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18 금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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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散策]노병구, ˝YS와 함께 이룬 민주광복, 시대 소명˝
YS에게 보내는 편지…대통령님, 그 곳 사정은 어떻습니까?
한 번 선택에 야당의 길로…어렵던 시절 동지로서 만난 YS
정치를 금지하던 시대, 시민을 경찰이 집에 감금하던 시절
무모한 모험 같던 3당합당, 결국 YS가 모두에게 승리한 셈
산업화를 들먹이며 박정희 미화…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워
2016년 01월 11일 (월) 글=노병구/정리=김병묵 기자 오지혜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글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정리 김병묵 기자 오지혜 기자)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의 YS에게 보내는 편지

김영삼 대통령님, 지금 계신 그 곳 사정은 어떻습니까?

지난 22일 잠결에 ‘대통령께서 조금 전 서거 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꿈인가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랐습니다. 며칠 전 김기수 실장과 문안전화를 할 때만 해도 대통령님의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고 하여, 매일 새벽 아내와 함께 대통령의 건강을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저희들의 곁을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공기전염이 염려된다고 해서, 3년 동안이나 병문안도 못하고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 찾아 뵙겠다’며 그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땐 그래도 희망이 있었는데 비보를 받고 그마저도 사라져 더욱 가슴이 미어집니다.

영안실에서 울며 문상을 하다가, 25일 밤엔 서울시가 세운 조문소 앞에서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줄을 서서 문상하는 조문객들이 고마워 문정수 전 부산시장, 심완구 전 울산시장과 함께 서서 늦게까지 그렇게 인사하다가 귀가하는데, 한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어떻게 오셨고 어떤 생각으로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대답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길을 따르던 사람으로, 오늘 이곳을 참배하는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나왔다”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생을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고 군사독재정권시절 정치권에서 유일한 자유인으로 거칠 것 없이 살다가 스스로를 이긴 분이다”고 말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고 어두운 밤길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가 속으로 ‘이 바보야! 그 없이는 우리나라 민주화(民主化)도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했어야지’라고 자책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장례 기간 동안에 많은 언론이 대통령의 업적을 비교적 사실대로 잘 보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감이 있어, 민주화의 동지로서 곁에 있던 제가 직접 보고 들은 대로 적시 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있어 제가 대통령과 함께 산 그 시대를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제가 보내는 추모요, 존경의 편지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거셨습니다. 두려움에서의 자유는 목숨을 거는 것이고, 철저한 개혁은 그래야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당당하게 많은 것을 이뤄 놓으시고 깨끗하게 그 나라에 가셨습니다. 이제 안식을 취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생각 날 때마다 또 편지를 쓰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2015년 11월 29일 노병구 올림

찬조연설로 시작한 정치, 운명이 되다

나는 처음부터 정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후(戰後)에 건강 문제로 법관의 꿈을 포기한 뒤, 야간 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던 나는 1957년 우연히 교회가 있던 신길동 동회장 선거의 찬조연설을 맡게 됐다. 당시엔 입후보자들도 연설에 익숙치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라, 찬조연설을 해줄 인물은 더욱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내가 돕던 후보자가 당선되자, 내 이름과 서울고등공민학교는 영등포 일원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때 성남중고등학교의 김석원 이사장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런데 얼마 뒤 1960년 7‧29 민의원 선거에 김 이사장이 영등포 갑구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내게 찬조연설을 간곡히 부탁했다. 김 이사장은 '민주당 천하'였던 그 선거서 서울 16개지구 중 유일하게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고, 나는 영등포 전체서 유명인사가 됐다. 회고하자면 이것이 내 정치활동의 첫걸음인 듯 싶다.

   
▲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시사오늘 오지혜 기자

한 번의 선택, 험난한 야당의 길로

그런데 1961년 5‧16 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이 운영한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의 주목을 받게 된 서울고등공민학교는 결국 문을 닫았다. 약사였던 아내와 결혼해 약국을 운영하며 나는 정치와 멀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약국 앞에 검은 지프차가 서더니, 4명의 기관원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잠깐 가자고 했다. 내가 “당신들은 누구고 어디를 가자는 겁니까”라고 묻자, “가보시면 압니다”라는 짧은 대답만이 돌아왔다.

차는 노량진 어느 골목길의 저택 앞에 섰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음식상이 잔뜩 차려져 있었고 여러 사람이 나를 반겼다. 그 중 한 사람이 “반갑습니다. 혁명 완수를 위해 정당을 만드는데, 노 선생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입회원서를 내놨다. 나중에 생길 공화당의 사전조직활동이었다.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놓고, 본인들은 각 지역에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을 모아 미리 정치조직을 만들어 놓는 치졸한 짓이었다. 그런 시대였다. 나는 “가까운 분들의 요청으로 찬조연설을 했지만 정치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입회입니까”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입회원서만으로는 입당이 되는 게 아니라고 하자 나는 결국 서류에 서명을 하고 왔다. 이 사건은 오히려 내가 박정희의 쿠데타를 적극 반대하는 계기가 됐다.

