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권, ˝통일 저해 세력은 친일, 충미, 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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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권, ˝통일 저해 세력은 친일, 충미, 군부˝
  • 김병묵 기자 변상이 기자
  • 승인 2014.11.2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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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서 통일로(7)>장준하 선생 장남 <사상계> 장호권 대표
장준하 선생 장남 <사상계> 장호권 대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변상이 기자)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정적(政敵)은 누구였을까.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故 김대중(DJ) 전 대통령 등이 꼽히지만, 이 두 사람에 앞서 나오는 이름이 있다. 바로 故 장준하 선생이다. 독립군 출신의 정치가로,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내기도 했던 장 선생은 박 전 대통령에게 맞선 야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보다 앞서서는 <사상계>를 창간하여 자유당 정권을 비판, 4·19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 인물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37번의 체포, 9번의 투옥을 겪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장 선생은 1975년 유신 체제에 반대하며 제2차 100만인 개헌 서명운동을 벌이다 산에서 의문의 실족사를 당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으며, 2012년 이장(移葬) 중 유골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며 다시 진상규명 요구가 수면 위로 떠오른 바 있다.

비록 갑작스런 죽음을 당했으나 장 선생의 유지(遺志)는 후대로 이어져, 결국 YS와 DJ 등이 주축이 돼 후대에서 결국 민주화를 쟁취한다. 그러나 이들은 장 선생의 정신을 고스란히 잇지는 못했다는 평이다. ‘장준하의 정신’을 고스란히 잇고자 하는 이는 바로 장남 장호권 사상계 대표다.

▲ 장호권 <사상계> 대표 ⓒ시사오늘 변상이

아버지의 의문사와 해외 망명 생활

장 대표는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국내에 돌아왔다. 아버지인 장 선생의 사후 테러와 위협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 대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내가 스물일곱 살이었다. 사고를 당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영 석연찮았다. 그래서 나름 알아봐야 겠다고 하는데 테러를 당한다. 다짜고짜 괴한들이 달려들어서 폭행을 가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더라. 지금도 내 턱에 금속이 많이 들어가 있다. 턱뼈가 당시에 산산조각났기 때문이다. 전치 6개월을 받고 몇 달 간 병원에 누워 있는데, ‘아, 이대로 있으면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일단 해외로 몸을 피했다.”

장 대표는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귀국한다. 그러나 그 귀국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다시 들어서며 장 대표는 고초를 당한다.

“박정희가 죽어서 모든 게 끝났구나 하고 1979년에 돌아왔다. 이제 우리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들어왔는데, 오산이었다. 1980년 전두환 패거리들이 나를 또 가뒀다. 그래서 ‘박정희도 죽었는데 왜 나를 가지고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재야인사들 및 학생들과 연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을 잡아내는데 협조하라 이거다. 내가 그런 것에 협조하겠나.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툭하면 나를 잡아갔다. 구속은 시키지 못했다. 장준하 아들로 내 이름이 알려져 있기에 신문에 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고문이 이어지고 해서 하루는 꾀를 썼다. 군산에 친한 후배가 수배 중이었는데, 미리 후배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 후에 뒤에 못 이기는 척 안기부에게 군산의 정보를 흘렸다. 현장을 급습했을 땐 이미 후배는 몸을 피한 뒤였고, 나는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다시 해외로 도주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현실도피한다는 오해”

장 대표는 온갖 궂은일을 하며 해외를 전전한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게 됐다. 다행히 해외에 있는 뜻 있는 교포들이 그의 망명 생활을 도왔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와 집, 가족을 두고 해외에서의 기약 없는 도망자 생활이 이어졌다.

“교포들은 애국심이 오히려 내국민보다 큰 경우도 많다. 밖에 있으면서도 나랏일을 걱정하는 의인(義人)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렵게 살았지만 그분들의 도움을 잊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반복하며 버텼다. 한국에 언제 들어갈까, 들어가서 뭘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중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나를 알아본 사람들 중 일부가 내게 손가락질을 했을 때다. 몇몇 사람들이 ‘저 사람이 왜 여기 와 있느냐, 지금 나라 안에서 목숨 걸고 반독재 투쟁을 하고 가장 앞장서서 민주화 운동을 벌여야 할 사람 아니냐, 제 살려고 현실도피해 있는 것 아닌가’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다. 지금도 괴로운 기억이다.”

1992년 YS가 정권을 잡으며 사실상 민주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그해 가족들과도 10년 만에 싱가포르에서 상봉했다. 하지만 장 대표의 마음은 실망감에 더 가까웠다고 토로했다.

