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치가는 안 돼˝…고건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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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치가는 안 돼˝…고건 ´낙점´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02.04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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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1998년 지방선거-上> 정치인vs행정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2014년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리는 해다. 6월4일로 예정된 이번 선거는 여야뿐 아니라 안철수 신당이 참전을 예고하며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YS가 지방선거를 30년 만에 부활시켜 1995년 제1회 선거가 치러진 이래, 지방선거는 한국 지방자치제의 핵심으로 자리해 왔다. 또한 수많은 정치인들의 등용문으로, 이명박, 이인제, 손학규 등이 지방선거를 발판삼아 대권도전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지역의 대표 자리를 걸고 펼쳐온 다섯 차례에 걸친 선거대전. <시사오늘>이 그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 지난 지방선거를 되짚어 봤다. 두 번째로 한국 최초로 정권교체가 있었던 직후인 1998년으로 들어가 봤다. <편집자 주>

1998년 4월 청와대 집무실.

김대중(DJ) 대통령은 서류봉투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서류들은 두 달 여 앞으로 다가온 6·4 지방선거의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예비 후보들에 대한내용이었다.

아직 정권 초기의 ‘허니문 기간’도 지나지 않아, 공천권에 강력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던 DJ다. 지난해(1997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회의의 인기는 1998년으로 넘어오며 절정에 달해 있는 상황,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 DJ가 예비후보들을 놓고 상념에 잠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정치인’과 ‘행정가’ 사이의 저울질이었다. 이후 이 정치가 대 행정가의 구도는, 98년 지방선거의 하나의 기류로 작용한다.

먼저 서울시를 보자.

이 시점(4월)까지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한광옥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였다. 그는 평민당 시절 DJ의 비서를 맡았던 최측근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와 함께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다. 그와 경선을 벌일 상대로는 당시 대선을 앞두고 통합추진회의(통추)에서 국회회의로 입당한 노무현 부총재였다.

그런데 한 부총재를 지목하자니 부담이 컸다.

아무리 정권 초기라지만 지방선거의 주요 후보를 자신의 일색으로 채웠다는 비난은 역풍을 몰고 올 위험이 있다. DJ의 가신이란 이미지가 오히려 결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 부총재의 지지율도 안정권에는 못 미쳐, 당선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상황. DJ로서는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당시에도 서울시장은 대권으로 가는 징검다리처럼 여겨졌다. 조순 전 시장은 1997년 시장직을 사퇴하고 탈당, 완주는 하지 않았지만 대권에 도전했다. 막판에는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을 만들며 DJ를 위협했다.

서울시장직에 한 부총재를 밀어줄 경우, 힘이 한곳에 쏠리며 당내의 역학구도가 무너질 수 있다. 한 부총재가 3선의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DJ의 마음은 고건 전 총리 쪽으로 기운다. 전형적인 ‘행정가형 인물’로 평가받는 고 전 총리는 당내의 역학구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여권에 승리를 가져다 줄만한 ‘맞춤 카드’였기 때문이다.

언론에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은 고민 끝에 행정가인 고건 전 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로 낙점했다. 사진은 2007년 새해 세배를 하기 위해 동교동을 찾은 고건.ⓒ뉴시스

“여권의 서울시장 후보가 결국 교체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한광옥 노무현 부총재의 경선구도가 깨지고 고건 전 총리의 영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듯한 분위기다. 후보교체는 한 부총재의 당선가능성에 대한 불안한 시각에서 싹텄고, DJ 비서출신이라는 한 부총재의 이미지도 교체의 한 요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1998년 4월 22일자 <경향신문>

한 부총재는 ‘경선 관철’을 외치며 반발하기도 했지만, 결국 4월 25일 DJ와 독대 후 5월 1일 포기선언을 한다.

DJ는 한 부총재와의 만남에서  '고건 서울시장',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 카드를 내밀었다.

한광옥은 1999년 청와대 비서실장이 돼 DJ의 곁으로 돌아간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DJ의 의중에 따라 고 전 총리는 서울시장후보에 나서 5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경기도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기도지사 역시 서울시장에 버금가는 차기 대권을 향한 ‘엘리트 코스’다. 이인제  경기지사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4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자 국민신당을 창당하며 선거에 뛰어들었다. 비록 3위로 고배를 마셨으나 500만 표를 동원하며 저력을 보였다.

임창열 전 지사도 전형적인 ‘행정가형’인물로, 통상산업부 장관, 재정경제원 장관, 경제부총리를 지낸 경제 분야의 행정전문가로 유명했다.

임 전 지사는 고 전 총리보다도 먼저 후보로 낙점됐다. 그는 4월 24일 당원 2천여 명이 참석한 국민회의 경기도지부 대의원 대회에서 후보로 추대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역시도 DJ의 속내가 반영됐을 공산이 크다.

임 전 지사는 53.4%를 기록,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가'인 손학규 후보(45.7%)를 누르고 선거에서 승리한다.

이인제-임창열-손학규-김문수로 이어지는 경기도지사 계보에서 대권에 도전하거나 그러한 의중을 비치지 않은 이는 임창렬 전 지사 뿐이다.

고건 전 시장 역시 대권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고 전 시장의 후임인 ‘정치인’ 이명박은 이후 대통령에 도전해 2007년 결국 당선된다. <계속>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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