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4)>요강 단지를 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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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4)>요강 단지를 깨자!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1.19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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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어머님의 결단, 요리집을 식당으로

1949년 4월 아버지의 급서를 당하신 어머님께서는 대지 97평, 방 7칸, 현관과 화장실 두 칸의 큰 집을 인수받으셨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반대를 듣지 않으시고 그 큰 집을 여관과 식당으로 개업하셨다. 나는 이 집을 정리해서 대구에 나가 큰 책방을 열어보자고 주장 했으나 어머님은 듣지 않으셨다. 나는 김천중학 입시의 눈물을 잊지 않고 있었으나 어머님의 뜻을 받들기로 했다. 그러나 개업한지 불과 일 년 만에 6·25전쟁이 터졌으며, 전쟁 2개월여 만에 우리집을 포함한 성주읍은 미군의 전술상 폭격으로 전소되었으며 집을 복구하는 데는 일년이 걸렸으며,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복구에 드는 경비는 컸다.

어머님께서는 97평 중 20평을 매각한 돈을 건축 계약금으로 지불하셨다. 다시 방 다섯 칸과 현관과 주방 2칸의 집을 지으셨다. 20평을 매입한 사람이 그 자리에 쇠고기점을 개업했다. 나는 어머님의 집안 운영방침을 적극 지지했다.

영대 초대(高校 2·3학년 과정)에 등록을 하고 크게 상심했다. 나의 친구 박수길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교무실 학생과에 알아보니 최전선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해 긴장감이 들고 무운을 빌었다. 많은 학우들이 전선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봉산동 환경이 조용한 집에 하숙을 하면서 밤 1시까지 공부하고 2~30분간 냉수마찰을 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초급대학 2년간을 전쟁과 학문 그리고 실연의 고통 속에서 보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양주동 교수의 강의다. 국문학 강의를 하셨지만 나에게 강의의 내용을 묻는다면 그것은 국문학이 아니라 ‘인류사’, ‘문학사’, 그리고 ‘한국사’였다. 나는 실로 양주동 교수의 강의를 듣고 한마디로 ‘개안’을 체험했다. 민병태 교수의 강의는 너무 어려워 민 교수의 학점을 딴 학생은 한두 사람이었다. 영대초대(고교 상급 과정)법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날, 10代 진사이고, 만석의 거부이면서, 언제나 가난한 서민과 애환을 합께 했으며, 일제가 이 땅을 강점 했을 때 상해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보낸 최준 이사장으로부터 상장을 받은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 김수한 위원장과 저자 (부위원장)

영남대학교 수석 입학

대봉동의 교사가 군부대에 의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체국 앞의 가교사에서 공부할 때 였다. 내가 영대 수석입학을 했을 때, 그 가교사 높은 벽에 내 이름과 성락윤 군, 최형 군, 세 사람의 이름이 붓글씨로 크게 광고됐다. 우리 셋은 친한 학우가 되었다. 내가 입학생 대표 선서를 했는데, 김수한(후일 국회의장)선배가 나를 격려해주었다. 내가 선거에 출마했을 때 김수한 선배는 찬조 연설까지 해주셨다.

3학년 때였다. 고시 공부를 중점으로 하던 나를 저명한 형법 교수이며 후일 공화당 당의장을 역임한 백남억 교수가 “자네, 이번 학생회장에 출마하게”라는 뜻밖의 말을 했다. 당시 껄렁한 학생 몇 사람이, 당시의 명칭으론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인 학생회장 출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순간이 내 앞길에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당시 영대 학도호국단장은 호국단비 사용의 내역을 공표하지 않았으며, 영대신문도 없었다. 나는 출마를 결심하고 즉시 운동에 나섰다. 학구파와 시골서 온 학생들의 뜨거운 지지로 압승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나는 선배들의 자문을 받고 각 학년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대의원 대회에서 예산 편성과 수입과 지출을 공개했다. ‘영대신문’을 창간했다. 우리 학생 간부들은 창간호 신문 뭉치를 안고 축하파티를 삼류 요정에서 했다. 너무나 기뻐서 우리는 과음과식하고, 예산 초과의 파티가 되어 창간호 신문을 그 음식점에 압수당하고야 그 집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진정한 스승 상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이종하 학생처장이 그 신문을 찾아주셨다.

