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버섯처럼 남아있는 군사독재의 잔재”
스크롤 이동 상태바
“독버섯처럼 남아있는 군사독재의 잔재”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6.28 12: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 광명시 모든 행사는 민주당 윤항렬에게 맞춰졌다

너무 오랫동안 군사독재 치하에서 길들여져 온 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시 산하단체와 일반 사회단체까지도 자기들의 고유 행사와 집권여당의 행사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단체를 민정당 윤항렬 위원장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하고 있었고, 또 거기 참석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민주화의 기초라고 믿고 이런 관행부터 타파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광명시 축구협회가 주최한 축구대회 초청장을 받고 광명시 교육청이 있는 광남중학교 운동장에 갔다. 낙선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때여서 겨우 돈 2만원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개막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통일민주당 광명시 지구당 위원장 노병구’라고 적고 내빈석 맨 앞줄에 윤항렬 위원장과 나란히 앉았다.
 
그 바로 뒷줄에는 김용선 광명시장, 그 옆에 권주복 광명경찰서 서장이 정복차림으로 앉아 있고 교육장과 광명시내 유지들이 단상을 꽉 메우고 있었다.

개막식이 시작되었는데 축구협회장의 개회사와 시장이 격려사를 하고 난 다음에 윤항렬 위원장의 축사로 이어져서 나도 간단한 축하의 말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윤항렬 위원장의 축사가 끝나자 사회자가 “이것으로 개막식을 모두 끝내겠습니다”하는 게 아닌가. 나는 몹시 불쾌했다. 나는 곧바로 일어서서 뒤에 있는 단상의 내빈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야, 이 개자식들아! 나한테 초청장은 왜 보냈어? 이 축구대회가 민정당 주최 축구대회라면 이 자식들아 그렇다고 써서 보내야지 왜 광명시 축구협회 주최라고 사기를 쳐, 이 새끼들아. 나는 돈도 없는 사람이지만 나도 바쁜 사람이야.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민정당 윤항열이  불법선거 운동하는데 없는 돈 2만원씩이나 가지고 와서 들러리나 서고 다니는 사람으로 보여, 이 새끼들아! 나는 이런 못된 짓 하면 안 된다고 평생을 바쳐 투쟁한 사람이야.
 
이런 사  기치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렇지만 나도 없는 돈에 2만원씩이나 갖다 바쳤어. 그러니 그냥 갈 수는 없지 않나! 여기 참가한 선수들이 이런 못된 짓을 하는 것을 알 리  없고, 나 또한 선수들의 선전을 격려하러 왔으니 2만원의 밑천도 뽑고 선수도 격려하고 가야겠어.
 
이런 더러운 자리에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가요. 선수 여러분, 잘 봤지요? 이건 당당한 스포츠맨십이 아니에요. 나는 선수 여러분과 악수만 하고 가겠어요. 잘들 싸우고 좋은 성적 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가 나란히 정열하고 서 있는 선수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내 손을 힘껏 잡은 선수들이 손가락으로 나의 손바닥을 긁으며 용기를 주었다. 그때까지 본부석에 있던 윤항렬과 시장과 서장, 유지 모두 말 한마디 못하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수명이 다 되어가는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며 약국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약국에 나가 있는데 김용선 광명시장이 시청 총무국장을 대동하고 약국으로 들어왔다.

“위원장님, 어제는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용서하고 이해해주십시오. 너무 오랫동안 저질러온 관행이기 때문에 실무자들이 아예 체질화되어 있어서 저지른 일입니다. 위원장님의 지적이 너무 촉망 중에 일어난 일이라서 어제는 제가 사과조차 할 수 없어서 오늘 위원장님께 사과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어제의 일은 다 잊어주십시오. 제가 시장으로 있는 동안은 결코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시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군사통치가 만들어 놓은 체질이라고 나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민주화된 지금은 마땅히 달라져야지요. 오히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윤항렬 위원장이 당당한 자세로 실무자들에게 지적을 했어야죠.
 
그랬다면 나도 또 보는 사람들도 얼마나 아름답게 봤겠습니까? 내가 축사를 했다고 내게 무슨 득이 되고 윤 위원장에게 무슨 손해가 간다고 자기 혼자 많은 사람 앞에서 내 모양새를 우습게 만들어놓습니까? 축사를 한다고 개선장군이 됩니까? 시장님, 저도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았는데 육두문자까지 써가면서 항변한 것은 시장님을 비롯한 여러 내빈에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점은 용서해주시고 우리 한번 멋지게 좋은 친구로 살아가십시다.”

그 후 김용선 사장과 나는 서로 집안의 길흉사에 빠짐없이 오가며 형제처럼 지냈으며, 그가 경기도지사로 승진한 뒤에도 그런 관계는 지속되었다.
 


광명경찰서장의 변명

 
그해 여름, 광명경찰서 주관으로 시민걷기대회 행사가 시민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수천 명의 참가자는 거의 아이들과 여자들이었다. 시장을 비롯한 관내 유지들이 본부석 단상의 지정된 좌석에 앉았는데, 각 정당 위원장 석이 앞줄에 준비되어 있었다.
 
좌석에 앉으려다가 단상 한쪽에 써 붙인 순서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국민의례에 이어 서장의 개회사와 시장 격려사, 그리고 4~5개의 정당 지구당위원장들을 모두 축사순서에 넣어놓았던 것이다.

날씨는 더운데 아이들과 여자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고생을 시켜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 권주복 서장, 이 더위에 많은 사람을 세워놓고 이게 뭐하자는 거요?”

“아, 그게 아니고, 지난번에 축구대회장에서 항변하신 형님의 말씀이 옳아서 이번에는 아무도 차별하지 말고 행사를 하라고 지시했더니 이렇게 해놨습니다.”
“내가 축사를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럴 때는 서장이 개회사를 하면서 여기 누가 왔다고 공정하게 소개를 하면 됐지, 이 따가운 햇볕 아래 듣는 사람들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하면 안돼요.”

“지난번 형님 말씀이 옳아서 해놓은 건데 그냥 짤막하게라도 해주십시오.”
집권당의 윤항렬 위원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고육지책으로 세운 방침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지만, 서장의 입장도 있고 해서 그냥 넘어갔다.
 
빚으로 인한 집 명의 이전
 
선거는 끝났다. 선거기간 동안 워낙 돈을 절약해서 썼기 때문에 선거로 인한 빚은 별로 없었지만 농장을 정리하면서 갚아야할 부채가 고스란히 남아서 큰 부담이 되었다. K씨에게서 200만원, Y씨에게서 1200만원의 빚을 얻어 몇 년 동안 날자 한 번 거르지 않고 이자를 꼬박꼬박 지불했는데, 선거에 실패하고 어려움이 겹쳐 한두 달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되었다.

K씨는 매달 이자를 받아 생활에 보태는 형편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여유를 주었는데 Y씨의 부인은 첫 달부터 독촉이 심했다. 나와 경옥은 친한 친구 사이에 신용문제에 금이 가면 안 된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신용 이상의 자본이 없다는 것을 신조로 살아왔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 중 살고 있던 집을 시세 껏 쳐서 명의이전을 해주고 남은 돈을 보증금으로 하고 부족분은 얼마간의 월세로 하자고 했고, 그래서 결국 살던 집이 날아가 버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