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과 기득권②>김현철에 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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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과 기득권②>김현철에 대한 오해와 진실
  • 홍세미 기자
  • 승인 2015.10.18 0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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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재개 꿈꿀 때마다 따라 붙는 꼬리표, 극복 가능할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홍세미 기자)

‘YS 차남.’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에게 붙는 꼬리표다. 김 교수에겐 몇 가지 꼬리표가 더 따라붙는다. 소통령, 황태자, YS 정권의 그림자 실세 등이다. 원내에 입성하지도, 주요한 보직을 맡지도 않았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다. 이 꼬리표들은 김 교수의 원내 입성을 막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교수에게 붙는 꼬리표의 진실과 그를 둘러싼 소문을 <시사오늘>이 파헤쳐본다.<편집자 주>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정치재개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시사오늘

1. 아버지 권력으로 국정의 한 축이 됐다.

김현철에게 따라붙는 꼬리표 중 대표적인 게 ‘소통령’이다. 김영삼(YS) 정부 때 대통령만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그가 아버지 후광으로 이 같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YS의 아들이기 때문에 정권으로부터 대우를 받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오해에 가깝다. 김 교수는 실력으로 권력의 한 축이 될 수 있었다.

선거판에서 빠질 수 없는 ‘여론조사’는 최초로 언제 도입됐을까. 1987년 대선 후 김현철은 과학적 선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최초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상도동계의 반응은 냉랭했다. 여론조사가 최초로 도입돼 낯설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김현철은 이런 반응에 굴복하지 않고 여론조사를 13대 총선에서 사용했다.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을 예측했지만 상도동 사람들은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제2야당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 YS는 이를 눈여겨봤다. 1992년 대선에서 여론조사를 적극 활용하라고 아들인 김현철에게 지시했다. YS는 여론조사를 토대로 선거 전략을 세웠다. 덕분에 YS는 수월하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YS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국정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2. 15대 총선에서 개혁공천을 주도했다.

당시 국정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현철은 어느 정도 공천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시 그가 원내에 입성시킨 정치인들은 누가 있을까. 정의화 국회의장과 이재오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등이다. 이들은 현재 여당과 야당의 ‘인재’다.

당시 이들을 원내에 입성시킨 김현철은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새로운 개혁적인 인물들을 발굴해서 등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당시 개혁주도세력을 만들어서 양성하는 작업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인적개혁, 제도개혁, 의식개혁 등 무엇이든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개혁 세력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당시 기득권 저항이 너무 심했다. 그러나 여기서 밀리면 결국 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총대를 메고 밀어붙였다. 전략공천은 성공했다.”

15대 전략공천을 ‘개혁공천’이라고 표현한다. 개혁적인 정치 인재들을 정치권에 입성시킨 것에 대한 ‘호평’이다. 김현철이 전략공천을 통해 개혁적 인물을 원내에 입성시켜 우리나라 정치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까닭이다.

김현철이 개혁적인 인물을 발탁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층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입지를 뺏긴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김현철이 국정에 개입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3. 한보사태

김현철에게 ‘한보사태’는 빠질 수 없는 사건이다. 한보사태는 YS 정권 말기인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로 촉발된 사건이다. 한보사태와 관련,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비리사건이 드러난 바 있다.

YS는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철저한 수사를 검찰에 촉구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현철이 한보사태의 배후라는 말이 떠돌았다. 당시 YS는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문제가 있으면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검찰조사 결과 김현철은 무죄로 밝혀졌다. 한보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4. 조세포탈죄

한보사태가 무죄로 밝혀졌지만 김현철은 구속됐다. ‘조세포탈죄’라는 명목으로다. 조세포탈죄로 실형을 받은 것은 정치권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시 김현철의 변호사였던 새누리당 여상규 의원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김현철을 변호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기소장만 봐도 이 사건은 명백히 무죄라 확신한다. 표적수사고 짜맞추기 수사의 전형이다. 법리해석을 잘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권 인사들은 차기 대선(15대)을 앞두고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김현철에게 “잠깐 들어갔다 오라”고 했다. 김현철은 자신이 희생양이 돼서 대선 승리를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야당도 정권심판론을 앞세워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YS 정부 심판론이 김현철 구속으로 이어진 측면이 많다. 여당과 야당에게 ‘타깃’이 된 것이다. 

하지만 김현철에게는 오해를 푸는 일이 쉽지 않다. 한보사태는 관련이 없다고 드러났고, 징역을 산 것도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이 컸다는 것은 당시 정치권 인사들이면 다 아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들은 김현철이 정치 재개를 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 일이 됐다.

5.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림자 배후’

김현철은 언제나 음지에서 활동했다. ‘그림자 배후’라는 꼬리표가 붙는 이유다. 그가 그림자를 자처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정치 활동이 위축됐다. YS는 1988년 총선 때 김현철에게 출마를 권유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후 김현철이 정치를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YS 도움 없이 정치판에서 살아남아야 했지만 늘 이름 앞에 ‘YS 차남’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선거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아버지의 명예에 상처를 준다. 그가 쉽게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김현철은 정치라는 것은 정당활동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무소속 출마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김현철은 몇 차례 출마를 꿈꿨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YS 아들’이라는 것은 김현철 교수의 정치 재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YS가 떠오르는 것, YS 그림자가 연상되는 것 자체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3김시대 프레임에 갇혀 식상한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라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정치권에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김현철 교수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역량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라며 “정치 경험이 풍부하고, 지금은 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야 정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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