나는 영대 신문 창간호를 내고 수개월 뒤에는 ‘두가지 사명’과 ‘역사와 농민’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논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그때 통일은 6,7년 내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참으로 순진한 생각을 했다.

 두 가지 사명

첫째는 우리 단일 민족은 결코 분할 할 수 없다. 이 ‘민족 재합치’를 위해 역사 정신의 정의를 배경으로 하여 과감히 투쟁하고 싶다. 조국은 하나이지 둘이 있을 수 없다. 민족 합치의 이 역사적 사명을 단순히 역사의 자의적 흐름 그것에만 맡길 수 없다.

둘째는 이우창 학장님, 최준 이사장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재학생들의 면학분위기 향상과 그 증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운영위원장 유성환

 역사와 농민

󰡔……이제 우리 농민들은 자유를 얻은 인간으로 돌아왔다. 지난날 황혼 덮인 비연의 주인들은 모든 생활양식에서 물러가라! 돌이켜 생각할 때, 나는 이곳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특기할 한 가지를 지적하고 본 항을 끝맺으려 한다.

그것은 1862년(철종 12년)에 폭발한 ‘진주민요’이다. 지방 관리들의 탐학에 대한 민중의 불같은 분노는 백건을 머리에 두르고, 죽창을 들고 방화, 파괴 등 그 기세가 자못 사나웠으나, 농민의 ‘이성’은 ‘개혁과 생존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불란서의 혁명이 시민과 노동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지만, 시간적 차이는 다소 있으나 이 진주의 민요는 조선의 위대한 ‘생명력의 표현’이다

조선 사상 ‘반란’이니 ‘사화’니 ‘반정’이니 ‘개혁’이니 많지만 농민 대중의 손으로 이룩한 진주 민요야말로 ‘조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확실한 담보가 되는 동시에 오늘 어둡고 괴로웠던 우리 농민들의 조상은 불같은 정의감과 사자 같은 투쟁력이 있었음을 만방에 자랑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1862년 그때 이미 우리 민족은 부당한 폭정에는 굴종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역사적인 저항정신을 재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1955년 3월, 나는 고시 공부에 대한 미련이 있어 호국단 학생회 일은 간부들에게 맡기고 성주 선석사로

▲ 대학시절 이상희(후일 내무장관)와 저자(1952)

향하였다. 방을 얻어 자취하면서 맹렬히 책과 싸웠다. 나의 ‘병’은 예약되어 있었다. 반찬을 못 만들어 밥을 충분히 먹지 못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 식사하고 잠자는 것 빼고는 공부만 했다. 어리석고 시골스러운 나는 몸의 상태가 위험 수위에 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부푼 꿈을 안고 책과 씨름했다.

시험 2개월을 앞둔 어느날 취침 직전 약간의 각혈을 했다. 과로증상이겠지 가볍게 생각하고 어머님께도 알리지 않았다. 이후 7년간 이 각혈병은 나를 괴롭혔다. 시험 한 달 전부터 오후 6시쯤 되면 심하게 두통과 양 어깨가 먼저 앞으로 튀어나오는 기침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멍하고 아팠다.

드디어 10월달 시험날이 되어 고시 시험장에 들어가 앉았다. 어떤 시험이든 90점 이하는 거의 받아본 일이 없던 내가 이번에는 그 오만에 무서운 징벌이 떨어졌다. 고시 시험을 다 치르고 대구로 내려와서 동성로에 있는 한미회관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자 그때 또 각혈을 하고 말았다. 주인인 듯한 사람이 나를 자기 지프차에 태우고 약전 골목에 위치한 권오성 내과에 데려다 주었다.

