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27 목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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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散策]박세일, "YS의 변화·개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법·교육·재벌·노동·복지·정치개혁, 미래 고민한 YS의 산물"
"1997년 IMF 사태, 야당탓도 있다…금융개혁 발목 잡은 영향 커"
"저평가 된 YS, 민주계 분열로 정권재창출 이루지 못했기 때문"
"YS 재평가 반드시 필요…변화·개혁 지속해서 선진통일 이뤄야"
2015년 12월 16일 (수) 글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정리 박근홍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정리 박근홍 기자)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나는 미(美) 국회, 국무성 관계자, 한반도 전문가들과 만나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와 남북통일에 대한 전망을 주제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뉴욕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상대로 강연이 예정돼 있어 이동하던 도중 비보를 접했다. 급히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기 위해 한걸음에 공항으로 내달렸다.

비행기에 노곤한 몸을 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대신 YS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가 우리 정치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대한민국은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의 서거를 계기로 앞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가, 곰곰이 YS를 사색해 봤다.

   
▲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 시사오늘

국가 미래 고민한 YS, 개혁의 시작

YS는 문민정부를 열면서 과거의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과감하게 혁파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금융실명제'다. YS는 1993년 우리나라의 모든 금융거래를 거래당사자의 실제 명의로 하는 금융실명제를 단행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김영삼은 금융실명제 하나만 제대로 하면 앞으로 남은 임기동안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과제였다.

하나회 척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실시했는데, '군인에 의한 정치 개입'을 근원적으로 뽑아내는 엄청난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직자 재산공개도 그렇다. YS는 이 같은 일련의 개혁으로 과거의 적폐를 일거에 청산해 냈다.

적폐만 혁파했는가. 그렇지 않다. YS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한 대통령이었다. 문민정부는 1994년 청와대에 정책기획수석비서실을 설치했다. 이전 정권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그때 YS가 내게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아달라면서 한 말씀이 이렇다.

"앞으로 20년, 30년 후에 서서 지금을 돌이켜 볼 때를 생각하면 말이야. 지금 반드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잘 잡히지 않는단 말이야. 미래 지향적인 과제가 잘 안보인단 말이야. 경제는 관료들이 똑똑하니까 충분히 할 수 있어. 정치는 내가 했던 오랜 경험으로 돌파하면 되고. 하지만 미래는 어쩔 수가 없어. 대한민국의 20년, 30년 후를 볼 때, 지금 반드시 준비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박 교수가 '세계화 시대가 온다. 우리는 세계화 개혁을 해야 한다'며 주장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애국심이 있다면 말만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세계화 개혁을 해 봐. 밖에선 변화와 개혁을 못해."

나는 YS에게 철저히 설득 당했다. 그렇게 정책기획수석실에 들어가서 한 첫 작품이 바로 세계화와 정보화 개혁이었다.

1994년 크리스마스 전날, 사무실에서 세계화와 정보화에 대한 대통령 구상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니 딱 100년 전에 근대화를 열망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갑오경장이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국정 개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계화·정보화를 화두로 던져야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박 수석 의지가 그러하니, 내가 꼭 버티겠어"

   
▲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 시사오늘

내가 구상했던 세계화·정보화 개혁 순서는 '사법개혁-교육개혁-재벌개혁-노동개혁-복지개혁(특히 연금개혁)-정치개혁'이었다.

우리나라는 사법고시를 통해 매년 200여 명의 법조인을 뽑았다. 수가 너무 적다보니 특권화·계급화가 돼 버렸다. 법률이 전체 국민의 권익신장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소수 법조계의 독과점구조를 유지하는 수단 비슷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바꿔야 했다. 모든 게 세계화의 일환이었다.

우선 기존 민법-형법 중심의 법조인 대신 환경법, 국제교류법, 지적재산법, 무역통상법 등 세계화를 위한 분야에서 뛰어난 법조인이 나올 수 있도록, 6법 중심의 사법고시 제도를 로스쿨 제도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했다. 국민들이 사법 서비스를 저렴하게 이용하도록 법조인 수도 대폭 늘리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양질의 법조인 교육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법조인 양성을 시험중심에서 교육중심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었던 법조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판사, 검사, 변호사는 물론 국회에서도 법조계 출신들이 대부분이 반대했다. 그런데 YS가 끝까지 버텨줬다.

