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6)>˝유성환 의원, 당장 내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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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6)>˝유성환 의원, 당장 내일 합시다˝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2.0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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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너무 배고파 내가 토한 핏덩이를 먹고

그 날밤 화장실에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우연히 비산교회의 십자가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올라가고 기도를 하였다.

마음속으로 “나의 병은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이 있으시면…”이라고 기도했다.

다음 날 오전에 또 각혈을 하면서 상식밖의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허약하니 각혈하는 피를 다시 먹어보면 어떻게 되는가? 마이싱주사를 매일 맞으니까 피가 응고되어 각혈을 할 때마다 피뭉치가 올라오니 그냥 먹으면 어떨까? 그 피속에 영양분이 있는데……”

나는 내 병이 깊고 치료 불가능한 병이라 규정하고 피를 마시면 죽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南양과 의논 없이 올라오는 피 뭉치를 되레 꿀꺽 위장으로 보냈다. 나는 사와 생을 결단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이게 왠일인가. 전신이 소름끼치는, 그리고 전신에서 품어내는 반작용의 반응이 나왔다. 토할 것 같았다. 거부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사람의 피를 먹어서는 안되는구나…” 나는 南양에게 말하지 않았다.

12시가 가까워 오는데 종로 이강백 내과 병원의 이강백 박사가 내 병실에 오셨다 진찰을 하고 이 박사는 내가 각혈한 피를 가지고 가셨다. 이튿날 이 박사는 “유 의원, 폐결핵이 아니야! 그러니 결핵약을 드리지 말라” 고 남양에게 말했다. 나는 지난 7~8년간의 회의가 풀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각혈을 해도 내 얼굴과 몸은 폐결핵환자 같지 않은 점이 많았다. 이 박사는 마이싱주사 맞지 말고, 며칠간만 ‘카나마이싱’주사를 맞고, 결핵약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 분은 나중에 알아보니 경북의대와 스위스 대학 의과대학에서 ‘이형폐(異型肺)’를 전공한 분이셨다. 그래서 내가 “그럼 병명은 무엇입니까?” 물으니 “아! 유 의원의 경우 정확한 병명이 없습니다. 꼭 말한다면 ‘한국형화병’이라고나 할까. 학명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옥주와의 실연의 고통이 떠올랐다.

이 박사님이 가시자 성락윤 군이 왔다. 그는 수재였다. 그러나 3급행정관시험에서 두 번이나 낙방했다. 그의 처 3촌이 민주당 고위간부였기 때문에 번번히 구두시험에서 낙방했다. 세 번째 월등한 실력으로 합격했다. 그는 가면서 봉투를 하나 주고 갔다. 성군이 주고간 돈은 내게는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그 때 법제처에서 3급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측간에 빠져 죽은 개, 약으로 먹다.

1963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온 국민이 고통 받을 때였다. 南양이 황급히 문을 열더니 동네 개 한 마리가 변소의 똥을 먹다가 빠져죽었는데 200원 달라고 하는데 약으로 잡수면 어떻습니까? 나는 반가웠다. 이젠 영양만 채우면 병은 다 나을 것을 믿었다. 개를 사기는 샀는데 껍질을 벗길 사람이 없었다. 마침 이웃집 어떤 분이 껍질을 벗겨주면 껍질과 내장을 주겠느냐 해서 南양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저녁에 큰 솥에서 개를 요리하는 냄새가 코를 진동하여 구수했다. 그러나 그 개는 우리와 인연이 없었다. 남양이 과로에 못 이겨 너무 늦도록 잤다. 너무 심하게 끓여 완전히 타 버렸다. 南양은 엉엉 울었다.

나는 “아니다. 하늘이 준 약이다. 그 솥에 물을 다시 부어 끓여라.” 몇 시간 뒤 국을 떠 왔는데 시커먼 물 위에 숯덩어리 같은 것이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숯덩이를 걷어내며, 꿀꺽 다 마셨다. 전신에 이상한 땀이 흘렀다. 나는 내 몸에서 땀이 난다는 것은 조직이 부활되는 것이니, 내가 다시 살 수 있겠구나 라는 희미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마침 매월 2,000원씩 송금해주던 방준석 형이 부산서 만난 내 친구 B군에게 2,000원을 전달했는데, 그 친구가 나보다 더 어려워 그만 써버려서 하는 수 없이 南양이 거리에서 사과, 감자 등 궤짝에 놓고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동사무소에서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국을 끓여 먹으며 벽을 양손으로 의지하면서 걸음 연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츰 회복이 되고 있었다.

1962년과 1963년의 나의 체험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다가 다행히 살아남아남은 그 경험-은 이후 나의 정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 독재 투쟁

한국 민족주의의 가면 그리고 그 위선(남북가족 면회소를 설치하라!)

1964년 9월 동경에서 세계 올림픽 대회가 개최되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몇 년만에 자유극장을 찾아갔다. 꽉찬 관객으로 자리를 못 잡은 나는 뒤로 밀려 겨우 화면을 볼 수 있었다. 대한뉴스가 나왔다. 나는 흥분했다. 온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가는 것 같았다. 신금단 부녀가 상봉하는 실로 극적인 장면이었다. 신금단은 북한의 여성중거리선수이며, 아버지는 남한국적으로 당시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북이 분단되고 16년만이었다.