권 박사께서는 앞으로 5년에서 7년간 공부를 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나의 고시공부를 통한 정계에의 입성 꿈은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흘러나오는 통한의 눈물 속에는 권금조, 나의 어머님을 술장사, 밥장사의 칭호를 떼고, 〇〇〇국회의원의 어머니, 〇〇〇박사의 어머니 권금조로 부르게 하고 말 것이라는 나 혼자 간직했던 굳은 결심이 허무하게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어머님을 생각하며 또 한 번 그때 그 감정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2월에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내 병이 결핵이라는 권 박사의 말씀을 듣고 크게 실망하고 낙담하였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공부는 무리였다. 이때 고등고시 공부를 같이하던 이상희 군은 고시학과시험에 합격하고, 실패한 나를 찾아와 깊은 위로를 해주었다. 그는 내가 건강을 잃어서 시험을 실패했다고 하면서 내년에 다시 응시하면 되지 않느냐고 격려해 주었다. 1987년 이상희는 내무행정의 총수로서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내무위원회에서 질의하고 응답하며 이나라 국정을 함께 토론한 것을 생각하면 감개가 깊다.

내가 고시 공부를 하게 된 동기는 판·검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국회의원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구나 하는 증표를 유권자들에게 보여드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성주에 가서 이웃집의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격리치료에 들어갔다. 군의관 직무를 마치고 돌아온 정경택 선배는 성주에서 ‘정경택의원’간판을 걸고 개업하고 있었다. 정박사는 “성환아, 왜 공부를 전쟁하듯이 하나, 내가 고쳐줄게, 걱정하지 말고 매일 우리 병원에 와서 나와 같이 지내자”라고 폐결핵 환자인 줄 알면서도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

그는 반공투사이며, 경북의대 재학 시 대학 학생위원장을 역임한 리더십이 강한 분이었다. 한 번은 월항면 벽촌에서 어느 할머니께 영양주사를 놓으려고 하는데 그 할머니께서 그것 말고 저기 작은 주사로 놓아주면 좋겠습니다. 돈이 비싼 큰 주사는 못 맞겠다는 것이었다. 정 박사는 작은 병의 주사가 더 비싸다고 아무리 역설해도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충격을 받고 이 장면을 글로 써서 영남일보에 투고해서 보도하게 되었다. 제목은 ‘J형에게’였다. 그때 이상두(박사)가 영남일보사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영대 초대 동문이었다.

나의 병은 완쾌되다시피 회복되었다. 그때 나는 264학점이면 졸업을 하는데 261학점까지 따 놓고 있던 차에 성주 성광중고등학교 설립자 임종룡 어른께서 성광에서 몇 개월이라도 좋으니 강의를 해달라는 말씀에 쾌히 승낙하고 성광중고의 임시교사가 되었다.

이곳에서 후일 주러, 주일 대사를 역임한 김석규 군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고교 삼학년이었으며 수재로서 자타가 공인하였다. 그는 오랜 외교관 생활을 끝내고, 어느 날 서울에서 성주인 친목회의 자리에서 “나는 유 의원보다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허락하이소.” 나는 그의 따뜻한 인간미에 즉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퇴임하고도 외교관이었다.

나는 성광중고에서 후일 저명한 이경옥 목사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서울대법대를 졸업하고 목사의 길을 택했다.

학교 설립자 임종룡 이사장은 전설적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신 덕망높으신 교육가이며, 종교인이었다. 성광 졸업생 중 목사, 장로가 수십 명이나 배출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가난과 싸워야 하나

교사시절 어느 날 겨울 아침 조회시간 전교생 50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배재도 체육선생이 남학생들에게 “상의를 벗어”라고 소리쳤다. 영하 5~6도의 추운 날이었다. 그런데 3~40명의 학생은 상의를 벗지 않았다. 배재도 선생은 책을 둘둘 말더니 학생들의 머리를 치면서 한 바퀴 돌았다. 나는 슬그머니 상의를 벗지 않은 학생 곁에 가서 상의를 들춰 봤다.

러닝셔츠도 입지 않는 추위에 오들오들하게 떨며 닭살처럼 돋은 맨살이었다. 나머지도 다 그랬다. 나는 그날 일찍 조퇴하고 많은 생각을 해봤다. 임종룡 이사장을 찾아갔다.