사법개혁을 한창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YS가 내게 전화를 걸어 "박 수석, 사법개혁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어?"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각하, 제발 3주만 버텨주십시오”라고 건의를 드렸다. 그러자 YS는 "박 수석 의지가 그러하니, 내가 꼭 버티겠어. 끝까지 추진해 봐"라고 당부했다.

그런 어려움을 이겨가며 결국 문민정부는 사법개혁을 단행했고, 기존 200여 명이었던 사법고시 합격자를 1000명으로 늘릴 수 있었다. 로스쿨 제도는 '안(案)'만 만들었고, 실시하지는 못했다.

교육개혁은 세계화·정보화 개혁의 핵심이었다. 후진국은 암기 위주의 교육에 중점을 두는 게 불가피했다.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화·정보화 시대에서는 흐름이 바뀌었다. 창의적인 교육을 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었다.

이를 위해 YS는 '교육개혁위원회'라는 대통령 자문기구를 발족시켜 교육개혁과 교육발전에 국력을 집중했고, 1995년 5·31 교육개혁안을 발표했다. '열린교육', '대학의 다양성', '자율적 학교 운영', '평생교육과 IT교육 강화' 등 오늘날 교육전문가들이 표방하는 각종 슬로건들이 다 여기서 나왔다. 당시 OECD 평가단이 와서 내용을 검토한 후 유럽에서도 '어떻게 이렇게 개혁적인 안을 추진하는가' 하며 크게 감탄하고 갔다.

그때 만들었던 많은 기구 중 하나가 '학교운영위원회'다. 각 학교에 운영위를 설치하고, 학부모와 지역 관계자들이 참여하게 해서 민주적 학교의사결정을 가능토록 했다. 학교 현장의 권위적 교육 행정 문화를 타파하고자 함이었다. 학교 내·외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창의적인 교육을 실현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다.

재벌개혁과 '정신 나간 世推委'

재벌개혁은 아직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이다. 문민정부는 기업 회계투명성 제고, 문어발식 경영과 순환출자 금지, 은행대출 출자전환, 외부이사제 도입 등 기업지배구조 개혁 작업을 물밑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정보가 밖으로 샜다.

개혁정보를 입수한 재벌들은 언론을 통해서 압박을 가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1995년 9월 한 경제지가 사설에서 '정신 나간 世推委(세추위)'라는 제하의 글을 실으면서 "경제가 매우 어려운데 지금 어떻게 재벌개혁을 생각하느냐 정신이 있느냐"는 식으로 주장했다. 재벌개혁은 우리나라 기업과 재벌을 위한 장기적인 개혁이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세추위(세계화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이홍구·김진현)가 재벌개혁을 맡고 있었는데, 그 사설이 나간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재벌개혁을 포기하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압박을 적절히 대처하기에는 사법개혁, 교육개혁 등 정책기획수석으로 내가 펼치고 있는 개혁전선이 너무 많았다. 안 되겠다 싶어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김인호)에 부탁해 재벌개혁과제를 넘겼다. 그러면서 재벌개혁은 처음 구상했던 것보다 좁은 형태의 개혁으로 끝나버렸다.

노동개혁도 어려웠다.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동개혁을 했었는데, YS의 노동개혁은 그 기본성격과 방식이 달랐다. DJ는 '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 체제였지만, YS는 '노사개혁위원회(노개위)'였다.

YS의 노개위는 위원 절반을 교수. 학자, 소비자, 중소기업 관계자 등 공익을 대표하는 전문가들(1/2)로 채웠다. 그리고 나머지 반수를 노사가 나눠(각각 1/4씩) 인적구성을 했다. 노사 관계는 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경제발전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사 간 타협도 중요하지만, 타협의 방향이 공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타협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공익을 대변하는 목소리의 비중을 높인 것이다. 노개위는 철저히 공익을 중심으로 노사 간 의견 차이를 수렴하는 구조였고, 논의도 그렇게 흘러갔다. 노개위의 결과는 굉장히 획기적이었고, 해외에서도 평가가 좋았다.

