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YS③]“나의 투쟁은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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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YS③]“나의 투쟁은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5.12.02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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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일대기, ‘주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11월 26일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 대한 영결식이 있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국회의원 9선이라는 정치적 경력을 쌓으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를 불태웠던 YS는 자신의 정치생활 동안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인재들을 모으고 이들을 결집시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그의 삶 속에 나타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따라가 봤다. <편집자 주>

“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입니다”

40대 기수론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은 ‘민주주의란 무엇이냐’에 대한 모범적 답이 될 만한 사건이다.
당시 신민당 3선 의원이었던 YS는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것. 이에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유진산은 “YS의 대선출마는 그야말로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이후 김대중(DJ)과 이철승이 대선경선에 뛰어들며 ‘40대 기수론’은 신민당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진산은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YS DJ 이철승 중 한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YS와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리 없다고 판단한 DJ는 이를 거부했다. YS와 이철승은 유진산을 만나, ‘유진산이 추천하는 후보를 밀겠다’고 서약했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은 “나는 당수로서 YS를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YS는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이철승의 배신으로 DJ가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YS는 당시 경선에 대해 문제를 삼을 수도 있었지만 깨끗이 승복했다. 이뿐 아니라 DJ 당선을 위해 전국으로 지원유세를 펼쳤다.

선거직후 YS는 가장 먼저 신상발언을 통해“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은 모두 힘을 합쳐 김대중 후보를 앞세우고 기필코 정권교체를 이룩합시다. 이 김영삼이도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당선을 위해 나의 고향 거제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선거운동을 하겠습니다.”

민주산악회에서 산행중인 YS.ⓒ김영삼 자서전

“나는 영원히 살길을 택할 것이다”

YS 의원직 제명과 유신몰락

1979년 유신말기.
YS는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박 정권은 ‘YS 제거’에 나섰다. 우선 YS 주변 인물들을 옭아맸다. 박 정권은 김영삼 직계로 분류되던 문부식 김덕룡 등이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하고, 서석재 문정수 등을 지명 수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총재 가처분 파동’을 일으켰다.

신민당 원외위원장 윤완중 등 세 명이 “5.30 전당대회 때 대의원 자격이 없는 조윤형 등이 투표에 참여했으므로 김영삼의 당선은 무효”라며 총재직무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결국 가처분신청은 서울민사지법 합의 16부에 의해 받아들여져 김영삼의 총재 자격이 박탈되고, 전당대회의장 정운갑이 총재 직무대행자로 선임됐다.

신민당 총재직을 빼앗은 박 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마저 박탈하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영삼은 <뉴욕타임스>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은 나설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박 정권과 공화당은 이를 ‘사대주의적 망언’이라고 규정하고, YS에 대한 의원직 제명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김영삼이 제명되기 하루 전인 79년 10월 3일.

“따르릉.”김영삼 상도동 자택에 전화벨이 울렸다.

당시는 도청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라 김영삼은 미리 암호를 대야만 전화를 받았다. 가령 전화 건 사람이 “가회동 김 사장입니다”하고 암호를 대면 비서가 전화를 바꾸는 식이었다.

그날도 비서가 전화를 받자, “가회동 김 사장입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김영삼이 전화를 받자“저 김 부장입니다”는 말이 나왔다.

김영삼은 속으로 ‘김재규’라고 직감하며, 이들이 계속해서 내 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모르는 채 할 수밖에 없었다.

“김 부장이라니.”

“중앙정보부 김재규입니다.”

“김 부장이 무슨 일로 나에게 전화를 합니까?”

김재규는 만나기 싫다는 김영삼에게 “나라를 위해 만나야 한다”며 설득했다.
김영삼을 만난 김재규는 타협점을 제시했다.

“이미 김 총재에 대한 제명명령이 공화당에 내려갔습니다. 내일 아침 기자들과 환담하면서 뉴욕타임스 기자회견은 다소 과장되고 와전된 것 이라는 말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습니다.”

“김 부장, 나는 제명을 당하든 감옥에 가든 상관없소. 나는 잠시 살기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길을 택할 것이오.”
YS는 김재규의 협상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공화당은 김영삼에 대한 제명 동의안을 10분 만에 날치기로 변칙 처리 시켰다.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은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로 번져 나갔다.

이른바 ‘부마사태’가 난 것. 이로 인해 유신정권은 종말로 치달았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YS 23일 단식투쟁과 신민당 돌풍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3주년.

김영삼(YS)은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부인 손명순은 외신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성명내용을 불러줬고, 이는 로이터, AP, UPI 교토통신 등에 의해 일제히 국제사회에 타전됐다.

그러나 국내신문에는 언론통제로 단 한 줄도 보도가 안됐다. 단식 이틀이 지난 5월 20일 일부언론에서 이를 ‘정세흐름’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한 게 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상도동측은 YS의 단식사실을 국내에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에 관한 유인물을 만든 후 대학가는 물론, 집집마다 뿌리고 다녔다.

YS의 분신으로 불리는 박종웅 전 의원도 이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상도동측과 가까워진 인물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YS의 단식투쟁이 국내외로 일파만파 파급돼 가자 다급해진 전두환 정권은 모종의 조치를 강구했다.

YS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당시 전 정권은 YS의 단식이 ‘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측의 체크결과 YS는 오로지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계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전 정권은 단식 10일째인 5월 27일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시켜 회유에 나섰다.

권 총장은 “대통령께서는 총재가 단식을 빨리 끝내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건강이 회복되면 총재가 일본 미국 유럽 등 어디든지 가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총장은 YS를 해외에 내보내고 주택 제공은 물론 생활비 일체를 넉넉히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YS는 “우리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나에 대한 연금해제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다. 권 총장은 이 말을 전두환에게 꼭 전해라”고 맞섰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단식 12일째인 5월 29일.

권 총장은 병실로 YS를 찾았다.

“오늘 밤 0시를 기해 총재님의 연금이 해제되며 이제 국내외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나를 해외로 그렇게도 보내고 싶은가.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자 권 총장은 반색을 하며 물어봤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습니까?”

YS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단식 17일째인 6월 3일.
김영삼의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 병원 측은 최소한의 응급조치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병원을 방문, 생명보존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로부터 다시 단식 23일째 YS는 병실에 누운 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단식중단을 선언했다. 그의 성명서는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이 대독했다.

“국민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던……(생략),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전두환 정권과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가택연금을 푼 YS는 사람들을 모아 산(민주산악회)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었다. 세력이 만들어지자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야당인 민한당의 구조를 깨기 위해 YS는 신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켰다. 제1야당이 된 신민당은 민한당을 흡수 통합시키며 103석이라는 거대야당을 만들어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는데 선봉장 역할을 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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