상의를 여학생들 앞에서 못 벗는 학생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사장님은 나의 ‘특별강의내용’을 들으시고 용기를 내어 실천해 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중학 1학년생부터 시작했다. 강의 제목은 ‘우리는 어떻게 가난과 싸워야 하나’였다.

아버지로부터

논 한 마지기 빌리기, 내가 직접 그 농사일을 하기.

밭 한 고랑 빌리기, 내가 직접 그 일을 하기.

밭에 내 수박농사, 내 참외 농사 그리고 직접 시장에 가서 팔기.

콩 심기, 배추 심기, 토마토 심기, 우엉 심기, 약초 심기

용암면 곰주골 학생들은 통나무로 바가지 만들기, 남학생들은 토, 일요일 도정업소에서 쌀가마니 나르

기, 여학생들은 수예 짜서 수예점에 팔기

1954년 10월은 6·25전쟁이 휴전된 지 1년이 되던 해였다. 성주읍은 거의 가건물들로 복구하고 있었다. 1인당 소득이 3~40달러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구상은 후일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의 이념이 마을의 도로와 농작물 운반도로, 전답의 현대식 정리, 초가집 없애기라면, 내가 그때 주장한 것은 당장 학생들의 수업료, 치료비, 교통비, 용돈 등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각 가정의 금융 운영 상태를 보면 금융권은 아버지 혼자 독점해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실패하면 온 가족이 거지가 되기 쉬웠다.

전교생에게 4개월간 똑같은 내용의 강의를 했기 때문에 내가 수업시간에 교실에 가면 흑판에 학생들이 미리 강의 내용을 다 써놓고 기다렸다. 나는 학생들의 나의 강의에 대한 시험답안지 20매를 직원회의를 마치고 일 매씩 선생님들께 드리고 그 소감을 물었다. 최학수 생물 선생이 “너 우째 그런 것을 생각했노!” 하였으며, 한문의 대가였던 김영기 교감은 “참으로 살아있는 교육이다. 실사구시의 교육이다.” 고 말씀하셨다.

1955년 2월경 나는 4개월간의 교직생활을 경험하고 대학에 복학했다.

요강 단지를 깨자!

1956년 3월 영남대학교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나는 학생위원장으로써 학교측에서 공납금을 지정기일 내에 가져오지 않는 학생은 당 학기의 이미 얻은 학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반대했다. 나는 학생총회에서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책임을 지겠다고 공약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학점 4학점을 남겨두고 스스로 대학을 그만 두었다. 10년 뒤에 복학 신청을 하니 10년이 넘으면 불가하다고 했다. 1992년에 학칙이 변경되어 4학점을 다시 따고 42년 만에 졸업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큰 계획을 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어머님과 의논해서 어머님은 만일 민주당의 공천을 받으면 모든 지원을 할 테니 지금부터 각 면에 다니며 운동을 하라는 허락을 얻었다. 어머님의 사업(식당)은 크게 성공하였으며, 모두가 적은 공장보다 실수입이 크다고 하면서 엄마를 권 사장이라고 추켜 세우는 등 농을 하였다.

1958년 초에는 우리 집은 사실상 선거사무소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 무서운 테러가 잉태되고 있었다. 자유당에서 내가 공천을 못 받을 것이 확실시 되자 나를 매수해서 선거운동에 앞장세우자는 음모였다. 여당측의 흉계였다. 밤의 대구를 지배하는 H라하는 사람이 ‘거액의 돈’을 줄 터이니 선거운동에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나는 민주당 주병환 후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섭고 잔인한 테러는 나를 완전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나는 박병원에서 사실상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주 후보께서 언론에 보도케 하자 는 것을 거절하고 나의 출마 포기를 유권자에게 명백히 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수행하며 자문해주던 배재환 군과 같이 성주읍 우시장 광장에 갔다.

연설 제목은 “요강 단지를 깹시다!”였다.