반면, DJ의 노사정위는 노사정을 3분의 1(1/3)씩 배정했다. '정'이 당사자 중 하나로 들어간 거다. 그러니까 노사가 각각 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바게닝'에 들어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사 중 한쪽이 협조하지 않으면, '정'이 불필요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노사는 노사정위 탈퇴를 명분으로 '정'을 압박한다. 자연스레 공익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오세훈법'의 뿌리, YS의 정치개혁

   
▲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 시사오늘

문민정부는 정치개혁에 대한 준비를 정말 많이 했었다. 1997년 YS는 이념과 지역에 노예처럼 사로잡힌 우리 정치를 '정책 중심의 정치'로 바꾸기 위해 정당구조와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 돈 먹는 지구당을 폐지하고, 정당 안에 정책연구실을 의무적으로 두게 해 '돈 중심 정당'에서 '정책 중심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YS는 여당 안에 '여의도연구소'를 둘 것을 직접 지시했다. 오늘날 새누리당의 '여의도연구원'은 그 산물이다.

또한 비례대표제의 대대적 확대,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선거제도를 개편하려 했다. 모든 것이 지역과 이념 종속성에서 벗어나고 정책의 전문성과 국가경영의 경험·경륜을 중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한보사태, 외환위기가 연이어 터지면서 문민정부의 힘이 급속히 위축됐다. 때문에 YS 정권 말기에 추진하려 했던 정치개혁은 오랜 기간 준비했음에도 불발로 끝났다. 그때 구상의 상당 부분이 2003년 '오세훈법'의 기초가 됐다.

사실 학자들은 '오세훈법'은 '박관용-박세일-오세훈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박관용 국회의장이 법 개정의 큰 방향을 제시하고 내가 그 내용을 만들고 오세훈이 이를 입법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세훈법'의 골자는 이미 수년 전에 YS가 준비했던 정치개혁안에 담긴 내용이다. 이 사실을 아는 분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2003년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정개협) 의장을 맡아 정치개혁을 주도했다. 당시 정치권은 한나라당의 '차떼기 불법 선거 자금 파문' 등으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었다. 각 정당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양각색의 정치개혁안을 내세웠다.

의견이 통일되지 않자 당시 박관용 의장이 여야 대표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정치개혁을 아예 민간 기구에 맡기자고 제안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이해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으니 차라리 국민과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개혁을 하는 게 좋겠다. 지금 정치권에서 개혁을 하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믿지 않는다. 중립적인 학자들이 개혁안을 만들게 하고 국회는 이의 없이 이를 받자"고 했다.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박 의장은 이내 나를 불러 정개협의 의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정개협은 그해 11월 13일 출범했다. 나는 중립성을 위해 진보와 보수의 대표들을 모두 아울러 정개협을 구성했다. 민변과 참여연대, 그리고 한변과 경실련, 그리고 전문성이 높은 중립적 학자와 언론인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전체 국회의원 중 3분의 1(1/3) 비례대표 선출', '여성 비례대표 50% 의무', 돈 먹는 하마라고 불렸던 '지구당 폐지' 등이 정개협 개혁안의 골자였다. 특히 돈 선거에 대한 엄벌과 돈 선거를 아예 할 수 없도록 입법조치를 강화하는 데에 치중했다.

개혁안이 공개되자,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느냐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졌다. 우리 정치 환경에서는 무리라는 말도 많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개혁안을 국회에 보냈다.

그게 '오세훈법'이다. 개혁안을 오세훈이 받아 발의한 것이다. '오세훈법'에 담긴 내용은 1997년 YS가 추진하려던 정치개혁과 일맥상통하다. 이후 선거에서 돈 선거가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됐다.

