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와 아홉 가지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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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와 아홉 가지 고통
  • 김재한 대기자
  • 승인 2010.04.06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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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열반(涅槃)하였다. 언론에서는 그 사실을 대서특필로 다루었다. 스님이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무소유(無所有)’였다. 이 말에 언론은 깊이 매료되었고, 어느 종교 지도자의 죽음보다도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에 열중하였다.
 
언론은 무소유를 증폭시켰고, 그 보도는 우리 사회에 무소유 신드롬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가 절판되기 까지 했다.



스님은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모든 것을 남기지 말라고 하여, 의례를 간소화하고, 절차를 생략하고, 심지어 당신이 출판한 책에 대해서도 절판을 당부하는 등 ‘빚’을 남기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출간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가 왜 스님이 말한 무소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스님은 종교인으로 무소유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속세에 피붙이 하나 없으며, 가족이라는 인연 하나 만들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입장에서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 가? 종교인의 자세로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법정 스님은 물론, 작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이후 추기경의 ‘바보의 삶’은 정직과 성결한 삶을 통해 가톨릭 교인들은 물론 국민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 분들의 검소하고 무욕(無慾)에 가까운 생활은 칭송하고 존경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종교인은 모범적 사회생활을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종교 현실은 무소유와 무욕과 달리 종교인의 개인적인 물욕(物慾)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종교의 확장을 위해 사회적 비판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종교의 내면적인 모습 보다, 외형적인 확충에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가 2100억 원의 자금을 들여 신축 교회를 짓는다고 한다. 담임목사는 본당이 너무 좁아 고민 끝에 신축을 결정하게 됐다고 말한다. 목사는 주변의 비난 여론을 의식해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겠다”며, 앞으로 3년간 건축헌금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120억 원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교회가 좁아서 넓힌다고 하고, 내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쓴다고 한다. 교회 신도들은 자신들이 낸 헌금으로 자기 교회를 짓는 데 왜 3자가 관심을 갖고, 그것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비판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내세관과 더불어 고등종교의 실천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선(善)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위해 사회적인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통해서 우리 사회 전반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스님과 마찬가지로 목사와 신부는 종교인으로서의 존경과 추앙받을 수 있는 도덕과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함은 물론, 돈과 금전적인 유혹에 벗어나 사랑과 실천으로 사회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당연히 무소유와 무욕을 실천한 분들이 더 빛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종교인의 모범적인 삶의 자세와 실천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가치 척도가 된다. 그런데 작금의 종교는 정치와 현실문제에 집착해 종교가 갖고 있는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 사회적 갈등의 요인으로 자리 잡기까지 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을 통해서 종교인의 무욕과 무소유 실천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서 그 범위를 벗어나 미화하기에 바쁘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욕과 무소유의 반대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무소유의 삶을 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소유가 있음으로 나눔도 가능한 것이고, 베풂의 순환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금전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부(富)를 인정해 주는 사회적 여건과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돈 문제는 무조건 나쁘다고 비판하는 것에서 벗어나 건전한 부와 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칭찬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불교에 8고(苦)가 있다. 8가지 고통(苦痛)을 말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4가지 고통 즉 태어남이 고통(苦痛)이요, 늙어감이 고통이요, 몸 아프고 병든 것이 고통이요, 죽어가는 것이 고통이다. 다섯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고통을 표현한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여섯 번째는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지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 일곱 번째는 얻고자 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말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그리고 여덟 번째는 오온(五蘊)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즉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너무 성성(盛盛)한 고통, 갈고 닦지 않고 쾌락만을 좇는 고통인 오온성고(五蘊盛苦)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8고의 원인을 욕심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욕심 성냄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3가지 독소적인 마음, 삼독심(三毒心)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그런데 한번 뒤돌아보자.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욕구를 무시할 때, 오늘날의 사회를 살아갈 수 없다. 매슬로우(A.H. Maslow)의 5대 욕구 즉 첫째 생리 욕구(식욕·성욕·수면욕 등), 둘째 안전 욕구(개체 생존의 안전 보장감), 셋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사회 귀속 욕구), 넷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명예욕 등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다섯째 자기실현의 욕구(최고의 인간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의 욕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교적인 사고로 무조건 마음을 비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사고의 변화와 패러다임의 일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추어야 할 사회적 욕구를 긍정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8고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통을 다 표현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필자가 본 하나의 고통이 있다면 경제적 고통, 돈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경제적 수단인 돈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으며, 또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경제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얻고자 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말하는 ‘구부득고’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말하는 돈, 금전적인 가치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부처님 생전에는 수렵채취, 자급자족의 사회로 경제적인 행위는 물론, 경제적인 수단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구부득고’라는 은유적인 표현의 고통 보다 아마도 9고(苦)는 경제적인 고통, ‘돈의 고통’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우리도 이제는 돈과 경제의 긍정적인 면을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 돈을 번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받았던 고마움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과 공헌을 생각할 수 있는 기부문화와 박애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틀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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