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4자출마론, 망국적인 지역감정 이용한 선거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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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4자출마론, 망국적인 지역감정 이용한 선거전략”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4.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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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정치지도자의 변명

#1.민주화열망으로 불고가사하고 투쟁대열에 뛰어든 수많은 애국시민들의 소망은 전두환·노태우의 6·29항복으로 오랜만에 이루어졌다.
 
대통령직선 헌법개정안은 1987년 10월 12일 국회를 통과하고 10월 27일 국민투표에 붙여져 국민의 절대다수인 93.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25년간의 긴 군사정부는 끝이 나고 절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소망은 밤중에 불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이루어졌다고 온 국민이 믿게 되었다.

문제는 김영삼, 김대중 두 분 사이에 단일화가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직선제 헌법을 통과시킨 민정당은 노태우 후부를 일찌감치 민정당 후보로 지명해 놓고 헌법의 확정과 동시에 사력을 다한 대통령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통일민주당과 야권에서는 대통령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채 차일피일 시간만 끌고 있었다. 마치 10·26 후 1980년대의 정치판과 유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0·26 후에도 김대중 씨가 일찍이 자신이 대통령후보를 했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신민당에 입당해 김영삼 총재와 힘을 합쳐 전두환 일파에 대항해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했더라면 전두환 정권은 생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고 민주화세력을 양분함으로써 전두환은 여유롭게 광주사태를 일으켜 수많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씨 자신은 내란음모죄까지 뒤집어쓴 채 사형선고까지 받고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전두환에게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탄원서를 써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나가 참으로 고생도 많이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1980년대와 비슷한 태도로 일관해서 민주화세력과 국민에게 엄청난 불안을 안겨주고 있었다.

대통령 직선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안을 받아들이면 대통령선거에 나가지 않겠다는 불출마선언을 직접 기자들까지 불러 발표했는데, 막상 6·29선언이 나오자 대통령출마 여부는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지지기반이 확실한 광주와 호남일대를 돌면서 모여든 인파를 핑계로 불출마선언을 거둬들였다.

김영삼 총재와 함께 50대 50의 비율로 세력을 반분해서 창당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입당절차를 밟아놓고도 김대중 씨는 후보단일화작업을 특별한 사유 없이 미루었다.

두 김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지금뿐 아니라 대선 후까지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고, “혹시 분당까지 가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분당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얘기이며 후보단일화는 반드시 이룩하고, 경선도 하지 않고 합의로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후보가 결정될 것”임을 천명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9월 초부터 김대중계에서 김대중 후보 추대를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김대중씨는 후보단일화는 꼭 한다고 하면서 호남을 중심으로 한 군중집회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10월이 되면서 집회에 다니는 곳마다 국민들의 지지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다고, 집회에 모이는 인원으로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하며 모인 인원이 많음을 자랑했다.
 
부산 수영만에 모인 150만 이상의 김영삼 지지 모임

김영삼 쪽에서도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10월 17일, 고수부지와 야산을 합쳐 50만평이 넘는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 국민대회를 가졌다.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에서도 관광버스 여섯 대를 빌려 약국에서 여성회원들의 수고로 300여명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추대대회에 참가했다.

나는 수많은 정치집회에 참가해보았지만 수영만 대회처럼 인산인해를 이룬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모인 인원을 외신들조차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로 보도할 만큼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신바람이 난 김영삼 총재는 “군정종식이라는 국민여망의 부응과 민주세력의 후보단일화”를 역설하면서 “집회참가 인원으로 한다면 김대중 씨가 지금가지 한 달 동안 모은 인원을 모두 합쳐도, 단 한 번인 오늘 수영만 추대대회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후보단일화를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역설했다. 그 말에 모든 청중은 열광하며 속히 단일후보를 내라고 박수를 쳤다.
 
김영삼 총재의 군정종식에 대한 마지막 충정, 경선 제의

군정종식의 국민적 여망이 대통령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또다시 무산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김영삼 총재는 통일민주당은 애초에 김영삼, 김대중 양쪽이 50대 50으로 세력균형을 이루어 창당했으며, 남은 미창당 지구당 수도 반분하고 김대중 씨에게 균형을 확실하게 맞추게 해 두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경선을 해서 멋진 승부를 가려 그 극적인 효과를 국민에게 보이면 확실한 군정종식을 이룩할 것이라고 경선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경선에서 지면 깨끗이 승복하고 지난날 김 고문이 신민당 후보로 나섰을 때처럼 김 고문의 선거운동에 앞장설 것이니 딴 생각 말고 군정종식만을 생각하고 경선합시다!”

이런 김영삼 총재의 제의를 받은 김대중 씨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김대중 씨의 4자출마론(四者出馬論)과 평민당 창당

#2.김대중 씨는 변명과 변신의 장수였다. 자신의 집회에 참가한 인원을 자랑하던 김대중 씨는 김영삼 총재의 수영만대회 후 국민여론을 앞세우고 자기의 집회참석 인원을 내세웠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큰 소리를 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소집해 정정당당하게 경선으로 후보를 뽑자는 김영삼 총재의 제의를 받고 어떤 핑계거리도 없어지자, 마침내 1987년 10월 28일 자신의 대통령출마와 신당창당을 공식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나와는 신민당 시절에 고흥문 계보를 함께했고, 또 오래전부터 같은 회원으로 있는 2·8 동지회라는 친목모임의 회장 이중재 부총재가 김대중 씨의 대선출마와 신당창당 방침을 전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로 김영삼 총재를 찾아왔다.

김영삼 총재를 만나 김대중 씨의 뜻을 전한 이중재 의원이 수심에 찬 얼굴로 나오는 것을 보고 예감이 좋지 않아서 이중재 의원을 따라가서 물었다.

“회장님, 불길한 소식입입니까?”
이중재 의원은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틀렸어, 다 틀렸어. 나는 호남사람이니 틀린 걸 알면서도 김대중 씨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어.”

“그럼 또 80년대처럼 다 잡은 정권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이번에야 말로 군정을 확실하게 끝낼 호기인데 합의가 어려우면 김영삼 총재의 경선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 경선을 거부하는 겁니까? 이번에 놓치면 우리 대에서는 민주화하자는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그 책임은 김대중 씨가 져야 합니다.”

한참 내 말을 듣고 있던 이중재 의원이 말했다.

“내 생각도 노 국장의 생각과 같아. 그런데 김대중 씨는 자기 집 지하방에 나와 양순직 씨, 그리고 몇 사람을 앉혀 놓고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이 세 사람을 대통령 선거에 나오게 해서 넷이 싸워야 김대중 씨가 틀림없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역설하는 거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경상남북도는 김영삼·노태우가 나눠먹고, 충청도는 김종필 씨가 많이 가져간다고 해도 전라남북도와 수도권은 자신이 절대우세하고 강원도도 자신이 있다고, 4자가 출마해야 꼭 당선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고집을 부리는 어쩔 수가 없어. 나도 답답하고 양순직 씨도 경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인데 어쩔 수 없군. 노 국장, 이제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됐어. 수고해.”

그러면서 이중재 의원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김대중 씨는 기나긴 군정기간 동안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지도자로 지내오면서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오면 이상한 변명과 변신으로 대응해서 민주화의 호기를 방해하는 처신을 서슴지 않았다.

기껏 낸다는 것이 죽을 꾀만 낸다고, 변명과 변신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끌다가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그것도 나라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선거의 전략전술로 정하고 자기가 만든 정당을 둘로 갈라놓은 김대중 씨에게 참으로 실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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