이밖에 문민정부는 복지개혁을 추진했다. YS는 복지개혁을 준비하면서 '생산적 복지'를 내세웠다. 세간에는 DJ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건 잘못된 얘기다. 생산적 복지는 YS의 복지개혁 구상에서 나온 개념이다. 연금개혁을 결단했다는 점도 높이 사야한다. 공무원연금개혁을 처음 시도한 게 문민정부다. 1995년 YS는 5.5%였던 공무원 연금기여율을 1999년까지 7%로 올리는 계획을 세웠고, 60세가 돼야 연금을 받아갈 수 있도록 연금지급개시연령제를 도입했다. '노인 수당 확대'도 이때 실시된 것이다.

문민정부의 개혁 작업에서 눈여겨 볼 게 하나 더 있다. YS는 효과적인 개혁을 위해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 새롭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셔 국가 개혁을 함께했다. 그는 이회창, 손학규, 이인제, 노무현, 이수성, 재야의 김문수, 이재오, 기업가 이명박 등 지역과 이념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인재 영입을 추진했다. 그야말로 '대(大)탕평책'이었다.

YS처럼 용기 있게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온 지도자는 과거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정치권이 그에게 배워야 할 점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YS의 개혁들을 살펴보면, 그는 과거의 적폐를 일거에 청산한 대통령이자, 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한 대통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평가된 YS, 재평가 시급한 이유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 시사오늘

그런데 YS는 왜 저평가돼 있을까.

1997년 IMF 사태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문민정부만의 과실이라고 보는 건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IMF 사태는 사실 세계 자본주의의,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1997년 8월 IMF 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경제는 아주 건강하다'고 평가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IMF 사태를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청와대는 금융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아마 이것이 완료됐다면 외환위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당에서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아직도 당시 김인호 수석과 강경식 부총리가 금융개혁을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노심초사하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에서 제시한 개혁안이 국회에서 통과돼야 하는데 야당에서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YS가 야당에 직접 전화해 "이건 정파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 또한 목격했다. YS, 김 수석, 강 부총리 모두 진정한 애국자였다.

문민정부의 책임을 미루려고 뒷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그저 YS에게 외환위기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는 것을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YS가 저평가를 받고 있는 데에는 문민정부의 개혁 작업을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한 정치권의 잘못도 크다. YS는 시대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변화와 개혁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여야 정치인들 가운데에는 이 같은 철학을 가진 분들이 많지 않았다. 말로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건 YS의 동지, 민주계도 마찬가지였다. 민주계는 분명 변화를 지향했지만, 개혁에 대한 충분한 철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열돼 '정권재창출'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아마 민주계가 분열되지 않고 힘을 모아 정권재창출을 실현시켰다면, YS가 이토록 저평가 받고 있진 않았으리라고 본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우리 정치권 안에 큰 인물이 있었다면 다수를 하나로 묶어 YS의 '변화와 개혁'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끌 지도자가 정치권에 부재했다. 나는 학자 출신이기에 한계가 많았다.

지금이라도 YS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는 공정하게 평가돼야 한다. 지도자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훌륭한 미래를 만드는 반석이 된다. 지도자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빼어난 미래의 지도자가 배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YS가 어떤 사람인가. 1966년 영국 <이브닝스타>는 '한국의 민주주의 실현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우는 것과 같다'는 기사를 실었다. 아무도 대한민국이 군부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때, YS는 민주화 투쟁을 통해 이를 이룩했다. 거리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항상 국회와 선거를 통해 싸웠다.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다. 민의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끝까지 국회와 선거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려 했던 분이다.

또 하나, YS가 위대한 것은 우파이면서도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개혁을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신봉자이지만,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맞추어 국가경영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YS는 끊임없이 역사를 바꾸려고 한 정치인이고, 역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한 정치인이다. 소위 '개혁적·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다.

하지만 YS 이후 우리 정치권에서는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니라 역사에 떠밀리고 있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시대의 파도를 적당히 타고 가면서, 기득권과 특권을 거래하고 나눠먹기 급급한 모양새다. 한마디로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 )이다. 진보와 보수,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똑같은 작태를 보이고 있다.

