올 때는 감히 나의 어머니보다 먼저 옥주에게 더 예쁜 선물을 했다. 7월 7석날 밤은 반드시 만난다는 ‘미팅 조약’이 발효되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호조의 경우’의 소식을 내가 아는 대로 전해 드리면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밀회가 계속 되던 어느 날 나는 서문 밖 숲에서 그녀의 동생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결심하고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무뚝뚝하게 “나는 친구로서 사귀지…사랑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조금도 실망 않고 그 후 계속해서 더 적극적인 사랑을 옥주에게 쏟아 부었다. 선물도 더 정교하고 예쁜 것으로 격을 높이고 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시와 수필’을 써서 시골 청년의 첫사랑, 나의 불타는 열정을 전달했다. 그녀만 생각하면 곧장 시가 떠오르고 수필 등 연서가 술술 쓰였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편의 시나 수필 등 답서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가을 저녁 그녀가 나를 찾아오자마자 내가 써 보낸 시와 수필을 돌려주면서 일주일 뒤에 결혼을 한다는 통고를 해왔다. 나는 멍해지면서도 미숙아처럼 그녀의 최후통첩을 온몸이 무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후에 몇 번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한, 강하고 지적인 요즘 청년들처럼 당당하게 그녀 앞에서 담뱃불을 내 뱉고 발로 질끈 밟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휙 돌아서는 그런 청년이 왜 못 되었을까? 하고 후회하곤 하였다.

그녀가 가고난 뒤 술 마시는 것을 익히지 못해, 마음만 애태우다 과수원 마당에서 방준석과 황태성에게 나의 비참한 실연을 고백하고 두 친구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이후 나의 건강은 점점 약해졌으며 한숨이 자주 나오고 되려 받은 시와 수필을 불 질러 없애는 치졸한 소인으로 변했다.

그녀가 결혼 날짜를 잡고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가 옥주를 1억이라는 양만치 사랑했으면 옥주는 나를 얼마만치 사랑했나?”

옥주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나는 사랑은 1억 분지 1도 하지 않았고 그냥 친구였었다.” 고 대답한다.

나는 옥주의 당당한 그 말에 대해서 80이 넘은 지금까지도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결혼하는 날, 나와 황태성은 기타를 가지고 옥주 집의 뒤 언덕 대밭 숲에 들어갔다. 기타와 스포츠에 재능이 뛰어난 황태성은 “성환아, 네가 좋아하는 ‘나그네 설움’을 불러라” “그래, 오늘은 백년설 아저씨보다 내가 더 서럽다”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것은 신부 옥주의 집 마당에 설치된 차일과 분주히 오고가는 하객들이었다. 집이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멀리 보이는 서문 밖 숲이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 숲에서 우리는 해마다 칠석날 밤에는 어김없이 만났었는데…….

가야산·수도산의 학도병으로

수복 후 모든 국가기관과 공무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 또 피난 갔던 면민들이 성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은 전 국토에 번졌다.

정경택 선배는 의과대학에 재학 중 군의관으로 종군하였기 때문에 이원덕 군과 배기종 선배가 중심이 되어 학생 11명이 ‘의용전투 학생대’를 자원해서 조직하고 경북도경의 지도와 성주 경찰서장의 지휘 하에 격전지인 가야산과 수도산 지대에 파견되었다. 만 19~21세의 청년 학생들이었다. 당시 성주 경찰서장은 우상봉경감으로 기억된다. 전투 목적은 주로 인민군 잔존 세력과 인민군 치하에서 공직 명함을 얻어 활약한 인사들을 무력 또는 교화로써 ‘국민화’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군인들이나 일반 경찰보다 순수한 학생들의 역할이 우수하게 평가되었다.

남부군 작가 이태에 의해서 공개한 것과 같이 산 속의 손님(공비)들은 눈 덮인 고산에서 생존하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여러 가지 지하 시설과 생활기구들을 만들었으며 극한점에 이른 인간의 생존 투쟁의 여러 가지 모습을 목격하고, 적과 아군을 넘어서 그저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산에서 만든 지하 침실과 오르목 나무로 장식된 마룻바닥과 벽 그리고 생활용구 등은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자기들 조직끼리의 통신망은 나무 옆 큰 돌 밑에 감추어둔 암호 또는 수기 연락이었다.

우리들과 군경 합동 부대는 생포한 한 사람의 협조로 공비들 100여 명이 몇 시에 어디서 모여 회의를 한다는 것을 알고 수도산 깊은 골짝을 포위하고 100m 정도 높이의 산에서 50여 명이 공비를 향해서 일제히 총을 쏘아댔다. 수천발의 총소리는 대단했다. 나는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을 것으로 예감 했다. 그러나 희생자는 없었다. 우리는 공비 한 사람을 생포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전투를 대한민국 군경의 높은 도덕성과 총포사용의 엄격한 규정을 지킨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공비가 비무장한 여성들이었고, 무장한 공비는 한 두사람 뿐이었다고 했다.

흩어져 있는 보따리를 열어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여성들 보따리는 하이힐과 화장품, 당시 유행한 유-똥치마, 남성들 보따리에는 족보와 넥타이, 구두 등이었다. 그들은 공비이며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상부에서 내려오는 보급이 엉망이었다. 우리들은 정규 예산 밖에 있었다. 우리 학생 부대는 특별 허가를 얻어 산속의 멧돼지와 노루 사냥을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을 성주 가천시장에 팔아서 쌀, 부식, 운동화, 방한모 등을 샀다. 모두가 명사수였다. 산속에 있는 사람들도 차차 자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골짝 마을엔 밤이면 공비들이 내려와 돼지를 잡고 술밥을 해먹는 것이 빈번했으나 우리들과 군경의 합리적 작전으로 일부 가야산과 수도산의 치안은 크게 호전되고 있었다. 산골짝은 유명한 “청청이 마우실”이라는 산중마을이었다.

나는 육개월 동안 가야산 준령과 수도산 형제봉에서 내 키만한 M1장총을 둘러메고 실로 무보수로 또 병역특혜도 없이 나라와 내 고장의 안전을 위해서 봉사하고 전우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1951년 3월 신학기에 등록을 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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