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바람'에 무릎 꿇은 386…JP는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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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바람'에 무릎 꿇은 386…JP는 '역사속으로'
  • 홍세미 기자
  • 승인 2014.03.06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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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2002년 지방선거-下>386 vs CEO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홍세미 기자)

2014년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리는 해다. 6월4일로 예정된 이번 선거는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 합당으로 참전을 예고하며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YS가 지방선거를 30년 만에 부활시켜 1995년 제1회 선거가 치러진 이래, 지방선거는 한국 지방자치제의 핵심으로 자리해 왔다. 또한 수많은 정치인들의 등용문으로, 이명박, 이인제, 손학규 등이 지방선거를 발판삼아 대권도전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지역의 대표 자리를 걸고 펼쳐온 다섯 차례에 걸친 선거대전. <시사오늘>이 그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 지난 지방선거를 되짚어 봤다. 세 번째 동시지방선거가 열렸던 2002년으로 들어가 봤다. <편집자 주>

고건 서울시장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렸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은 2002년 신년 서울시장 여론조사를 결과, 고 시장이 45.7%로 1위를 홍사덕 의원이 18.1%, 이명박 전 의원이 12.4%,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이 4.8%를 기록했다.

때문에 고건의 출마여부가 변수로 떠오른 상황이었지만, 고건은 “임기가 끝나면 다시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결국 고건은 재출마를 하지 않았다. 민주당에선 서둘러 다음 후보를 찾았다.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과 정동영 상임고문이 유력한 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이들은 출마하지 않았다.

민주당에서 가장 먼저 서울시장에 출사표를 낸 사람은 ‘코끼리’ 이상수. 민주당 원내총무였다. 이상수는 ‘서민 시장’ 이미지를 강조해 서울시민들과 직접 만나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행사를 진행했다. 또 이상수는 코끼리 이상수와 함께 하는 모임 ‘코이모’를 만들어 조직 확대에 들어갔다.
 
여기에 김민석 의원이 가세했다. 김민석은 386세대의 대표주자였다. 김민석은 ‘젊음’을 강조,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의견에 김민석은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제 서울시는 창의적·균형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젊다는 것은 엄청난 강점이다.”

코끼리는 368 바람에 무너졌다. 김민석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1만3천314표(51.2%)를 얻어 1만2천238표(47.9%)를 얻은 이상수를 누르고 후보로 선출됐다.

그렇게 368(김민석)과 CEO(이명박)은 링 위에 올라오게 됐다.

▲ 고건 서울시장은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서울시장으로 출마하지 않았다 ⓒ 시사오늘

386도 막지 못한 CEO 바람

DJ 정부 시절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중산층이 몰락되면서 부작용으로 ‘부의 양극화’가 심화돼 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민주당은 젊은 세대 김민석을 전면에 내세워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돌아선 민심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한나라당은 벌어진 부의 양극화를 겨냥, ‘경제 회생’ 전략을 펼쳤다. 젊은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까지 역임한 이명박은 CEO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민주당은 시대를 읽지 못했던 것일까. ‘경제 회생’을 들고 나온 한나라당과 싸움에서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2002년 6월13일, 서울시장 선거에서 김민석은 149만6754표(43.02%)의 득표에 그쳤다. 반면 이명박은 181만9017표(52.28%)를 기록, 32만2263표차로 달콤한 승리를 차지했다.

김민석은 2002년 6월 13일 서울시장 선거 개표가 끝난 후 한 패자의 변을 이렇게 말했다.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CEO 바람이 분 것이다. 이명박의 ‘경제 시장’ 전략은 구청장 선거와 전국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중구, 성동구, 관악구 3곳을 제외하고 서울 전지역을 한나라당이 ‘싹쓸이’했다. 한나라당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지방선거 승자의 기쁨을 맛봤다. 게다가 충남도지사, 호남지역, 제주도지사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이 당선, 위력을 과시했다. ‘DJ 심판론’이 가져다 준 한나라당 ‘완승’이었다.

자민련 '몰락'

김종필(JP)이 이끄는 자민련은 배수의 진을 쳤다. 충남지사 후보로 심대평, 대전은 홍선기, 충북은 구천서를 후보로 선정하고 사활을 걸었다.

또 이 당시 이인제 의원도 JP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 자민련 돕기에 가세했다. 구천서를 지원유세하기 위해 충북에 온 이인제는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는 말을 하며 관심을 끌었다.
  
“영·호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다른 당 후보들은 발도 못 붙인다. 한나라당은 영남지역 패권을 가지고 충청도를 점령, 정권을 잡아 야욕을 채우려 하는데 충청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심판해 달라.”

하지만 ‘해묵은 핫바지론’은 2002년엔 통하지 않았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심대평이 지킨 충남도지사 단 한 석만 건지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사실 ‘자민련의 위기’는 갑작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자민련은 1995년 창당, 1996년 15대 총선에서 대전·충남·충북 28개 지역구 중 24곳을 석권했다. 텃밭의 위엄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그러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24개 지역구중 11곳만 차지했다. 위태로움이 감지됐다. 

결국 2002년 지방선거에서 JP도 ‘DJ 심판론’에 맞물려 몰락의 길을 걸었다. 자민련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2002년 지방선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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