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지방선거]Review 지방선거(95년)
③지역주의 선거, DJ·JP 한풀이場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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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Review 지방선거(95년)
③지역주의 선거, DJ·JP 한풀이場 전락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0.05.28 2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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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DJ '지역등권론‘으로 호남과 서울 석권
자민련, JP '핫바지론‘으로 충청과 강원 싹슬이
결국 지방선거, DJ 정계복귀의 장으로 활용돼
95년 6월 27일 오후 6시 여의도 민자당사.

민자당 지도부는 침통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이춘구 대표는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김덕룡 사무총장은 넋이 나간 채 TV로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같은 시각 마포 민주당사와 자민련 당사에는 김대중(DJ) 아태재단이사장과 김종필(JP) 총재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이처럼 34년 만에 부활된 지방선거는 정계은퇴 2년반 만에 뛰어든 DJ와 김영삼 정부에서 용도폐기 된 JP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 됐다.

DJ는 호남과 서울 등에서 영향력을 재확인 한 순간이었다. 그는 특히 ‘지역등권론’을 통해 선거 초반 거의 더블스코어로 리드 당하던 서울시장 선거전의 판세를 순식간에 흔들어 놓는 파괴력을 보였다. JP는 ‘핫바지론’을 통해 전통여도로 분류되어 온 강원과 충청을 차지함으로써 보수 여권 층의 심장을 건드렸다.

실상 결과가 나왔을 때 민자당은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5개 시 도 중 최대 8개, 최소 6개의 광역단체장 당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수도권 및 호남지역에서 DJ의 유세덕분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선거전의 분위기를 일시에 반전시켰다.

선거 후 민주당 김태식 사무총장은 선거승리를 DJ 덕으로 돌렸다.

“민자당의 온갖 음해에 시달리면서도 당원으로서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DJ에게 감사한다.”

자민련은 충청권의 지역정서를 절묘하게 이용했다.

JP는 선거기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자신이 용도 폐기된 데 대한 울분을 털어놨고, ‘핫바지’니 ‘멍청도’니 하는 말을 꺼내며 노골적으로 지역정서를 자극해 승리를 일궈냈다.


▲ 95년 지방선거는 지역주의로 물든 선거였다     © 시사오늘

특히 DJ의 출현으로 지역등권론과 핫바지론이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선거전은 3김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다.

물론 지역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무소속으로 박찬종 후보가 서울시장에, 부산에선 민주당 깃발을 가지고 노무현 후보가 뛰어들었으나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찬종 후보는 패자의 변에서 “우리는 지역할거주의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고 말했고,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기 위해 민주당 간판을 버릴까 생각했지만, 이 지긋지긋한 지역할거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끝까지 당을 버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결국 지역일꾼을 뽑아야 할 95년 지방선거는 양김(DJ, JP)의 부활만을 되살려 놓는 계기가 됐다.

당시 지역주의가 얼마나 기승을 부렸는지, 민자당은 패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지난 2월(95년 2월) ‘당의 세계화’ 명분으로 당시 대표이던 JP를 축출하지 말았어야 했다. 굳이 필요하다면 지방선거가 끝나고 내 보내야 했다.”

이제 DJ는 거칠게 없었다.

DJ는 “YS는 지역감정과 용공음해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축복해 주었고 영국으로 떠나면서 잘하기를 바랐다. 영국에서도 이기택 총재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지원과 성원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배신감마저 느끼고 했고 이는 나의 부덕의 소치로 본다”고 정계복귀를 알렸다.

95년 7월 13일 내외문제연구소.

DJ는 정계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비록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일시적으로 받더라도 민족의 운명이 기로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조금마한 힘이라도 보태겠다. 이번 정치재개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같은 날 마포 민주당사.

이기택 총재는 ‘분당’을 막기 위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나는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정계복귀를 반대한다. 그의 은퇴선언은 정치적·역사적 의미와 무게가 실린 것이다. DJ는 지금에 와서 정계복귀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이 민주당을 두 토막 내 신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DJ는 형체도 없는 신당논리를 내세워 자신이 만든 민주당을 때려 부수려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고 말았다.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양김은 완전히 부활하게 된 것이다. <95년 지방선거편 끝>
 

[박스]

박찬종 후보의 패인분석

“지금 생각해도 패인은 지역감정 때문”

민주당은 박찬종이 민자당 입당할 것이라고 소문내
하지만 입당제의는 민자당이 아닌 민주당에서 받아
망국적 지역감정 없애기 위해서는 DJ, JP 물러나야


▲ 박찬종                     ©시사오늘
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박찬종 후보는 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했다. 하지만 전국구 21번을 받아 낙선했다.
 
필자는 당시 박찬종 후보와 사석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박 후보는 당시 패인을 “지역주의 때문에 패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김(DJ, JP)의 완전한 정치퇴장”이라고 밝혔다.

박 후보는 또 “당시 선거에서 민주당은 박찬종이 민자당에 입당할 것이란 소문을 내고 다녔지만 정작 입당 제의가 들어온 곳은 민주당이었다”며 “물론 민주당에 입당할 경우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었지만 원칙을 저버릴 수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내용을 실어본다.

-요즘 근황은.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전력을 쏟았다.”

-지난 95년 서울시장 출마 때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렸는데 결과는 패했다. 돌이켜 생각할 때 패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역할거주의 때문이다. 선거중반 DJ는 등권론을, JP는 핫바지론을 들고 나와 지역분열을 부추겼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박 전 의원을 여당이던 민자당이나 야당이던 민주당에서 영입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당시 선거에서 민주당은 박찬종이 민자당에 입당할 것이란 소문을 내고 다녔다. 하지만 정작 입당 제의가 들어온 곳은 민주당이었다. 물론 민주당에 입당할 경우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원칙을 저버릴 수 없었다. 지역할거 타파와 세대교체, 정치개혁의 실현이 나의 소신이었다. 입당은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하지 않았나.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 당시 지역할거주의와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홀로설 수 없는 것 아닌가. 나는 YS의 문민정부가 성공하기를 기원해 순수성을 가지고 입당했다."

-입당배경을 솔직히 얘기해 달라.

“나는 당시 신한국당 선대위 수도권본부장과 전국구 2번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지역할거주의와 싸우다 신한국당에 들어가는 게 어쩐지 국민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어 전국구 2번을 포기했다. 당선권 밖의 21번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결정이 정치적으로 나를 위축 시켰다.”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없나.

“이제 양김(DJ, JP)은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망국적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정치인을 유권자는 표로서 심판해야 한다. 유권자가 바로서야 지역주의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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