존경하는 성주 군민 여러분

20세기 초에 유명한 독일의 대학자 ‘막스 베버’가 어느 날 독일 농촌을 돌아보고 독일 농촌은 항상 같다고 한탄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 독일 정부는 중상주의 못지않게 중농 정책을 채택해서 오늘날의 저 훌륭한 독일 농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주 군민 여러분! 그리고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농민 여러분! 오늘 우리의 농촌은 어떠합니까? 소를 팔고 논밭대기를 팔아 아이들 대학에 보내면 졸업 후 취직자리가 있습니까? 특권층 자녀를 제외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농가에서 논밭을 파는 것이 의사가 수술도구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군인이 총을 대장간에 파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 농촌은 농민 스스로가 깃발을 드는 농촌 대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 농촌은 먹고 그리고 생존하기 위한 농업에서 ‘돈’이 되는 농업 경영으로 일대 전환시켜야 합니다.

둘째, 혁명은 대리인이 하지 못합니다. 우리 농촌의 농업 혁명은 농민 스스로가 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귀여운 요강 단지에 아버지가 소변을 보시고 나면, 형님이 소변보시고, 그리고 막내가 소변보는 이 정다운 인습과 관습을 깨야 합니다. 과감하게 개혁해야 합니다. 소변을 방에서 볼 것이 아니라 바깥의 큰 변소에 가게 되면, 그날의 일기 상태를 직접 보고 어느 밭을 매야 하는지, 어느 논을 먼저 갈아야 하는지 계획이 설 겁니다. 게으름의 상징 요강단지! 오래된 이 인습과 관습의 상징 요강단지! 이 요강단지를 깹시다! 감사합니다.

우시장에서 나의 신상 보고 연설을 마치자 나는 예산동 도원회 군을 만났다. 그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에는 4H운동에 정열을 쏟고 있었다. 나는 4H운동의 팬이었다.

당시 성주에는 농촌운동의 대선각자 김경림 선생과 역시 경북대학을 함께 졸업한 김수호씨 내외가 하천을 개간해서 농장을 만들고 과수원, 양돈 그리고 양계를 하면서 손수 시장까지 나가 계란을 팔기도 했다. 그는 농촌 운동의 선각자로 인정되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았다. 김경림 선생, 김수호 씨, 도원회 군과 나는 4H운동에 관심을 크게 가지고 당시의 시대정신인 농촌 개혁운동의 적극적 지지자들이었다.

나는 1958년인가 1959년경 NANA통신 기자 레이플크가 한국에 여행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모두 도적들이니 소지품을 조심해야 한다는 기사를 쓴 내용을 읽었다. 나는 분하고 견딜 수 없어 대구매일신문사의 이기창 기자에게 레이플크와 나와의 결투 신청서를 보냈다. 대답이 없어 매일신문사를 찾았다. 당시 매일신문사는 대구 역전, 나룻배다실 옆에 있었다. 이기창은 “너 건강부터 회복해라. 그 생각 포기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성주 초등학교 동기생이었다. 사무실에는 두 번이나 치르게 된 경북 영일 재재 국회의원 보궐 선거를 할때라 민주당의 김〇〇 후보가 신문사를 방문해서 나는 복도에서 그분을 볼 수 있었다. 건장한 중년 신사였다. 이기창의 충고를 듣고 결투를 포기했다.

나는 또 소설가 조영암 씨의 호남을 모욕 주는 필화사건 때 전라남북도 의회 의장에게 격려의 전보를 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손주항 의원께 그 전보 원문을 찾을 수 있겠나 하고 의논한 일이 있다. 손 의원도 관심을 표명해서 감사했다. 야망과 학문과 병마의 좌절 속에 입신 독립에의 초조감을 극복 못하는 나의 몸부림이었다. 이즈음 의사 남용진 박사가 남양을 소개해 주었다. 후일 나의 처가 될 사람을….

나는 그때 허리에 종기가 있어 남박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남양은 그의 숙모가 부인병으로 입원 중이었는데 그의 입원실이 남박사의 방 앞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박사의 방 앞에서 남양을 처음 만나 알게 되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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