YS는 퇴임하고 나서 내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적어도 옛날의 정치는 대의가 있었다. 유신에 맞서 싸울 때만 하더라도 나라를 살리겠다는 대의 하나로 똘똘 뭉쳤다. 그 다음부터는 정치가 너무 한심해졌다. 대의가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우리 정치에서 공적인 목표, 국가적 목표는 사라진지 오래다. 사적이고 정파적인 이해관계가 판을 치고 있다. 철저히 정치가 사유화되고, 사물화 되어가는 경향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정치는 나라를 발전시킬 수 없다. 되레 후퇴시키는 힘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심화되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도 동력을 잃게 된다.

자본주의는 본래 동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이지만 빈부격차 등 부작용이 늘 따라 나온다. 이를 보완하는 게 건강한 민주주의인데, 민주주의가 병들면 자본주의의 병을 고칠 수 없다. 그러면 민주자본주의는 실패하게 되고, 좌파 또는 우파 독재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라틴아메리카가 그랬고, 스페인도 그랬다.

YS 변화·개혁, 선진통일의 그날까지…

   
▲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 시사오늘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YS가 추진했던 변화와 개혁의 정신을 다시 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20세기 말 YS가 주장했던 세계화와 정보화 개혁이 21세기에는 선진화 개혁과 통일로 이어져야한다. 한마디로 '선진통일'이다. 선진통일로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와 정보화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사명이다

또한 우리는 지난 문민정부 말기에서 왜 개혁이 흔들렸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YS의 개혁이 부분적 성공, 미완의 성공에 그쳤는지 반성해야 한다.

YS는 분명 시의 적절하게 세계화 시대에 맞는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개혁에 나섰다. 올바른 결단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사회 전반에, 특히 우리 정치권에서는 변화와 개혁을 주도할 사상과 철학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 일반의 이해도 당시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만든 모임이 '안민정책포럼'(안민포럼)이다. 안민포럼은 문민정부의 개혁 동력이 크게 위축됐던 1997년 '공동체자유주의' 주창을 선언했다. 국가시스템 개혁의 제1원리로 '자유주의 개혁'을, 제2원리로 '공동체주의적 보완'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쉽게 말하면,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 즉, '공동체자유주의'를 개혁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 △자유주의는 국가 발전의 원리, 공동체주의는 국민 통합의 원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안민포럼의 내세운 공동체자유주의의 깃발은 2006년 약 200명의 교수들이 모여 만든 '한반도선진화재단(한선재단)'으로 발전·진화했다.

한선재단은 19세기 말 문명개화파 이후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 YS-DJ의 민주화로 연결되는 '변화와 개혁의 흐름'을 이어 받아, 이를 '21세기형  공동체자유주의'라는 철학으로 정리했다. 또한 외교·국방·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정분야별로 변화와 개혁의 구체적 청사진을 만들어 정치권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넓히려 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한선재단 말고도 이와 유사한 국가정책지향형 민간 싱크탱크(Think tank)의 활동이 활발하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하나로 모여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한반도의 통일로 연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2050년 즈음에는 통일 한반도가 민족국가(Nation state)를 넘어 세계국가(Global state) 즉, 세계1등 선진국가, 세계평화 주도국가 세계양심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19세기 말 문명개화파에 뿌리를 둔 YS의 변화와 개혁의 의지는 앞으로 선진통일의 시대를 여는, 그래서 세계국가를 만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고, 또 반드시 지속돼야 한다.

박근홍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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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충열
(180.XXX.XXX.82)
2015-12-24 14:04:22
역시 이 시대의 석학이자 애국자입니다
내가 YS 교육개혁위원회 전문위원 시절, 박세일 교수는 위원이었으나, 수석으로서 바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잘 몰랐던 분이다. 그러나 그 후 이분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좁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내가 아는 두 분 석학이요 애국자 중의 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이런 분이 았어 '혼용무도'의 대한민국에도 희망이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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