만약에, 그 때 못이기는 척 공화당에 입당해 여권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물질적 풍요도, 출세길도 열렸을지 모른다. 한 번의 선택이 나를 평생 험난한 야당의 길을 걷게 했지만, 후회는 조금도 없다. 이후 1963년, 난 6대 국회의원 총선거서 민주당 한통숙 선생의 당선을 도우며 다시 정치에 발을 들였다. 이 때 영등포 갑 지구당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73년 9대 국회의원 선거와 1980년 11대 국회의원 선거도 영등포에서 나섰다.

힘들던 시절 동지로 함께한 YS

1981년은 민주화 운동이 힘들던 시절 중에서도 가장 암울한 시기 중 하나였다. 그 때 난 정치적 스승이었던 유진산 총재가 돌아가시면서 고흥문계가 돼 있었다. 나는 당시 11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를 준비하는데, 김수한 의원(전 국회의장)과 이중재 의원이 나를 한사코 말렸다.  “무소속으로 나가면 넌 등록도 못해보고 구속”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민하는 나를 김태룡 의원이 적극 추천해 민권당 공천을 받았다.

   
▲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과 YS의 친필 ⓒ시사오늘 오지혜 기자

그런데 11대 총선서는 군사정권인 민정당과 민한당이 자기들끼리 넌 여당, 난 야당 하는 식으로 표를 갈라먹었다. 민주주의로 장난을 친 셈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낙선 후 정치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정권이 취직도 못 하게 하고, 정치도 못 하게 하니 먹고 살기 위해 여주에 돼지농장을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약국 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김영삼(YS) 총재가 막 연금이 해제됐다는 말을 듣고 위로 차 상도동에 들렀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늘 문전성시를 이루며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YS의 집에, 장학로 씨(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단 한사람민 있는 거다. 아주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가자 YS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참을 여러 이야기를 하고 일어서는데 YS가 꼭 다시 들르라고 했다. 내가 시작한 돼지목장을 구경하고 싶다고도 얘기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내가 상도동에 들르자, 다시 찾아와 고맙다며 직접 쓴 글을 노란 봉투에 넣어서 한 장 줬다. 내가 바로 다녀간 날 나를 주기 위해 썼다는 ‘민주광복(民主光復)’이라는 붓글씨다. 나는 그 글을 표구를 해서 약국에 걸어뒀다. 그러자 약국을 찾는 사람들이 이런 걸 걸어도 되냐고 물었다. 경찰관들도 와서 보고 갔다. 더러는 부러워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글을 팔라고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나는 그 해 YS와 함께 등산을 시작했다. 민주산악회의 태동이다. YS는 그 다음에 내게 글을 한번 더 써줬는데, 몇 년이 더 흐른 뒤다. 1986년 겨울 YS는 내 목장을 구경시켜 달라고 했다.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YS와 민주산악회는 이천에 있는 도드람 산에 산행을 나왔다가, 약 30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목장에 방문했다. 돼지를 두 마리 잡아 모두가 흥겹게 먹고 마셨는데 주변엔 비상이 걸려서 이천경찰서와 여주경찰서장이 총출동하기도 했다. 그 후 YS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글을 써서 선물했다.

평범한 시민의 가택연금, 상상할 수 있나

1983년 5월 18일 나는 아내가 운영하는 약국 문을 열기 위해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파트 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광명경찰서 정보과 형사 네 사람이 나를 막아섰다. 나이가 가장 어려 보이는 한 형사가 “위원장님, 밖에 못 나가십니다. 오늘은 집에서 책이나 읽으셔야 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무슨 이유로 영장도 없이 무고한 시민을 불법감금 한단 말인가?”라고 물었지만 “서장님 지시입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유도 모른다고 했다. 결국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이민우 민주산악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저 노병구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묻자 “노 위원장, 지금 김영삼 총재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어요. 민산 간부들이 연금조치를 당해서 그렇잖아도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고 있어요.