동족간의 전쟁으로 300여 만명이 죽고 다친 세계전쟁사상 가장 잔인 처절한 전쟁으로 남북백성들은 상호간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뉴스만 보고 나와서 즉시 김정호형(전 도의원)을 만났다. 우리들은 종로다실 건너 편의 긴 골목 끝의 할매집에 갔다. 나는 “김정호형, 우리 데모로써 우리의 뜻을 밝힙시다.”, “무슨 문제요?” 나는 꽤 긴 설명을 했다. 그리고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 때

▲ 남북가족면회소 설치를 요구하는 2인 시위 (사진 매일신문 1964. 10. 28) 左 김정호 右 유성환

장면 부통령후보의 투표함 사수로 뉴욕타임즈까지 그 명성이 보도된 김정호 선배였다.

“유 의원, 당장 내일 합시다.” 나는 현수막에 “정부와 국회는 남북 가족면회소를 설치하라”고 크게 써 넣었다. 이튿날 9월 28일 오전 11시경 2인 데모가 시작됐다. 중앙파출소 앞에서 대구 역전까지 아무 막힘없이 해치웠다. 당시는 데모가 없는 시대라 순경들이 정부의 광고인 줄 알고, 우리를 보호까지 했으나 대구 역전까지 행진했을 때, 우리는 백차에 실려 대구 경찰서로 강제연행되었다. 병후 조리라고는 한 적이 없는 나는 용케 견뎌냈다. 나는 경찰의 고통스러운 긴 신문을 받고 검찰에 다시 불구속송청이 되었다.

14호 검사 “왜 데모를 했소?” 나는 말했다. “전후 남북의 이산 가족들이 서로 만나는 권리는 정부의 허가가 아닌 하나님이 준 권리요. 검찰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오. 인간의 권리요. 이것은 대한 사람의 천부의 권리요. 정부가 최소한의 혈육의 피와 눈물이 있다면…”

검사, “데모하기 24시간 전에 신고했습니까?”

사실은 데모를 하기 전 미쳐 생각못한 나는 생각 끝에 “신고를 안 했으니 경찰이 알고 우리를 체포한 것 아닙니까?”

검사, “알았소, 가보세요.”

김정호씨는 아예 검찰에 출두도 안 했다. 3개월 뒤 우리는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남북면회소는 훨씬 뒤에 설치되었다. 연로한 분들이 계속 죽어가는데도 면회의 허가권을 가진 남북정부가 연로한 이산가족들이 죽어가는 참상을 거의 방관하다시피 하는 것은 한국민족주의의 붕괴이며 동시에 한국 민족주의의 허상이며 가면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인간적 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월남한 교회목회자들과 월남해서 사업을 하는 여러 분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엉엉 울면서 “감사한다. 계속 노력해보자”라고 했다.

대표적인 인사는 자유극장 옆 칠성양화점 韓 사장이었다. 생각하면 남북 분단 그 자체가 한국 민족주의의 자살행위였다.

중병을 치룬 나의 체중은 65kg에서 45kg으로 20kg이나 줄었다. 그러나 반독재 싸움에 45kg체중으로 감내했다. 어차피 나의 투쟁이야 체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어떤 중요한 국면에 처했을 때,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정의감이 일어날 때, 나와 민주전사들의 투쟁은 범과 같이 사나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독한 싸움이었다.

민주전사들의 싸움은 비유하자면 “군량미”도 “무기”도 없이 오랜 시간을 맨손으로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체포와 고문과 탄압에는 항복하지 않았지만 경험해보지 않았던 굶주림과 병과 그리고 일부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투쟁의 전열

1966년 윤보선 전 대통령이 창당하신 선명야당 신한당에 입당, 중앙상무의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나는 장택상 전 총리가 위원장을 맡게된 성주칠곡지구당 부위원장을 맡고 매월 일회씩 당무보고차 장택상 위원장댁을 방문했다.

회유

나는 이 시기에 모처에서 정당생활을 그만 둔다면 유성환 전 도의원과 강철호 전 도의원께 상주나 월성 군수직을 보장하겠다는 회유를 받았다. 상당히 선택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강의원과 나는 대구 달성동에 있는 달성목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며 의논했으나, 결론은 우리는 소속당보다 강의원은 이철승, 나는 김영삼 이 분들과의 사나이의 순수한 의리때문에 그 쪽의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 둘은 인간의 의리를 택했다.

우리는 이 문제로 사실은 상당한 고민을 했다. 정치인이 되겠다는 집념이 없었으면, 그리고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저항심이 없었으면 우리 두 사람은 그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7년 2월 7일 신한당과 민중당이 통합하여 신민당이 발족됨에 따라 나는 신민당 당원이 되었다. 나는 신민당의 민주전사로써 사실상 수 십 년간 탄압, 도청에 의한 공・사생활 위협, 부당한 구속 그리고 신체고문, 여러 번의 가택연금 등이 너무나 괴로웠고, 가족들도 이것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어 심한 고통을 받았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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