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뉴욕타임스’에 알리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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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뉴욕타임스’에 알리려고 했을까
  • 조승용(한국논단 편집위원)
  • 승인 2009.04.13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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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언론이 이상해졌다
미국인 컬린 토머스는 한국에 와서 마약운반 혐의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 “조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면서 자기나라 신문인 뉴욕타임스에 알리겠다”면서 불평했다는 말을 자신의 한국체류기인 ‘나는 한국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책에 썼다.

혐의를 자백하지 않으면 10년 형이 선고 될 것이며, 순순히 자백하면 감형해 줄 것이라는 한국 검사의 협박에 자국의 언론기관에 이 사실을 알려 도움을 받겠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억울할 때 언론에 호소하겠다는 심정은 미국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언론에 기대하겠다는 마음이야 미국사람에서만 있을까. 우리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역에서 떠난 전직 언론인들에게도 과거 숱하게 하소연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예나 지금도 다르지 않는 언론이 그 만큼 힘이 세기(?) 때문에 국민들의 신망을 받았을 터이다. 그만큼 언론은 공정하고 정정당당 하다는 전제 아래 국민들은 언론이 무한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제 구실을 못 할 때 국민들은 언론에 등을 돌릴 것은 뻔하다. 힘이 있을 줄 알았던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할 때 누군들 언론을 쳐다보기나 할까. 항간에 언론이 힘이 없고, 제구실을 못한다는 원성이 높아져 있다. 다시 말해 언론이 권력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권력에 뿐만도 아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할 짓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희대의 살인마 강호순의 사진을 타 언론에 앞서 공개한 일이 있었다. 국민들은 조선일보 용기에 (할일을 제대로 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동안 모든 언론은 인권 운운하며 사진은 고사하고 이름 석자도 밝히는데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놈의 인권 탓은 아무 곳에서나 들먹였지 않았던가. 이러다 보니 흉악범 내지 크게 지탄 받아야 할 사회적 비리사건에서도 모 모씨 타령으로 얼버무려 왔다.  

예서도 알고자 했던 국민들 불만은 쌓여갔다. 특히 탈북자 단체 사람들을 만나면 언론에 불만을 늘어놓는다. 탈북자들은 중국을 비롯, 여러 제3국에 흩어져 국제미아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려고 애간장을 태우며 떠돌고 있다. 이들은 특히 한국 언론에 (탈출해야만 하는)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보도해 달라, (한국에 오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달라, (죽음 직전에 처해 있으니) 제발 살려 달라고 계속 절규해 왔다. 

한국 언론은 언제부터인가 지나치게 인권을 들먹이고 있다. 인권에 귀를 막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인권을 중시한다면 더더욱 탈북자들의 인권을 생각해서 탈북자들의 생존을 위한 몸짓에 더더욱 용기 있는 구실을 제대로 다해 달라는 바람일 것이다. 한국 언론이 지나치게 인권, 인권하다 보니 이상한 폐단까지 생기고 말았다.    

화제가 나서 불타 죽은 사람도, 교통사고로 숨진 피해자의 이름도 이모, 김모씨로 신원을 감추고 있다. 강원도로 여행간 버스가 굴러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는데도 피해자의 신원도 밝히지 않으니 희생자 가족들은 누가 죽거나 다쳤는지 얼마나 속을 태웠을까. 이를 알려고 가족들은 사고 현지 경찰서나 여행사에 전화를 거느라 며칠씩 애를 태웠다고 한다. 이것도 언론이 인권 혹은 명예 탓으로 돌려서 그런가. 필요 이상 인권을 빙자하다 보니 막상 언론이 알려야 할 의무까지 저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어떤 신문은 외국에 나가있는 이재오 전 의원을 ‘개국 공신’이라 썼다. 그러면서 언제 돌아올 것이라느니, 귀국이 늦어질 것이라는 등 시시콜콜하게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을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공로자라면 몰라도 어떻게 그를 이 나라 건국의 개국 공신자로 치켜세울 수 있나. 한마디로 언론이 이상해졌다.

그렇게 쓸 기사가 없나. 언론은 무엇 보다 알릴 의무 이상의 편향된 기사를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다고 보는가. 국민은 언론을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고 보는 기대를 저버릴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신문이 최근 소위 ‘베를리너형’의 신문크기 판형을 바꾼 것을 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찬사를 보낸다며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용기 있는 도전이 한국 언론의 역량과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신문 크기를 바뀐 것을 두고 이런 찬사를 하다니, 뭐가 잘 못 돼도 한참 잘 못 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은 립서비스로 한 언론에 아부하는 것이라고 치면 그런대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국민이 언론에 아부하는 것이나, 등을 돌리는 것은 두려워해야 한다. 과연 언론은 무엇을 먹고 어디에 기댈 것인지를 똑똑히 가려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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