“YS도, DJ도 장 선생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한 핵심 인물들 아닌가. 그런데 이들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권력을 잡고 말았다. 본인들이야 어쨌거나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친일 세력, 반민주 세력, 반민족 세력들이 청산이 안 됐다. YS의 문민정부를 보자. 하나회 청산은 아주 좋았다. 대단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파나 반민족 세력도 과감히 뿌리를 뽑았어야 했다. 그런데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구 독재 세력의 지분이 남아서 그 안전을 보전해주고 만 꼴이 됐다. DJ 같은 경우는 사실 더하다. 실질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명목상 김종필(JP) 전 총리와 5:5의 지분 아닌가. 어떻게 군부 청산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 내가 아주 돌아온 건 2003년,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였다.”

▲ 장호권 <사상계> 대표 ⓒ시사오늘 변상이

통일을 막는 것은 親日, 忠美, 軍部

장 대표의 인생, 그의 가족사에 얽힌 비극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의 아픔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시대의 소명 민주화는 이러한 희생 위에 이뤄졌다. 그는 다음 소명인 통일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민주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통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운을 뗀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통일 저해 세력들을 지목하며 설명했다.

“지금 한국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을 나는 세 갈래로 본다. 첫 번째는 친일파다. 지금 기득권을 잡고 있는 이들 중에도 많다. 우리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막후의 권력자들이나 재력가들이 상당히 많다. 반민족 행위, 친일을 했는데도 처벌받기는커녕 더 잘 살고 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2차 대전 이후, 아예 그 싹을 잘랐다. 2만여 명인가를 처형했다. 우리는 그러지 못해 지금껏 고생하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도 그랬지만 여러 모로 여건이 아쉬웠다. 여튼 친일파는 통일이 싫다. 지금의 기득권을 잃을 수도 있는 가능성, 그러한 변수를 만들 리가 없다. 이대로 안정적으로 자기 이익 추구하며 살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 한들 자기 지금 손에 쥔 떡을 내려놓을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그 다음은 충미(忠美)주의자들이다. 나도 미국이란 나라 좋아한다. 대단한 나라고 좋은 나라고, 우리의 동맹국이고. 그런데 미국을 좋아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친미가 문제될 것이 있겠나. 바로 미국에 충성을 다하는, 충미가 문제인 것이다. 사대주의적 습성이다. 미국은 단호하다. 자국의 이익, 자국 국민들에게 좋은 일들만 한다.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또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이득이 되는 일엔 손을 대고, 손해 보는 짓은 냉정하게 손을 떼는 것이 미국이다. 그런 미국과 친하면 좋지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바보짓이다. 만에 하나 우리가 아쉬운 일이 생겼을 경우에 손을 벌렸는데, 미국이 국익과 비교하다 소위 ‘팽’해버릴 우리는 어디에 호소할텐가. 명나라만 믿고 살던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자와 다를 일이 없다. 이들은 미국이 탐탁찮아 하는 한 통일을 반대한다. 미국을 설득할 생각을 못 하는 거다. 친미는 통일을 위해 미국과 이야기해볼 생각을 하겠지만, 충미는 미국이 하는 대로만 따라 하는 꼭두각시다. 세 번째는 우리의 무신(武臣)들이다. 군인이다. 일부 군인들 중에는 깨어있는 자들도 있지만, 마치 통일이 이뤄지면 군인의 권위가 줄고 밥그릇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머리가 굳은 무인들이 많다. 전쟁의 긴장이 있어야 무기를 사오기 좋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도입하는 과정에 상당히 많은 자신들의 몫을 챙긴다. 최근 터진 ‘통영함’사건만 봐도 그렇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라도 군사력이 강해지면 좋을 텐데, 어디론가 새고 있지 않나. 통일이 되고, 이제 통일 한국의 국토와 온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 북한이 없어진다고 우리의 국방력이 줄어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강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중국과 일본이 긴장할 테니까. 통일이 군인들의 권위와 복지를 더 올려줄 수도 있는 일인데, 일부 지금 가진 것들을 지키려는 시대착오적인 군부 세력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준하 아들이 아닌 인간 장호권

장 대표는 최근 강연을 다니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은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역사의 왜곡을 막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장준하 아들이 아닌, 인간 장호권이 해야 할 소명을 다하기 위한 행보 중 하나다. 사정상 휴간 상태인 <사상계>도 놓지 않고 있다. 이제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눈을 빛내며 말을 맺었다.

“우리 일가는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우리 딸은 미국에서 법을 공부한 변호사다. 국제 분쟁과 소송 쪽을 특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오면, 온 세계를 상대로 한국의 국제적 분쟁, 법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다고 한다. 아쉬운 것도 많고 서운한 일도 많은 나라지만 우리의 뿌리요, 조국 아닌가. 내 힘이 보태져서 잘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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