동지들과 전화로 연락하고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세요”라고 답했다. 전화까진 감시의 눈이 미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해 전화로 YS의 단식 소식을 이곳저곳에 알렸다. 국내에선 언론보도에도 나지 않았던 YS의 단식 소식이 서서히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몇몇 회원들은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시사오늘 오지혜 기자

무모한 모험 같았던 3당합당

1990년 3당합당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한국 정치사의 일대사건이다. 혹자는 당시 정치 상황에서 YS의 정치감각이 빛났던 승부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3당합당을 야합이라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평가는 역사의 몫이 될 터이나, 내가 3당합당 당시 직접 보고 겪은 바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김영삼(YS) 총재가 나를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1층에 있는 총재 방으로 올라갔다. 상도동 자택은 1층이지만 구조상 반 층 정도 올라가야 한다. 그 계단을 오르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둘이 마주보고 독대를 하는데, YS가 갑자기 불쑥 말을 꺼냈다.

“노 위원장, 같이 가자.”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하고 반문하니, 3당 합당 얘기를 했다. 자신의 지분은 25% 뿐이고, 노태우 대통령이 60%, 김종필 총재가 15%라고 했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당장 나는 “총재님, 말이 됩니까. 노태우랑 김종필은 둘이 같은 생각과 같은 뿌리 가진 사람들 아닙니까. 75%대 25%입니다. 이거 실제로는 3대1 싸움입니다. 절대 안됩니다. 명분도 잃고 실리도 다 잃습니다. 합법적으로 지겠다는 거고, 합법적으로 민정당에 꽃다발 안겨주는 겁니다. 제 생각엔 반대입니다”하고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러니까 YS의 표정이 확 어두워지면서 엄청나게 낙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두 손을 내 오른쪽 무릎에 얹고 다시 말했다. “노 동지, 내가 자신있다니까? 내가 정말로 자신있다니까? 같이 가자.” 마음이 좀 흔들렸지만 그래도 처음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노태우, 김종필한테 (대통령 후보 자리)준다는 보장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니 YS는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망연한 나에게 YS는 계속해서 그런 것 없지만 자신 있다고 계속 설득했다. 방 밖에는 기다리는 사람도 많고 해서, 우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암만 생각해도 총재님이 이번엔 잘못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합법적으로 우리 모두 바보되는 일을 해야 하는지, 말려야 하는지 난감합니다. 지금 생각 같아선 제가 안 갑니다. 집에가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라고 방을 나섰다. 그 순간의 그 낙심한 YS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아내와 의논을 했다. 아내가 “그렇다면 당신, 김대중(DJ) 씨를 따라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DJ는 아니었다. 함께 잠깐 정치를 해봤지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YS를 따라갈 게 아니면 정치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군사정권 하에선 제대로 된 정치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YS와의 의리를 지키고 그만둬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런 결론을 내린 뒤 가서 따라가겠다고 이야기하며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잘하신 건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맞이한 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 땐 엄청나게 마음을 졸였다. 초조하게 손에 땀을 쥐며 결과를 기다렸다. ‘이날 지면 YS도 나도 다 끝장나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겼다. 무려 66%를 득표하며 승리했다. 타고난 정치적 DNA가 있다고 밖엔 볼 수 없다. 이날의 승리를 돌이켜 보면, 사실 YS가 노태우와의 1대1 승부에서 이긴 것이다. YS는 박정희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군부 쿠데타의 세 핵심인물과 1대1 로 붙어 전부 승리한 것과 다름없다.

작금의 이해불가한 박정희 미화

   
▲ YS의 친필 선물 옆에 선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시사오늘 오지혜 기자

지금 사람들이 ‘산업화의 영웅’이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과하게 미화하는 사태를 보면 적잖이 안타깝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왜 따로인가. 민주화와 산업화는 같이 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를 따로 떼놓고 생각하나.

그리고 장면 정권의 민주당이 쿠데타 없이 계속됐다면 더 민주적인 상태로 경제발전을 했을 것이다. 쿠데타 없이도 경제발전을 해내는 게 이상적인 것 아닌가. 박정희 정권에서 이뤄냈던 성과들이 대부분 장면정부에서 이미 수립돼있던 정책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적어도 그 시대를 동지로서 함께 살고 YS와 함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던 나의 판단은 그렇다.

냉정하게 판단해보라. 박정희 정부는 불법적인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고,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아차 하는 순간 기본적인 인권을 잃고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나도 남산 어딘가로 끌려가서 지하 3층에 갇혀서 고초를 겪었다. 지금은 그 고문실, 취조실을 다 없앴다. 서대문형무소처럼, 보존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야 했다. 쿠데타는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YS가 대통령 하실 때 내가 한번 물어본 적도 있다.

“그걸 왜 없앴습니까? 그걸 그냥 두고서 독재정치가 이런 거다, 하면서 국민들한테, 후손들에게 한번 보여줬었어야 했습니다”라고 여쭤봤었다.

그렇다고 박근혜 정부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정권과는 다르다. 박근혜 정부는 정당한 법에 의거해 세워진 합법적인 정부 아닌가. 곱든밉든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본다.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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